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치 키우고 대출 늘리다 ‘후덜덜’
  • 하수정 (이데일리 기자) ()
  • 승인 2008.12.09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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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 괴담에 떠는 은행들, 자구책 마련에 초비상…후순위채 발행에 감원까지 나서

▲ 왼쪽부터 국민은행, 외환은행, 우리은행, 하나은행 본점과 영업점. ⓒ시사저널 임영무

지난 9월 미국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후 우리나라에도 대형 금융사의 부도설이 흘러나왔다. “국내 4대 은행 중 한 곳인 A은행이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다, 그룹 계열사 간에도 서로를 믿지 못해 콜(단기) 자금조차 빌려주지 않는다, 곧 계열 증권사를 팔아 자금을 조달할 것이다, 강남 프라이빗뱅킹(PB) 고객들이 뭉텅이로 예금을 빼가고 있다….” 때마침 무디스와 피치 등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국내 시중 은행들의 등급 전망을 줄줄이 하향하면서 이같은 은행 부도설은 들불처럼 퍼져갔다.

결국 A은행은 원화, 외화 유동성 비율 모두 적정선 이상인 것으로 드러났고, 월말 예금 잔액 역시 줄어들지 않은 것으로 나타나면서 부도설은 말 그대로 ‘설’로 끝났다. 그러나 은행의 대외 신인도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글로벌 금융 위기의 회오리는 국내 은행들에게 가혹하리 만큼 거세다. 국내 산업과 가계에 자금을 수혈해야 할 은행들이 스스로의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까지 내몰리고 있다. 이같은 위기는 은행들이 자초한 면도 없지 않다. 은행 간 외형 확대 경쟁을 벌이면서 대출을 늘렸고 이를 위해 무리하게 자금을 차입해 수익성과 건전성 모두 하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필 국민은행은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금융시장이 요동칠때 지주사로 전환하면서 3조4천억원의 비용을 치러야했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은 3분기 9.7%로 전분기 12.4%에서 뚝 떨어졌다. 하나은행의 경우 통화 옵션 상품인 ‘키코’에 폭탄을 맞은 태산엘시디의 부도 여파로 8년 만에 분기 적자를 기록했다. 우리은행은 부채담보부증권(CDO)과 크레딧디폴트스왑(CDS) 등 해외 파생 상품 손실로 전기 대비 60% 이상 순익 급락을 맛보아야 했다.

부동산 경기 주저앉으면 주택담보대출도 위험

앞으로가 더 문제이다. 이대로 부동산 경기가 주저앉으면 건설업체들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뿐 아니라 가계의 주택담보대출까지 부실화될 처지이다. 또, 경기 하강이 빨라지면서 기업들의 부도 사태가 발생한다면 은행들은 고스란히 쏟아지는 부실 채권을 떠안아야 한다.

진퇴양난에 몰린 은행들은 우선 BIS(자기자본비율)를 높이기 위한 자본 확충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본 확충이 곧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사실 은행들은 ‘BIS 자기자본비율 8%’에 대한 쓰라린 경험이 있어 여기에 더욱 집착하는 면이 없지 않다.

외환위기 당시 금융 당국은 자기자본비율이 8%가 안 되는 은행 모두를 문 닫게 하거나 합병시켰다. 12곳 가운데 5곳(동남·동화·충청·경기·대동은행)은 퇴출되었고, 한빛·평화·광주·제주은행 등은 인수·합병(M&A)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자기자본비율이 은행의 부도 가능성을 측정하는 지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금융 감독 당국은 자기자본비율 10%를 우량은행의 기준으로 삼고 있으며 8% 밑으로 떨어지면 경영 개선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최근에는 금융 부실 등을 감안한 완충 능력 강화를 위해 11~12% 이상을 사실상 권고하고 있다.

은행들은 자기자본비율을 11%대로 끌어올리기 위해 자본으로 인정되는 후순위 채권을 대규모로 찍어내고 있다. 국민은행은 지난 11월 무려 1조5천억원의 후순위 채권을 영업점 창구에서 팔아치웠다. 

후순위채란 말 그대로 채권 변제 순위가 가장 뒤에 있는 채권이다. 채권을 발행한 기관이 파산할 경우 다른 모든 채무를 변제한 이후에나 순서가 돌아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금리가 높다. 만기가 5년 이상인 후순위 채권은 보완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자금 확충을 위해 선순위채인 은행채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발행하자니 마땅한 매입자가 없는 데다 시중 금리를 끌어올리는 효과가 발생할 수 있어 금융 당국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은행들이 높은 금리를 주고서라도 후순위 채권을 발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동원해 회사채를 발행해 은행을 지원토록 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SC제일은행 등 금융 기관마다 인력 감축 불가피

KB금융지주는 5천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해 전액을 국민은행 증자에 투입할 예정이며, 하나금융지주도 회사채로 조달한 9천5백억원을 하나은행 자본 확충에 쓸 방침이다. 우리금융지주도 8천억원의 회사채 발행분 중 7천억원을 우리은행 증자에 쓰기로 했다. 고금리를 내야 하는 이 빚들이 앞으로 은행의 수익성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 자명한데도 생존을 위해서 너도나도 자본 확충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은행들은 자체 비용 줄이기에 나설 수 밖에 없다. 그중 하나가 바로 구조 조정이다. 은행들의 구조 조정은 이미 시작되었다.

외국계 은행인 SC제일은행이 이미 지난해보다 80여 명가량 늘어난 1백90명에 대해 희망퇴직을 실시했고, 국민은행은 매년 시행해오고 있는 준정년퇴직제 신청 대상을 확대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 중이다. 신한은행과 농협중앙회, 외환은행 등 ‘본점 슬림화’ 계획을 세워둔 은행들은 조직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임원급 등의 인력 감축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은행들은 생존 싸움 이후의 이슈가 바로 M&A라고 말한다. 전광우 금융위원장이 지난달 시중은행들을 대상으로 “새로운 짝짓기도 할 수 있다”라는 발언을 하면서 은행권의 빅뱅 가능성은 더욱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은행들에게 강도 높은 자구 노력을 주문한 것이지 현 상황에서 구조 조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지만 시장의 촉각은 바짝 곤두서 있는 상황이다.

은행권에서는 구조 개편 시발점이 외환은행의 매각이 될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인수 후보군으로는 KB금융지주와 하나금융지주, 농협, 산업은행이 거론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HSBC가 다시 계약을 추진할 수 있다는 전망을 하기도 한다. 특히 KB금융지주가 대형 금융지주사들과 대등 합병을 추진하자는 화두를 던져놓았기 때문에 초대형 금융사 탄생에 대한 기대도 버릴 수는 없다.

KB금융지주와 하나금융지주 또는 우리금융지주, 산업은행, 기업은행 등과의 결합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여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금융지주사는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M&A를 통해 위기의 돌파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면 은행 간 합종연횡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국민은행이 외환은행과 하나은행을 인수하는 시나리오나 우리은행과 하나은행, 우리은행과 기업은행, 산업은행과 기업은행의 결합 등 합종연횡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국책 은행의 민영화가 늦추어지면 은행권의 구조 개편 시기도 다소 늦추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부는 산업은행과 우리금융지주, 기업은행 지분을 차례로 매각할 방침을 세워두고 있지만 정치권 등에서 민영화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민영화가 실현될 가능성은 당분간 크지 않으리라는 것이 중론이다.

시중 은행 관계자는 “자본 확충과 기업 구조 조정 이후에는 은행권의 M&A가 핵심 쟁점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은 은행들이 몸집을 줄이며 차별화 경영을 선택하거나, 또는 규모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뭉치거나 어떤 형태로든 은행 산업의 구조 개편이 뒤따라올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은행업계는 생존과 성장을 위해 먹고 먹히는 치열한 정글 입구로 막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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