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연차의 ‘자금 관리인’이 여야 의원 3명 ‘후원’했다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8.12.23 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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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자저널>, ‘후원금 기부자 명단’ 단독 확인…정승영 형제, 총선 직전 2천만원 전달

▲ 태광실업의 계열사인 정산개발 정승영 대표. ⓒ뉴시스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은 남다른 마당발로 소문이 나 있다. 특히 정치권 인사들과의 관계가 폭넓은 것으로 전해진다. 또한, 박회장은 특별한 정치적인 성향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야 할 것 없이 두루두루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원인’으로 알려진 박회장은 구 여권 인사들과 상당히 가까운 것으로 전해졌다. 뿐만 아니라 2000년대 초반에 한나라당 재정위원을 지낸 경력이 있어 현 여권 인사들과도 비교적 가까운 편이다.

실제로 지난 2006년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 현역 의원 20여 명에게 수백만 원씩 모두 1억원에 가까운 돈을 후원금으로 낸 사실이 밝혀져 물의를 빚기도 했다. 현재 여의도 정가와 국세청·검찰 안팎에서 나돌고 있는 ‘박연차 리스트’에는 현 여권 인사들의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다. 이 리스트의 신빙성은 그다지 크지 않아 보인다. 과거에도 대형 로비 의혹 사건이 터질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했던 각종 리스트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소문만 요란했지 실제로는 빈껍데기였던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정승영 대표, 태광실업으로 넘어간 휴켐스 첫 대표이사 맡기도

태광실업을 세무조사하면서 ‘리스트’를 입수한 것으로 알려진 국세청이나 현재 박회장을 상대로 직접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검찰이나 모두 ‘박연차 리스트’의 존재에 대해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최재경 대검 수사기획관은 “로비 리스트나 거액의 비자금은 발견된 바 없다”라고 강조했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도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만 했을 뿐이다. 항간에 나도는 리스트에 대해서는 아는 바도 없고, 실제로 갖고 있지도 않다”라고 말했다.

성격이 화통하고 기분파인 박회장은 주로 현금을 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별도로 수첩이나 장부에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은 작아 보인다. 때문에 박회장의 ‘입’을 통해서만 금품 로비 의혹을 밝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역시 여의치 않을 듯하다. 박회장은 평소에도 의리를 강조했기 때문에, 검찰에서 ‘확실한 물증’을 제시하지 않는 한 굳게 닫힌 그의 입이 열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은 12월15일, 지난 2006년 휴켐스 공개 입찰 과정에서 태광실업이 낙찰을 받게 하고자 사전에 정보를 교환하는 등 다른 경쟁사들의 입찰을 방해했다는 혐의로, 태광실업의 계열사인 정산개발 정승영 대표와 오세환 농협중앙회 상무 등을 전격적으로 체포했으나 정대표는 구속영장이 기각되어 석방되었다.

정대표는 박연차 회장의 자금을 관리하는 최측근으로 태광실업이 휴켐스를 인수한 뒤 첫 대표이사를 맡기도 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경남 김해 봉하마을 사저 부지의 원소유자였다. 지난 2006년 노 전 대통령은 이 땅을 정대표에게서 1억5천만원에 매입한 바 있다. 당시 땅의 실소유주는 박회장이며, 노 전 대통령에게 시세보다 싼값에 팔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특히 박회장과 정대표가 없으면 태광실업과 그 계열사들이 굴러가지 못할 정도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만큼 정대표는 박회장과 떨어질 수 없는 ‘오른팔’인 셈이다.

<시사저널>은 그런 정대표와 그의 동생인 정○○씨가 지난 4월 총선 직전에 여야 의원 3명에게 정치 후원금을 제공한 사실을 단독 확인했다. 동생 정씨는 지난 1996년 설립된 토목건축회사 ㈜태진에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이사로 등재된 인물이다. 박연차 회장은 1999년부터 2005년까지 이 회사의 대표이사였으며, 정승영 대표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감사로 있었다. 그러다 2005년 11월 태광실업에 흡수·합병되었다. 즉, 박회장의  회사가 모기업인 태광실업에 흡수된 셈이다.

<시사저널>이 ‘후원금 기부자 명단’을 확인한 결과, 정대표는 지난 3월28일 민주당 김우남 의원(제주시 을)에게 5백만원을, 3월31일에는 한나라당 김정권 의원(경남 김해시 갑)에게 5백만원을 후원금으로 기부했다. 이와 함께 정대표의 동생도 지난 3월28일 한나라당 안홍준 의원(경남 마산시 을)에게 5백만원을, 3월31일에는 김정권 의원에게 5백만원을 기부했다. 결국 박회장의 최측근과 그의 동생이 김정권 의원에게는 1천만원을, 김우남 의원과 안홍준 의원에게는 각각 5백만원씩을 후원금으로 제공한 셈이다.

그렇다면 후원금을 받은 의원들은 박연차 회장의 측근들과 어떤 관계일까. 태광실업에 합병된 태진의 이사로 있던 정대표의 동생 정○○씨는 현재 경남 김해에서 식당업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12월18일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김정권 의원은 김해에 있는 중학교 후배이고, 같은 동네 동생이기도 해서 후원금을 냈을 뿐이다. 안홍준 의원 같은 경우, 지역에서 오래 있다 보니까 알게 되어 후원하게 되었다. 안면이 있고 잘 지내고 있다. 선거 이후에 전화 통화를 몇 번 했었다. 특별하게 도움을 받은 것은 없다”라고 말했다.

박회장의 지시에 따라 정치 후원금 제공한 정황 포착돼

▲ 12월12일 오후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이 영장 실질심사를 마치고 법원을 나오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하지만 정○○씨의 설명은 기자와 전화 통화를 한 안홍준 의원의 말과 사뭇 다르다. 기자가 안의원에게 후원금을 낸 ‘정○○씨를 아느냐’라고 몇 차례 물었으나, 안의원은 “정○○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처음 듣는 이름이다”라고 했다. ‘후원금을 낸 사람’이라고 해도 “기억이 없으며, 후원금을 냈는지도 잘 모르겠다”라고 밝혔다. 정○○씨는 ‘안면도 있고 잘 지낸다’라고 했으나, 안의원은 ‘전혀 모른다’라고 했다. 

정대표 형제에게 1천만원의 후원금을 받은 김정권 의원은 “정승영 대표와 정○○씨는 중학교 선배들이다. 내가 17대에서 재선거에 출마했을 때, 정승영씨는 사무실로 ‘박연차 회장이 (후원금을) 도와주려고 한다’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그래서 내가 (사무실 직원에게) ‘마음만 받겠다고 전해라’라고 했다. 그 이후에도 (후원금을) 계속 거절했으며, (지난 3월에) 후원금이 들어온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내가 김해 붙박이이다 보니 웬만한 사람은 다 안다. 합법적인 후원금까지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김의원의 해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대표는 박회장의 지시에 따라 정치 후원금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우남 의원은 “정승영씨가 누구인지, 박연차씨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다”라고 밝혔다.

당사자들의 해명이 어떠하든 박회장이 자신의 최측근을 통해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제공한 정황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박회장이 정씨 형제 이외의 또 다른 주변 인물들을 통해 또 다른 정치인에게 후원금을 전달했을 가능성도 완전 배제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동안의 검찰 수사는 박회장의 탈세 의혹과 미공개 정보를 이용한 세종증권 주식 매매와 휴켐스 헐값 매입 의혹 등을 규명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이같은 일련의 수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다음 수순으로 ‘리스트 실체’ 규명에 나설 것으로 관측된다. 과연 검찰이 항간에 떠도는 박연차 리스트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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