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 대란’북풍한설이 온다
  • 김진령·반도헌 (jy@sisapress.com)
  • 승인 2008.11.25 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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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위기의 여파로 은행권을 비롯한 산업 전반에 구조 조정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각종 생산 현장에서 벌어지는 감원, 조업 단축이 서비스 분야로까지 확산되면 걷잡을 수 없는 ‘실직 도미노’에 빠지게 된다.

불황의 그림자가 산업 현장을 덮치면서 실업 대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월스트리트를 집어삼킨 데 이어 국내 금융시장을 뒤집어놓으면서 은행권을 유동성 위기로 몰아넣더니 연쇄적으로 자동차·건설·조선·해운·화학 업종 등 전 산업을 흔들고 있다.

해운업을 바탕으로 건설, 조선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던 씨앤그룹이 부도 위기에 처해 계열 붕괴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은 요즘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디플레이션 공포와 함께 세계 경기가 가라앉으면서 원자재 수송량이 줄어 주 수입원이었던  벌크선 가동률이 크게 떨어졌다. 여기에다 부동산 경기 침체로 미분양 아파트가 늘어나고 신규 진출한 조선 사업은 금융 위기로 대출이 막히면서 그룹 전체가 ‘돈맥 경화’에 빠져 그대로 무너질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은행들은 자신도 살아야겠다며 돈줄을 죄고, 기업들은 판로가 막혀 은행만 쳐다보다 부도 위기에 몰리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더욱 큰 문제는 현재 금융이나 건설, 조선 등 일부 업종에서 타개책으로 구조 조정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점차 전 업종으로 파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들은 업종을 가리지 않고 몸집 줄이기에 들어갔다. 아직 본격적인 인력 조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산 라인을 줄이거나 하도급 물량을 없애는 식의 감원 조치가 현장에서 비일비재로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이 다시 실업 대란의 악몽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금융권은 현재 구조 조정의 태풍 전야에 놓여 있다. 지난 외환위기 때 5백96개의 부실 금융 기관이 퇴출되거나 합병되어 사라졌다. 당시 직장을 잃은 금융맨은 무려 9만여 명에 이른다. 그때처럼 조직적인 금융 구조 조정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40대말에서 50대에 이르는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감원 작업이 벌어지고 있다.

외국계 은행인 SC제일은행은 이미 지난 9월 ‘희망퇴직제’를 통해 1백90명에 대한 구조 조정을 단행했다. 한국씨티은행도 희망퇴직을 놓고 노·사 간 협의를 진행 중이다. 문제는 이런 소규모 구조 조정이 아니라 더 큰 태풍이 예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지난 11월19일 뉴욕에서 가진 기자간담회를 통해 국내 은행들의 리스크 관리를 비판한 뒤 “새로운 짝짓기를 할 수 있다”라며 대대적인 구조 조정 가능성을 제기했다. 외환위기 뒤 10년 동안 은행 간 합병 등을 통해 4대 금융그룹이 등장했고, 이 과정에서 많은 은행원들이 잉여 인력으로 지목되어 명퇴를 당했다. 이명박 정부가 새로운 판을 짜는 과정에서 기존의 국민-우리-신한-하나 은행 등 4대 은행 체제를 다시 흔든다면 ‘은행원 대학살’이 재연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자동차 업계도 잇달아 생산 라인 감축

자산운용사와 증권사 등 제2 금융권에서는 진작 명예퇴직 등 감원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하나대투증권은 최근 차장급 이상 직원 1백50명으로부터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미래에셋증권은 연말까지 20개 지점을 줄일 방침이다. 즉, 연말까지 1백52개 지점을 1백32개로 줄이기로 했다. 외국계 증권사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골드만 삭스나 UBS증권, 씨티증권 등이 10%에 해당하는 인원을 줄이거나 감원 작업을 끝낸 상태이다. 자산운용사도 같은 처지이다. 골드만삭스자산운용과 ING자산운용도 10% 안팎의 감원을 계획하고 있다.
국내 자동차 산업의 조짐도 심상치 않다.

GM대우차의 마이클 그리말디 GM대우차 사장은 지난 11월19일 부평공장에서 “재고 물량을 줄이기 위해 다음 달에 부평2공장 가동을 근무 일수 기준으로 22일간, 부평1공장의 경우 7일간 각각 중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동안 ‘설’로만 떠돌던 GM대우차의 감산 계획안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일파만파의 파장을 낳고 있다. 완성차업체가 짧게 1주일에서 22일간 쉰다고 하면 부품 납품업체들은 그보다 훨씬 긴 기간 동안 문을 닫아야 한다. 대우차의 2차벤더인 인천의 한 주물업체는 넉 달간 쉬기로 했다. GM대우차가 7일간 조업을 중단한다고 하지만 1차 벤더부터 2차 벤더까지는 사실상 4개월 동안 납품 중단 통보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내년 설까지 2차 벤더 회사의 전 직원은 실직을 하게 된 셈이다.

GM대우차의 할부판매 부분도 시련을 겪고 있다. 할부 판매를 담당하는 대우캐피탈이나 우리캐피탈은 자금 조달의 길이 막혀 정상 영업을 하지 못하고 있다. 대우캐피탈은 지난 10월부터 사실상 자동차 할부 판매 영업을 중단하고 있다.

국내 최대의 메이커인 현대자동차도 예외는 아니다. 현대차는 지난 10월 말부터 미국 앨라바마 공장의 조업 단축에 들어갔다. 이런 분위기가 국내에 파급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고 자동차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GM의 중국 합작선인 상하이GM에 납품하는 자동차 부품회사 델파이는 11월부터 주 4일 근무를, 오는 12월에는 주 3일 근무를 계획해 실질적인 감원 조치에 들어갔다.

정부가 나서서 대주단을 구성해 구조 조정을 독려하고 있는 건설 업종은 집단 몰락을 우려할 만큼 상황이 심각하다. 정부가 ‘대주단’이라는 이름의 워크아웃 프로그램을 강요하다시피 밀어붙이고 있는 것은 건설 부실이 은행 부실로 옮겨가는 상황을 막기 위한 고육책일 수 있다. 건설사들이 미분양 아파트와 보유 부동산을 헐값에 팔아넘기거나 아예 주저앉을 경우 부동산시장의 거품은 고스란히 은행권 부실로 전가되어 금융 대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다. 결국 대주단은 부실 건설사들을 질서 있게 퇴각시켜 시장을 연착륙시켜야 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셈이다. 지난 10월 말 현재 전국의 건설 산업 종사자는 1백85만명에 이른다(KDI 자료). 이들의 상당수가 대주단 주도의 구조 조정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면 실업 대란은 당장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게 된다. 

“외환위기 때와는 충격파 다를 것”

▲ 서울 도화동 서울서부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 한 구직자가 정보를 찾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하지만 작금의 위기 상황이 시장의 실패에서 왔다는 점에서 정부가 적극 나서 구조 조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LG경제연구원 박상수 연구위원은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드러난 이상 금융권에만 기업 구조 조정을 맡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가 나서 신속하고 과감한 구조 조정을 해야 우리 경제가 위기가 지난 다음 건전하게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만일 정부의 주도 아래 업종별 구조 조정이 이루어져 건설·조선 등 생산 현장에서 벌어지는 감원 선풍이 서비스 분야로까지 확산된다면 ‘제2의 환란 상황’까지 감수해야 한다. 경제 전문가들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정리 작업을 벌였던 지난 환란과 지금은 충격파가 다를 것이라고 말한다.

박연구위원은 “10년 전에는 부실의 요인이 기업 내부에 있었지만 지금은 대외 요인에다 위기의 진원지가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이어서 어려운 측면이 많다”라고 지적했다. 즉, 구조 조정 대상 기업이 수적으로 엄청나고 실직 가정의 대부분이 서민층으로 전락해 상당수 소비자층이 구매력을 상실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업이 곧 불황을 더욱 깊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게 된다. 

 소규모 여행사를 운영하는 박 아무개 사장은  “외환위기 때는 재벌 그룹이 몇 개 나가떨어지면서 은행과 상층부의 구조 조정으로 끝났지만, 지금은 위아래 모두 흔들리고 있다. 여름을 거치면서 소형 여행사들이 박살났고 요즘은 대형 여행사의 부도설도 나돌고 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외환위기 이후 LG카드에서 일하며 카드 대란을 겪었던 신한카드의 한 간부는 “1997년의 위기는 동남아와 우리나라만의 문제였지만 지금은 부자 나라에서 시작된 위기가 전세계로 퍼지고 있다는 점에서 골도 깊고 탈출하는데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다”라고 말했다.

감원과 조업 단축은 실직으로 이어지고, 이는 가계 부도로 이어진다. 10년 전 외환위기, 2003년의 카드 대란 때 우리는 이미 그것을 경험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욱 힘들고 고통스러울 것으로 보이는 실업 대란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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