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 7개월,‘향수병’이 괴롭다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8.12.23 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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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체류 중인 이재오 전 의원,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권력 2인자 무색한 생활 계속

▲ 지난 12월14일 미국 남북전쟁 격전지인 게티스버그 국립공원을 찾은 한나라당 이재오 전 의원.

한나라당 이재오 전 의원은 한동안 국내 지인들과의 직접적인 연락을 끊고 있다. ‘핫라인’과도 같았던 휴대전화는 아예 꺼놓고 있어 불통 상태이다. 총선 패배 후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지 7개월, 그동안 동료 의원들을 통해 간간히 소식을 전하던 그는 이마저 끊은 채 ‘칩거 모드’에 들어갔다. 최측근들도 이 전 의원의 미국 ‘룸메이트’인 존스 홉킨스 대학 주용식 교수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 정도라고 한다.

이 전 의원의 ‘연락 두절’은 공교롭게도 ‘이재오 역할론’이 확산되고 있는 국내 정치 상황과 맞물려 있다. 이명박 정권 2년차를 앞두고 여권 주류에서는 이대통령의 국정 철학을 제대로 구현하기 위해 추진력 있는 여당 실세 인사들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다. 이른바 ‘주류 주체론’이다. 정권 교체의 주역들이 나서 정권 위기를 극복하는 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선 승리의 일등 공신인 이 전 의원의 이름이 당연히 오르내린다. 어떤 역할을 맡을지에 관심이 모인다. 정치권에서는 크게 두 가지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나는 입각설이다. 내년 2월 정권 출범 1주년 즈음 단행될 것으로 예상되는 개각에 참여할 수 있다. 지식경제부나 통일부 수장 자리가 거론된다. 이대통령을 곁에서 보좌하며 당과 소통하는 정무장관으로 가리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내각 입각에는 부정적…재·보선 출마는 유보적

또 하나는 재·보선을 통한 국회 재입성이다. 이 전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은평 을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가 선거법 위반 첫 공판에서 당선 무효형을 선고받아 재·보선 가능성이 열렸다. 이 전 의원이 국회의원으로 복귀할 경우 친이계의 좌장으로서 당의 구심점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지도부의 리더십 부재와 친박근혜계의 영향력 확대로 요약되는 당내 상황은 ‘이재오 역할론’이 사그라지지 않는 배경이다.

자신의 정계 복귀가 논의되고 있는 상황을 태평양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 전 의원은 어떤 구상을 하고 있을까. 그동안 이 전 의원은 자신의 거취에 대해 이렇다 할 구체적인 언급을 삼갔다. ‘전화 정치’ ‘리모컨 정치’ 등 자신의 말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면서 이대통령이나 당 지도부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이 전 의원을 만나고 온 측근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일단 입각설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인 것으로 보인다. 정계 복귀 구상에 대해 가타부타 말은 없었지만 2월에 있을 개각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내년 1, 2월에 귀국할 가능성은 작다는 지적이다. 한 측근은 “그때 들어오면 또 개각 하마평에 오르내리며 논쟁의 한가운데 서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 콜럼비아 대학에서 강연 중인 이재오 전 의원(왼쪽).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는 모습(오른쪽).

일부 의원들 “정계 복귀가 당내 분란 일으킨다”

재·보선에 대한 입장은 유보적인 것으로 파악된다. 아직 법원 판결이 남아 있는 사안인 데다가 재판 일정상 4월에 재·보선을 치르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전 의원이 입각보다는 국회 입성에 더 관심이 높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지역구 선거에 나가서 다시 평가를 받고 싶지 않겠느냐”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재오 역할론’이 정작 이 전 의원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치적 역할에는 세력 간 긴장 관계가 뒤따른다. 이 전 의원의 정계 복귀를 껄끄러워하는 반대 세력이 적지 않은 이유이다. 친박계에서는 아직도 대선과 총선을 치르며 쌓인 앙금이 사라지지 않았고, 친이계 일각에도 불편해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 권력 구조상 경쟁 관계에 있는 정치 세력은 이 전 의원의 귀국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 이들은 이 전 의원의 정계 복귀가 당내 분란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논쟁이 이 전 의원의 귀국 시기를 강제하고 있다는 것이 측근들의 불만이다. 언제 귀국하느냐가 곧 어떤 역할을 맡느냐로 해석되다 보니 자의 반 타의 반 시작한 유배와도 같은 미국 생활을 이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 전 의원은 ‘향수병’으로 고생이 심하다고 한다. 가족과 떨어져 외국 생활을 한 지 반 년이 훌쩍 지나면서 ‘마음의 병’이 생긴 것 같다는 설명이다.

이 전 의원은 존스 홉킨스 대학 인근에 있는 주교수의 숙소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남자 둘이 자취 생활을 하다 보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사람들과 왕래도 거의 없어 강의 이외에는 자전거를 타면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유럽이나 아프리카 여행을 계획했지만 비용 문제로 취소했다고 한다.
얼마 전 미국을 방문했다 돌아온 친이계의 한 인사는 “자신은 잘 지낸다며 내색을 안 하지만 생활하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정도로 말이 아니다. ‘권력의 2인자’ ‘실세 정치인’이라고들 하는데 하루에 한 번씩 속옷을 직접 빨면서 지내고 있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이 전 의원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면 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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