한국 경제 헤집는 헤지펀드 망령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8.11.04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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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익률 만회 위해 다급한 몸부림…“한국은 좋은 사냥터”

▲ ‘하나금융그룹 출범 1주년 기념 해외 전문가 초청 금융 컨퍼런스’에서 라자드 사의 크리스찬 프레이 이사가 헤지펀드를 주제로 특별 강연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주 우리 증시는 1천2백 포인트에서 9백38 포인트까지 5거래일만에 22%가 수직 하락했다. 반면 원·달러 환율은 1천3백15원에서 1천4백24원까지 급상승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장이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간 것이다. 한·미 간 3백억 달러의 통화 스와프 성사로 극심한 혼조세를 가라앉히고 일단 한숨 돌렸지만 하루하루 시장에 대응하느라 펀드 매니저들과 외환 딜러들은 죽을 맛이다. 우리 경제의 핵심적인 변수인 주가와 환율이 보여주는 이런 불안정한 모습의 이면에는 헤지펀드가 숨어 있다. 전세계적인 금융 위기 여파로 쇠락할 기미를 보이는 헤지펀드가 국내 시장을 정조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국 시장은 그처럼 헤지펀드에게 먹잇감으로 여겨질 정도로 취약하기 짝이 없다.

보유 외환이 충분한데도 은행들의 단기 외채 상환 불능 논란과 함께 흉흉한 위기설까지 나돌며 국내 시장이 극도의 혼란상을 드러낸 것은 헤지펀드들의 암약과 무관하지 않다. 올 상반기부터 외국인들은 몇몇 우량 종목을 중심으로 집중적인 공매도를 했다. 공매도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주식을 파는 것으로 주로 정보력과 자금력이 풍부한 헤지펀드들이 약세장에서 단기 차익을 노려 거래하는 방식이다.

 일례로 지난 10월29일 급등락장에서 외국인들은 매수세를 보였다. 시가총액 상위 종목에 해당하는 몇 개 종목에 매수가 집중된 것은 공매도를 청산하기 위한 숏커버링 물량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미 충분히 팔았다는 일각의 낙관적인 분석에도 불구하고 헤지펀드들은 개미 투자자들과는 전혀 다른 투자 양태를 드러낸 셈이다. 이는 이미 공매도한 주식 물량을 되돌려주기 위해 공매도할 때보다 좀더 싼 가격에 사들여 차익을 챙기기 위한 것이다. 예를 들면, 주당 1만원에 공매도를 했는데 주가가 떨어져 그 주식이 7천원이 될 경우, 매도자는 7천원에 주식을 사서 돌려주고 3천원의 차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증시 상황에도 영향 미쳐

이런 식으로 국내 시장은 헤지펀드들에 의해 유린당했다. 근거 없는 각종 악성 루머들이 나돌아 시장이 어지러워지고 주가가 지나치게 저평가되어 대책 없이 폭락했던 최근의 상황은 헤지펀드들 때문에 빚어진 측면이 크다.      

외국인들은 올해에만 우리나라 시장에서 33조원의 주식을 팔아치웠다. 국내 주식시장은 10월에만 1천4백50 선에서 8백90 선까지 폭락했고, 이 기간 외국인은 유가증권 시장에서 5조원 가까운 매물 폭탄을 투하했다. 이면에는 헤지펀드가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이다. 장기 투자 자금의 성격을 갖는 뮤추얼펀드의 경우 시장 변화에 따라 포트폴리오 조정이 일정 부분 필요하지만 단기간에 이렇게 많은 자금을 한 시장에서 급하게 빼내갈 필요성은 많지 않다. 더구나 이익을 실현하는 것도 아니고 환율도 불리하게 움직이는데 굳이 손절매까지 하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그러나 헤지펀드는 상황이 다르다. 헤지펀드는 급격한 디레버리지 과정을 겪고 있다. 지속적인 수익률 악화에 따른 환매 물량도 최대 규모이고, 대출을 해주던 투자 은행들은 이미 파산에 이르렀다. 추가 담보 요건 충족과 유동성 확보가 지상 과제가 된 것이다.

한 신문사의 조사에 의하면 헤지펀드로 자진 신고한 외국인의 국내 투자분은 약 3조7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에 정체를 밝히고 싶지 않은 숨겨진 투자분을 모두 포함하면 약 11조원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물론 추정치이다. 헤지펀드의 어려움은 점차 가중되고 있고 자금 회수가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까지보다 규모는 줄어들겠지만 당분간의 충격은 각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시장의 변동성이 크다는 점과 충분한 유동성으로 회수가 용이하다는 점, 이머징마켓의 주요 시장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탈 속도는 빨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헤지펀드의 정의는 통일되어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소수 적격 투자자들의 자금을 기반으로 수익을 낼 수 있는 모든 투자 대상에 대해 투자를 하며, 성과 보수를 받고 레버리지를 이용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소수의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받으므로 공모 펀드처럼 투자 대상에 대한 제한을 받지 않는다. 한마디로 돈이 되는 전세계의 모든 대상에 투자를 하며, 성과급을 받기 때문에 매니저의 목표는 최고의 수익률이 되는 경우가 많다. 성과 지상주의의 극단적인 형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장 상황에 관계없이 절대 수익을 추구한다고 알려진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이러한 특성은 헤지펀드의 출발에서 기인한다. 최초의 헤지펀드로 알려진 합자회사 형태의 펀드를 운용했던 알프레드 존스(Alfred W. Jones)는 자신이 종목을 선택하는 우월한 능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시장의 방향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즉, 어떤 종목이 과대평가되었고 과소평가되었는지는 확신할 수 있지만, 시장이 오를지 내릴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은 과대평가된 주식을 매도(공매도)하고 과소평가된 주식을 매수하는 전략이었다. 시장이 상승하면 매수한 주식으로부터는 이익이, 공매도한 주식으로부터는 손실이 발생하게 된다. 반대로 시장이 하락하면 매수한 주식에서는 손실이, 공매도한 주식에서는 이익이 발생한다. 어느 경우나 이익의 크기가 손실보다 크기만 하면 시장이 오르든 내리든 상관없이 항상 수익을 낼 수 있는 포트폴리오의 구성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흔히 롱/숏전략(long/short strategy)이라고 알려진 헤지펀드의 기본적인 투자 방식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전세계적인 주식시장 폭락의 주범으로 이 전략의 기본이 되는 공매도가 금지되면서 헤지펀드의 전략에 큰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헤지펀드 리서치의 발표에 의하면 올해 들어 헤지펀드들은 평균 -17.6%의 손실을 입었으며, 이에 따라 약 2조 달러에 달하던 펀드 규모도 3천억 달러 이상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10년 이래 최악의 상황이자 최대 규모의 감소이다. 절대 수익률을 추구하는 헤지펀드의 속성상 엄청난 손실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따라 투자자들의 환매 요구는 거세지고 있으며, 레버리지를 제공했던 금융 기관으로부터의 대출 회수 및 추가 담보 요구뿐 아니라 공매도 금지와 같은 각종 규제의 강화로, 헤지펀드는 더욱 설자리를 잃고 있다.

운용 규모가 1백80억 달러로 미국 최대 헤지펀드인 시타델이 유동성 확보를 위해 전체 자산의 30%를 현금으로 보유하고 있다는 고백한 것은 헤지펀드의 위기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새로운 희생양 통해 극적 반전 노려

앞으로 수백 개의 헤지펀드가 문을 닫을 것이라는 전망이 무성한 가운데 헤지펀드들은 안전 자산으로 피난하고 환매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해 세계 주식시장에서 매도세를 강화하는 한편 새로운 먹이 사냥을 통해 극적인 수익률 만회를 노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중반까지 원인이 분명하지 않았던 원유 원자재 가격 폭등의 이면에도 헤지펀드의 손길이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미국 의회에서는 원유 선물 거래의 71%가 투기 거래라는 상품선물거래위원회의 조사 결과에 대한 대책을 논의 중이다.

올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교수는 신흥 시장에서 가장 공격에 취약한 국가로 러시아, 브라질과 함께 한국을 지목했다. 이런 상황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 10월29일 국내 증시였다. 29일 국내 증시는 전날 미국 증시가 10%가 넘게 폭등한 가운데 1천47 포인트에서 기분 좋은 출발을 하며 1천78 포인트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오후 들어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조건을 검토한다는 근거 없는 소문과 함께, C&그룹의 워크아웃설로 30 포인트가 하락하며 하루 동안 1백58 포인트(14.6%)가 출렁이는 장세를 연출했다. 여기에 IMF의 자금이 얼마 남지 않아서 가급적 빨리 요청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재미 없는 농담이 더해지면서 시장은 투매 양상을 보였다. 이대통령과 강만수 장관을 지칭하는 ‘리만 브러더스(LeeMan Brothers)’라는 농담이 로이터에까지 보도되고 드러내놓고 정부 정책의 신뢰를 거론하고 있는 상황이니 시장이 별로 기댈 곳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헤지펀드들이 유동성 확보를 위해 불가피하게 처분해야 하는 주식시장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외환시장이다. 시장의 많은 참가자들이 우리나라가 다시 외환위기 상황에 이르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여러 가지 상황이 1997년 당시와 유사하다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지적하고 있다. 단기 외채의 규모가 크고 지속적인 환율 방어에 성공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도 거론되고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는 대기업들이 차입을 통한 외형 확대에 치중했고, 종금사들이 해외로부터의 단기 차입금을 동남아, 러시아 등의 채권에 장기로 투자함으로써 위기를 키웠었다. 결국, 한보그룹의 도산을 시작으로 은행들에 대한 해외달러 차입이 끊기자 외국인들의 자본 회수가 급격히 이루어지면서 주가는 폭락하고, 환율이 급등하면서 급기야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었다.

현재의 상황은 종금사에서 은행들로 주연이 바뀌었다. 지난해 은행들은 예금에서 펀드로 자금이 이탈하자 필요한 자금의 상당 부분을 외화 차입에 의존했다. 기업에 대한 대출도 급격히 증가했다. 차입금의 상환 기일은 도래하는데 금융 위기로 신규 조달이 어려워지니 차환이 불가능하다. 결국, 외화 자금을 갚는 수밖에 없는데 환율은 계속 오르고 있다. 외국인들은 주식에서 돈을 빼서 달러로 바꾸어 나가니 달러 자금은 더욱 부족하다. 정부가 개입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지만 외환보유고가 걱정되는 상황이다. 다시 외환위기가 올수도 있다는 시나리오의 대략적인 내용이다.

헤지펀드와 ‘환율 전쟁’ 벌어질 수도

정부에서는 이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한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선 펀더멘탈에 해당하는 기업들의 재무 상황이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 과거 4백%에 육박하던 기업들의 부채 비율은 100% 미만으로 유지되고 있다. 물론 C&그룹처럼 일시적인 유동성 부족으로 기업들이 위기에 처할 수는 있지만 그 여파는 제한적일 것이다. 단기 외채의 규모도 추정 방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외환보유액 규모로 보면 과도한 수준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시장이 충분히 안도하지 못하는 것은 로이터가 지적한 것처럼 정부 정책에 대해 신뢰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단순히 국내에 그치지 않고 헤지 펀드들의 투기 욕구를 자극한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질 수 있다. 크루그먼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헤지펀드들이 원화 약세 쪽에 본격적으로 베팅을 시작한다면 환율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다. 특히 강만수 장관의 주장처럼 ‘환율은 주권’이라는 식의 접근이라면 싸움은 더욱 불리해진다. 헤지펀드의 규모는 약 1조7천억 달러로 추정된다. 모든 헤지펀드가 환율에 대한 베팅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 환율의 방향성이 보인다면 새로운 먹이를 찾고 있는 전세계의 헤지펀드를 끌어모으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그나마 미국과 체결한 3백억 달러의 통화 스와프는 그 규모보다는 시장의 신뢰를 제고하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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