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팔방 튀는 ‘엔고 폭탄’
  • 반도헌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08.12.09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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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자영업자·전문직등 엔화 대출자들, 원리금 상환에 ‘쩔쩔’

▲ 상당수 병원들이 엔화 대출을 받아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사저널 임영무

세계적인 금융 위기에서 비롯된 엔화 가치 상승으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엔화 가치가 치솟으면서 시중 은행의 알선으로 엔화 대출을 이용했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급격하게 늘어난 원금과 이자에 대한 부담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2%대의 낮은 금리를 내세운 엔화 대출 이용자는 최근 2~3년 동안 크게 늘어났다. 환율 변동과는 별 상관없어 보이던 전형적인 내수형 자영업자들이 엔화 대출을 이용했다가 침체된 경제 상황으로 인한 어려움에 환율 폭탄까지 맞으면서 생존의 기로에 서 있다.

환율만 문제가 아니다. 일선 은행들은 엔화의 통화 가치 상승으로 엔화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엔화 대출 이용자들에게 기존의 금리보다 2~3배 높은 금리를 적용하고 있다. 엔화를 대출받은 사람들은 환율 상승과 늘어난 금리로 인해 대출 당시보다 최고 6배가 넘는 돈을 이자로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다. 거기에 원화 약세로 두 배로 뛰어버린 원금에 대한 부담이 겹친다.

싼 맛에 엔화 대출을 이용하던 중소기업들은 하루하루 힘겨운 싸움을 거듭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수출 및 내수 시장이 죽어 있어 매출이 줄어들고 여기에 대출 이자 변제까지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수출 중소기업의 55.2%가 외화 대출을 사용하고 있고, 15.5%가 일본 엔화 채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들은 경영 애로사항으로 환율 인상과 금리 인상을 첫 손에 꼽았다.

엔화 대출로 절망에 빠져 있는 것은 중소기업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엔화 대출 피해는 의사, 한의사, 약사, 법조인 등 전문직 종사자부터 시작해 헬스클럽, 음식점 등을 운영하는 중소 규모 자영업자들까지 전방위로 퍼져 있다. 이는 엔화 대출이 한때 인기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대출 신청자 중에서도 담보가 튼실하고 신용도가 좋은 대상들이 주로 엔화 대출을 이용했다. 그러다 보니 의사, 한의사, 약사, 회계사 등 전문직 종사자의 엔화 대출 사례가 많았다. 지난 하반기부터 엔화 대출을 받아 개업했던 강남 개업의들이 환율 부담 때문에 폐업할 지경이라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인테리어 비용과 시설 투자비로 엔화 대출을 받았다가 말 그대로 ‘물린’ 것이다. 

경기도에서 치과를 운영하는 김 아무개씨(46)는 2005년에 약 2억 엔가량을 빌렸다. 원래 있던 원화 대출을 엔화로 치환하고 집을 담보로 빌려 병원 설비에 투자했다. 당시 연 2%대였던 이자가 지금은 4.9%로 오르면서 처음에 3백만원에 불과하던 월 이자가 지금은 1천만원이 넘는다. 김씨가 엔화 대출로 갈아타게 된 것은 은행의 권유 때문이었다. 김씨는 “당시 은행 직원이 아무나 대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담보, 재무 구조, 신용이 좋은 경우만 추천하는 것이라고 권유했다. 지금은 날마다 이자 막느라고 정신이 없다”라고 말했다.

대출 경쟁 벌인 은행들에도 일부 책임

2005년에서 2007년까지 은행들은 엔화 대출 유치에 경쟁적으로 나섰다. IT업체를 운영하면서 네이버에 일본 엔화 대출자모임(이하 엔데모) 카페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 아무개씨(50)는 “특히 2007년 전후로 하나·신한·국민·기업·농협 등 주요 은행들이 엔화 대출 상품을 대거 선보였다. 일부 은행은 본점, 지점 등에 이 상품을 할당하기도 했다. 카페에 접수된 피해 사례 중에는 은행 직원이 할당된 상품을 동생한테 권유했다가 낭패를 본 경우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대출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상품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뒷전이었다. 실내 건축업에 종사하는 신 아무개씨(48)는 2006년 4월 약 2천4백만 엔을 빌렸다. 신씨는 한 달에 1백20만원의 이자를 납부하고 있다. 처음에는 26만원에 불과했었다. 신씨는 “금리도 낮았지만 장기로 대출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당시 은행에서 3년 단위로 연장이 가능하며 10년까지 장기로 계속 쓸 수 있다고 말했는데 알고 보니 1년에 한 번씩 연장해야 했다. 3년에 한 번이라는 것은 약정을 재조정하는 것이었다. 올 3월에는 연장이 안 되니 상환하거나 원화로 대환 대출하라고 통보가 날아왔는데 기한을 1년 연장한 한국은행의 조치로 넘길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엔화 대출 이용자들은 덩달아 금리까지 높아지자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엔화 가치가 상승하기는 했지만 엔화 금리가 올라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엔화를 유치하기 위한 비용이 늘었다는 은행의 설명에도 2~3배까지 금리를 올린 것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난 2007년 8월 한국은행이 실수요자들에게만 대출하도록 운전자금용도의 외화 대출에 대한 상환 기한을 제한했다. 엔화 대출 자금이 부동산 등 투기 자본으로 유입되면서 시장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이 시기에 맞춰 은행들은 금리를 인상했다. 당장 원금을 상환할 능력이 없는 대출자들은 은행의 요구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문제들이 드러나자 기존 대출자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한국은행은 지난 3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상환 기한을 연장했고, 지난 12월1일에는 상환 기한 제한을 폐지했다. 단, 신규 대출은 여전히 제한하기로 했다.

일본 자금이 보통 사람들의 호주머니 경제를 뒤흔드는 것은 엔화 대출만이 아니다. 국내에 진출한 일본계 대부업체들이 막대한 수익을 내며 서민의 등골을 휘게 하고 있다. 지난 10월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이 제시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계 대부업체인 러시앤캐시, 산와머니 등 자산 70억원 이상인 14개 대부업체가 2006~07년 동안 총 4천36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이는 이들 업체 평균 자본금의 6.3배에 달한다. 지난 11월28일 열린 ‘2008 소비자 금융 학술학회’에서 홍재범 부경대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이들의 올 상반기 당기순이익은 2천5백65억원으로 최근 2년 동안의 이익보다도 더 불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업에 최저 자본금이나 승인 심사 같은 제도적 진입 장벽이 없고, 소비자 보호를 위한 규제 수준이 낮아 일본계 대부업의 국내 시장 진출과 운영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인터넷 경제 전문가 미네르바는 <신동아> 기고문에서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을 맞이하는 정부의 대응 기조가 현재처럼 이어진다면 내년 3월 이전 파국이 올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미네르바의 예측이 아니더라도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내년 3월 말 결산을 앞둔 일본 등 해외 금융회사들이 투자 자금을 일거에 회수하면서 외환위기가 닥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근거 없는 루머라는 정부의 설명대로 9월 위기설처럼 3월 위기설도 별일 없이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일각의 우려처럼 엔화가 급격히 빠져나가며 3월 위기설이 현실화하면 얼떨결에 엔화를 대출받았던 사람들은 더욱 헤어나기 힘든 수렁으로 빠져들고, 이런 상황을 틈타 일본계 대부업체들은 더욱 활개를 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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