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팍한 현실에 ‘이웃’ 손길이그리워진 걸까
  • 조홍래 편집위원 ()
  • 승인 2008.11.18 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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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 러시아와 관계 정상화 추진 금융 위기와 오바마 ‘당선’ 후 태도 돌변

▲ 지난 9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왼쪽)이 러시아의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만나고 있다. ⓒEPA

금융 위기와 오바마의 등장으로 미국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유럽이 갑자기 바빠졌다. 유럽연합(EU)은 러시아의 그루지아 침공으로 중단된 EU-러시아 관계 정상화 회담을 곧 재개한다고 발표했다. EU는 당초 그루지아 휴전 조건이 충족되기 전에는 러시아와 회담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러시아군이 그루지아에서 완전히 철수하기 전에 러시아와 회담을 재개한다는 성급한 발표는 미국의 기류와는 상치된다.

지난 4월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담 때도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아를 나토에 가입시키려던 미국의 시도는 일부 유럽 국가들과 러시아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더구나 부시와는 달리 러시아 지도자들에 다소 냉담한 오바마의 등장에 맞추어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EU가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서두르자 유럽이 대러시아 외교에서 미국을 제치고 선수를 치고 있다는 관측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미국의 독주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EU측의 정서를 그대로 드러낸다. 미국을 견제하는 측면에서는 러시아도 EU와 같은 생각이어서 묘한 여운까지  풍긴다. 

지난 9월1일 EU는 러시아와의 전략적 합의를 동결했다. 이 조치에는 ‘그루지아 전쟁이 터지기 전인 8월7일 당시의 남오세티아 기지로 러시아군이 철수할 때까지’라는 조건이 붙었다. 러시아는 그루지아에서 분리·독립을 선언한 친러시아 남오세티아의 주권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그루지아를 침공했다.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중단한 EU의 조치는 유럽의 단결을 과시하는 전례 없는 것으로 미국도 러시아를 견제하는 유럽의 결정을 내심 환영했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 당선인이 등장하면서 유럽의 태도가 돌변했다. 러시아와 회담을 재개한다는 EU의 발표는 쌍방이 서로를 얼마나 필요로 하는가를 보여준다. 이 제스처는 동시에 오바마에게도 묵시적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 시대는 끝났으며 유럽의 일은 유럽이 알아서 하겠다는 신호이다. 회담 의제에는 에너지, 무역, 안보, 대테러 전쟁에서의 협력 등이 포함되어 있다.

미국의 일방주의 끝났다는 신호…세계 권력 구도 재편 암시

러시아는 유럽 에너지 수요의 상당량을 공급하고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유럽 국가들은 크렘린이 혹시 유럽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을 갖고 있다. 러시아는 이미 두 번이나 그런 조치를 단행한 바 있다. 또한, 유럽에 대한 에너지 수출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는 러시아는 유럽의 중요성을 소홀히 할 수 없다. G8 회원인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은 미국이 주도하던 세계 금융 구조를 개편하려는 유럽의 구상에 필수적이다.

EU 의장을 맡고 있는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조만간 프랑스 니스에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과 만난다. 이 정상회담은 워싱턴에서 열리는 G20  경제 정상회담 후에 별도로 열린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러시아는 그루지아 휴전 조건을 완전히 충족하지 않았다. 그러나 EU 27개국 가운데 리투아니아를 제외한 26개국은 러시아와의 회담 재개에 동의했다. 프랑스 외무장관의 말을 빌리면 유럽의 단결이라는 대의를 위해 1개국의 반대는 무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프랑스 관리들에 따르면 남오세티아 접경지역 일부는 아직도 러시아군에 의해 합법적으로, 일부는 불법적으로 점령되어 있는데 이 문제는 앞으로 제네바에서 열릴 후속회담에서 토의하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러시아가 병력의 주력을 철수하고 제네바 회담에 참석하겠다는 양보를 함으로써 EU-러시아 회담 재개 명분을 충분히 쌓았다는 것이 사르코지의 입장이다. 러시아는 그루지아에서 분리·독립한 남오세티아와 압하지아에 아직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러시아는 두 나라를 독립국으로 인정하기까지 했다.

당초 대러시아 관계에서 강경 입장을 보이던 영국과 폴란드도 회담 재개를 지지했다. 폴란드는 회담 참가 의사를 밝히며 자국이 EU의 중심권에 진입했다고 분석했다. 유럽위원회도  EU와 러시아에 더 중요한 것은 그루지아보다 금융 위기임을 분명히 했다. 

러시아는 최근 동유럽에 미사일 방어망을 설치하려는 미국의 계획에 맞서 러시아도 폴란드 접경 지역에 단거리 미사일을 배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과 러시아가 미사일 문제로 신경전을 벌이는 시기에 유럽이 서둘러 러시아와 손을 잡는 데 대해 워싱턴은, 공식 반응은 보이지 않았으나 심기가 편치 않아 보인다. 미국은 유럽을 겨냥한 이란의 미사일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폴란드와 체코에 미사일 방어망을 설치할 계획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미사일이 러시아를 포위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유럽의 새 역할 모색은 그루지아 전쟁 때 사르코지가 보인 외교력과 무관하지 않다. 대다수 유럽 국가와 미국이 러시아에 대한 응징을 논할 때 사르코지는 다르게 접근했다. 그가 모색한 것은 휴전이었다. 외무장관을 그루지아 수도 트빌리시에 즉각 파견하고 자신도 모스크바와 트빌리시를 왕복했다. 사르코지의 중재 덕분에 휴전이 성립되고 러시아군은 그루지아에서 철수했다. 미국 방식으로 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르코지 중재로 ‘그루지아 휴전’ 성립…EU, 냉전 예방 주역으로

일촉즉발의 그루지아 위기가 평화적으로 수습된 것은 새 냉전을 막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지만 유럽이 냉전 예방의 주역으로 부상했다는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사르코지는 메드베데프를 만나 유럽인 대 유럽인으로 담판을 지었다. 서방 대 러시아가 아니었다. 냉전 방식을 버렸다는 얘기이다. 러시아가 사르코지의 제의에 응한 것은 그것이 카우보이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러시아가 미국에 대해 얻을 수 있는 것을 대신 제공하겠다고 제의했고, 러시아는 이를 믿고 휴전 조건에 합의했다.

사르코지는 러시아가 서방에서 얻고자 하는 신뢰를 보여주었다. 이런 신뢰 구축에는 독일도 기여했다. 독일도 미국의 독주에 권태를 느끼던 터이라 기꺼이 사르코지를 도왔다. 영국의 조지 브라운 총리까지 거들었으니 금상첨화가 된 셈이다. 그루지아 사태에서 유럽의 리더십은 빛을 발휘했다. 향후의 동서 긴장에서 이번과 같은 시나리오가 작동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직 희미하기는 하지만 이번 일화는 세계 권력 구도의 개편을 암시한다. 

나토의 팽창, 러시아의 그루지아 침공과  군비 증강, 중국의 군사 대국화 등으로 냉전 회귀 조짐이 나타난 순간에 미국이 금융 대란에 함몰됨으로써 지평선에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바로 이 공백을 먼저 차지하려는 욕망의 대열에 유럽이 먼저 나섰다. 

마침 러시아는 푸틴을 대통령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입법안을 예고했다. 푸틴은 러시아를 ‘제3 로마 제국’으로 건설하려던 레닌의 야망을 버리지 않는 인물이다. 그가 대통령으로 복귀하고 유럽과 밀착할 때 오바마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부시는 푸틴과 인간적으로 친숙했으나 오바마는 아직 유보적이다.   

유럽, 러시아, 미국의 3각 관계에 변화가 오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만, 각자의 계산이 다를  뿐이다. 메드베데프의 등장과 푸틴의 권력 일선 복귀 움직임 그리고 사르코지가 주도하는 EU의 위상 격상이 미국의 전환기와 맞부딪혔다. 미국의 유일 강대국 시대도 끝난 시기에 유럽의 행보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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