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역사 떠안은 ‘슬픈 3대’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08.12.2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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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영 가족사에 한국 현대사 고통 고스란히…“레드 콤플렉스, 안 당해본 사람은 모를 것”

▲ 문근영씨(위)는 동생이 유학하고 있는 호주에서 휴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사저널 임영무

지난 11월 우리는 우울한 경험을 했다. 이념 논쟁이 연예계까지 덮은 것이다. 숨겨진 ‘억대의 기부 천사’로 알려진 문근영씨의 슬픈 가족사가 다시 화제에 오르내리자, 한 우파 논객에 의해 ‘빨치산 선전용’이라는 엉뚱한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쟁이 불거졌다. 의혹은 ‘가정’과 ‘추정’이 덧붙여지면서 진실인 양 확산되기 시작했다. 마치 문근영씨측이 불우한 가족사를 대중의 인기에 이용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왜곡되고, 사회에 성금을 기부하는 행위가 좌파와 무슨 관계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비화되었다.

특히 이런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논쟁을 지켜보아야 하는 기자의 마음은 더없이 무거웠다. 어찌 보면 이런 논란을 최초로 유발시킨 원인 제공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지난 2004년 12월 당시 몸담고 있던 <일요신문>에 ‘문씨의 슬픈 가족사’를 최초 보도한 바 있다. 문근영씨의 외조부가 장기수 고 류낙진씨(당시는 생존)였다는 사실을 처음 확인했고, 취재 과정에서 문근영씨의 작은 외할아버지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항쟁 당시 진압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사실도 밝혔다. 

기자가 감추고 지냈던 가족사 최초로 공개했던 내막

문근영씨의 외조부에 관한 소문을 처음 접한 것은 2004년 가을 무렵이었다. 문근영씨의 고향인 광주 현지와 정치권 주변에서 “조부가 오랜 투옥 생활을 하는 등 불우한 가정 환경 속에서도 문근영이 밝고 꿋꿋하게 잘 자라 오늘날 ‘국민 여동생’으로 성장한 것이 참 대견스럽다”라는 말이 들려왔다. 확인 결과, 문근영씨의 외조부는 류낙진씨로 밝혀졌다. 그는 한국전쟁 직후 지리산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구속되었다. 류씨는 석방된 뒤 전남 보성의 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71년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88년 6공 정권 때 20년형으로 감형된 뒤 1990년 전향서를 제출하고 19년 만에 가석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김영삼 정부에서 1994년 또다시 구국전위 사건으로 인해 안기부에 의해 재검거되었다. 당시 구국전위 사건은 총책 안재구씨와 호남책 류낙진씨 등이 조선노동당의 남조선 지하당으로 ‘구국전위’를 구성하고, 남한 내의 동향을 북한에 정기적으로 보고했다는 혐의였으나, 사건 조작 논란도 불러일으킨 바 있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지난 1999년 광복절 특사로 가석방되었다.

당시 류씨는 생전에 있었지만 고령이어서 직접 만나기는 어려웠다. 기자는 광주에 내려가서 문근영씨의 부모를 만났다. 그들은 당시 ‘국민 여동생’이라는 호칭으로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는 스타의 부모라고 하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만큼 평범한 소시민이었다. 문근영씨의 부친은 동물원에서 관리인으로, 모친은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는 말단 공무원이었다. 부친은 기자의 방문 목적을 전해듣고는 다소 당황해하면서도 이내 차분하게 “그것은 내가 이야기할 성질의 것이 아니니 우리 집사람을 한 번 만나보라”라고 일러주었다.
문근영씨의 모친이 근무하는 도서관의 한 사무실에서 문씨의 모친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기자의 방문 목적을 전해들은 모친은 “결국 언젠가는 밝혀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솔직히 걱정이 앞선다. 아직 우리 사회는 ‘레드 콤플렉스’가 엄연히 존재한다. 아무리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가족으로서 그런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 기자도 그런 고통을 모를 것이다. 어린 근영이가 상처를 받을 것이다. 제발 기사화하지 말아달라”라고 눈물까지 보이며 부탁했다.

문근영씨측, 쇄도하는 언론사 인터뷰 요청 일절 사절

▲ 2005년 한 우익 단체에 의해 류낙진씨의 묘가 파괴되었다. ⓒ뉴스뱅크

모친으로부터 전해들은 불우했던 가족사는 비단 외조부의 일뿐만이 아니었다. 특히 문근영씨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외조모 신애덕씨의 삶은 한 편의 대하 드라마 여주인공의 삶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우리 현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신씨가 19세 되던 해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녀는 인민군에 입대해 지리산에 입산했다. 거기서 남편 류씨를 만났다. 그녀는 1953년 총상을 당한 채 붙잡혔다가 석방되었고, 이후 류씨와 결혼했다. 보성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류씨가 1971년 간첩죄로 투옥되면서 신씨 가족들은 ‘빨갱이’ 집안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남편도 없이 그녀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어린 시동생 2명과 4명의 자녀를 홀로 키웠다. 그러던 중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다. 당시 조선대 약학과에 다니던 신씨의 큰딸(문근영씨의 큰 이모)이 사복 형사에 의해 체포되어 어디론가 끌려갔다. 걱정하는 신씨를 대신해 작은 시동생(문근영씨의 작은 외할아버지)이 조카를 찾으러 밖으로 나섰다. 당시 그는 전남대 공대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하지만 조카를 찾으러 나간 작은 시동생도 연락이 끊겼고, 집을 나간 지 보름여 만에 광주시청에서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진압군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문근영씨 외가의 이와 같은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전해들으면서 기자도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망설이는 모친을 향해 기자는 “숨길 일도 아닐 뿐더러 괜히 숨기는 것 자체가 오히려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밝혀질 일이다. 자칫 이것을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보려 하는 이들에 의해 마치 폭로 성격으로 처음 알려질 경우 오히려 더 나쁜 영향이 초래될 수도 있다. 이번 기회에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열심히 설득했다. 

결국 기자의 설득대로 취재했던 내용은 <일요신문> 12월19일자에 보도되었다. 당시 이 보도는 여러 다른 언론사에 인용 보도되는 등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다행히 문근영씨 가족측이 우려했던 색깔 논란 시비는 없었다. 오히려 ‘밝은 문근영씨의 모습 뒤에 그런 아픔이 있었다니 안타깝다. 힘내라’는 등의 격려 섞인 반응이 많았다. 

이후 성인 배우로 성장한 문근영씨의 선행은 계속 이어졌다. 2005년 4월 외조부 류씨가 타계했을 때에도 주변 관계자로부터 “보도가 나가고 이미 알려진 이후여서 근영양도 큰 부담 없이 외조부의 영전을 지킬 수 있었다. 다행이다”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정리되는 듯했으나, 지난 11월의 때아닌 이념 논란은 기자에게 또 다른 숙제를 남겼다. 문근영씨와 그 가족들은 4년 전 기자의 판단이 틀렸다고 원망하는 것은 아닐까. 확인하고 싶었다.

<시사저널>은 문근영씨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면서, 그에게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의 소속사인 나무액터스의 김탄 부사장은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 심지어 몇몇 일간지들은 ‘신년 특집 인터뷰로 전면을 할애해놓고 기다리겠다’고도 한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설령 노벨상을 준다고 해도 인터뷰는 안 한다는 것이 문근영씨측의 방침이다”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인터뷰 자체가 또 다른 이슈를 만들어내고,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아쉬움 속에 숙제는 잠시 미뤄두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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