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이 키워낸 ‘골방’ 경제 전문가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9.01.20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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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속된 ‘미네르바’는 어떤 인물인가 / 외환위기 때 피해 입으면서 <경제학원론> 등으로 독학

▲ 지난 1월10일 ‘미네르바’ 박대성씨가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에 대한 영장 실질심사를 받은 후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지난 1월1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위치한 ㅅ빌라. 지은 지 20년 정도 된 허름한 이 빌라 2층(20여 평)에는 지난 1월7일 전기통신기본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긴급 체포된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박대성씨(31)가 살고 있었다. 집주인이 구속되는 바람에 우편함에는 각종 우편물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그리고 박씨의 집 현관문에는 검찰청에서 발송한 ‘우편물 도착 안내문’이 붙어 있다. 이웃 주민들에 따르면, 박씨는 아버지(65), 어머니, 여동생(24) 등과 함께 살았는데 5년 전쯤 그의 부모는  경기도 부천시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이후부터 여동생과 단둘이 살다가 지난 12월 말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여동생은 선교 활동을 위해 인도로 출국한 상태이다. 그의 아버지는 현재 숙박업을 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일용직으로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 아들이 체포된 다음부터 아버지 박씨는 과음을 했고, 간기능에 이상이 생겨 현재 병원 치료를 받고 있다.

이웃 주민들은 박씨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미네르바’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한 주민은 “그 청년은 조용한 성격이었다. 가끔 얼굴을 마주치면 인사도 잘했다. 솔직히 미네르바가 누구인지 몰랐는데, 기자들이 이것저것 물어보면서 그가 미네르바인 줄 알고 놀랐다”라고 말했다.

미네르바. 그의 인터넷 행적과 구속을 놓고 법조계뿐만 아니라 온 사회가 떠들썩하다. 그의 구속에 대한 찬반 양론은 정치권으로까지 확대되어 여야 간 공방이 뜨겁게 일고 있다. 미네르바는 온라인에서부터 오프라인까지 새해 벽두의 가장 큰 화두가 되었다.

그렇다면 ‘미네르바’ 박대성씨는 누구일까. 그의 아버지와 친구 그리고 변호인 등의 증언을 통해 그의 실체를 들여다보았다.

박씨는 1978년 8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올해로 31세이다. 밀양박씨 규정공파 3대 독자여서, 8년 전쯤 작고한 그의 친할머니가 애지중지 키웠다고 한다. 박씨의 아버지는 전화 통화에서 “할머니는 그 애밖에 몰랐다. 경기도 원당에 산소가 있는데, 그 애가 자주 찾아뵙지를 않아 이런 일이 생겼나 보다”라고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경기도 일산에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서울로 전학한 박씨는 서울의 한 공업고등학교 건축과를 졸업한 후 지난 1997년 경기도 소재 한 전문대학 정보통신과에 입학했다. 육군에서 군 복무를 마친 후 2002년 2월 졸업했다. 그를 체포했던 검찰이 그의 학력을 처음 발표하자, 일각에서 고질적인 ‘학벌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공고 나오고, 전문대 졸업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경제적인 식견을 갖게 되었느냐’라며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진짜 미네르바가 맞느냐’라며 진위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박씨는 지난 1월13일 변호인단을 접견하면서 “무슨 학벌이 온라인에서 의견을 나타내는 데 제약이 되나. 온라인 블로거 중에는 현직 프로보다 식견이 높은 이들이 많다. 앞으로 온라인에서 의견 표시를 하려면 최종 학력과 직업을 쓰고 글을 게재하도록 관련법을 개정해야 하는 것이 어떠한가”라며 일각의 학벌주의에 일침을 가했다.

“온라인에서 무슨 학벌이 필요한가”

▲ 미네르바의 변호인단은 지난 1월13일 서울중앙지법에 구속적부심사 청구서를 제출했으나, 15일 법원으로부터 기각당했다. ⓒ시사저널 임영무

박씨는 대학 시절 주로 무선이동통신 부문과 전자회로 등 전공 과목과 국어, 영어, 수학 등 교양과목을 이수했다. 그나마 경제 관련 과목으로는 2학년 2학기 때 수강했던 ‘지구촌 경제와 직업 세계’ 정도가 고작이다. 학창 시절에는 경제 이론과 거리가 멀었던 셈이다. 고교 시절부터 성적은 대체로 중·상위권을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한 지인과 함께 5년 정도 사무실 인테리어 일을 했으며, 지난 2007년부터 경제학 서적을 탐독하면서 경제적 식견을 넓혀갔다. 지난해 3월부터는 무직 상태에서 집에 머무르며 경제 관련 서적과 인터넷에 푹 빠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렇다면 그는 왜 그토록 경제 분야에 천착했던 것일까. 그의 변호인인 박찬종 변호사는 “박씨는 1997년 IMF 사태 때 개인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또, 주변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의 친구 부모가 자살해서 친구와 친구 동생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씨는 자신과 자신의 가정은 자신이 지킨다는 결심을 했고, ‘선제 방어적 차원’에서 경제를 공부하게 되었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방어’ 차원에서 경제학을 공부했을 뿐, 투자나 재테크 등 ‘공격’을 위한 독학은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사실 박씨 가족들에게 1997년의 외환위기는 큰 시련이었다. 박씨의 아버지는 “당시 일산에 살고 있었는데, 상가를 지으려고 조합을 만들었다가 갑자기 IMF 사태가 터져 쫄딱 망했다. 은행 대출을 갚지 못하자 집이 경매로 넘어갈 뻔했다. 그래서 내 명의로 되어 있던 지금의 창천동 빌라를 그 애(박씨) 앞으로 이전시켰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경제 자료와 서적으로 경제학을 독학했던 것일까. 그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가 저술한 <경제학원론>을 토대로 경제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경제학원론>은 2001년에 초판이 나왔고, 지난 2003년에 재판이 발행되었다. 박씨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의 기초를 닦았고, 이후에 실물 경제에 대해서는 다른 경제 서적과 잡지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와 블로그를 통해 습득했다고 밝혔다.

박씨의 주머니 사정은 극도로 궁핍하지는 않았지만, 그리 넉넉한 편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씨는 자신 명의로 된 빌라가 있기 때문에 집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집은 앞서 언급한 대로 그의 아버지가 증여해준 것이다. 생활비는 주로 유치원 보조 교사 일을 했던 여동생이 댔으며, 가끔씩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받아썼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난해 말부터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취재 과정에서 박씨는 지난해 11월과 12월 두 달치 전기 요금(7만3천여 원)을 납부하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개인 채무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찬종 변호사는 “지난해 12월에는 자신 소유의 빌라를 담보로 은행에서 1천만원을 대출받아, 개인 빚을 갚는 데 썼던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주로 집에 머물렀기 때문에 생활비가 그리 많이 들어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직장이 없었기 때문에 개인 빚이 조금씩 쌓여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돈벌이를 위해 자신의 경제 식견을 주식 투자 등에 활용하지도 않았다. 검찰은 그의 계좌 추적을 벌였으나, 주식이나 외환 관련 예금, 선물 등에 투자했던 흔적은 발견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 역시 검찰 조사 과정에서 “나는 주식 등에 단 10원도 투자한 적이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자신이 ‘미네르바’라는 사실을 외부에 일절 발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가족뿐 아니라 그의 친구들 역시 그가 ‘미네르바’일 것이라고는 낌새조차 차리지 못했다.

박씨는 어린 시절부터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아버지는 “그 애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런 말썽을 부리지 않은 착한 아이였다. 어렸을 때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고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했다. 한 번은 학교 선생님이 ‘가정통신문’에 ‘대성이가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않아서 걱정된다’라고 적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 애는 조용한 것을 좋아한다”라고 말했다. 

대학 동창들은 박씨가 내성적이기는 했어도 일부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처럼, 폐쇄적이거나 대인기피증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대학 시절, 동아리나 학과 내의 학술 모임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이른바 ‘삼총사’로 불리던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고 한다. 대학 시절 박씨와 어울렸던 ‘삼총사’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의 친구는 “예전에 대성이를 만났을 때 경제 문제에 대해 전문 용어를 써가면서 얘기하기에 놀란 적은 있어도, 그 친구가 미네르바일 줄은 전혀 몰랐다”라고 밝혔다. 그의 대학 선배는 “지난해 송년 모임에 나온다고 했으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신년에 보자고 했는데, 이번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그 친구는 정말이지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순한 아이이다. 학교 다닐 때도 선배들의 말에 ‘네, 네’ 하면서 순응하며 깍듯하게 대했다”라고 말했다.

내성적이지만 대인기피증은 없어

지난해 7월부터 본격적으로 인터넷에 글을 올리면서도 친구들과 활발하게 전화 통화하며 지냈다고 한다. 다만, 그의 글이 여론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면서 5~6개월 동안은 친구들을 거의 만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박씨를 여러 차례 접견한 박찬종 변호사는 “지적 탐구심과 호기심이 많으며, 주관이 뚜렷해 보이는 친구이다”라고 요약했다. 박씨의 변호인단은 지난 1월13일 법원에 제출한 구속적부심사 청구서에서 ‘피의자(박씨)는 주소지에서 자기가 게재한 글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각오로 한 개의 IP만을 사용하면서 당당한 자세로 글을 써왔다. 피의자는 주관이 뚜렷하고,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므로 이번 일로 검찰의 수사를 면피하기 위해 도주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박씨는 수사 기관의 IP 추적을 피하기 위해 PC방을 돌아다니면서 글을 올렸을 법도 한데, 이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다. 지난해 11월 김경한 법무부장관이 사법 처리 가능성을 언급했음에도, 그는 자신의 집에서 지난해 12월29일 ‘정부가 금융 기관과 수출업자에게 달러 매수를 자제할 것을 요구하는 긴급 공문을 발송했다’라고 제법 ‘당당하게’ 글을 올렸다. 그런 면에서 그다지 소심한 성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법원은 지난 1월15일 구속적부심을 기각했다. ‘공익을 해칠 목적이 상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박씨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터넷 사이트인 ‘민주주의 2.0’에 가입한 바 있다. 이를 놓고 노 전 대통령의 팬클럽인 ‘노사모’가 박씨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하지만 박씨는 이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다. 민주주의 2.0에 가입한 사실은 있으나, 가입 당시에는 토론 사이트가 유행할 때였다고 해명했다. 특히 그가 이명박 정부의 경제 정책을 강하게 비판한 것을 놓고, 배후에 정치 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나왔다. 이에 대해서도 그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반정부주의자가 아니다. 반MB 단체에 가입한 적도 없다. 내 개인 시각을 온라인으로 알린 블로거일 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순수한’ 개인 블로거일 뿐이지 배후에 누가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누구나 수사 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게 되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심하면 패닉 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미네르바 역시 인터넷에서는 강한 주장을 설파했지만, 검찰에 체포되고 구속되자 심한 충격과 함께 의기소침해 있다는 것이 그를 접견한 변호인들의 공통된 전언이다. 박씨는 “솔직히 두렵고 막막한 심정이다. 포승줄과 수갑을 차고 이렇게 면담해야 하는 사실이 무섭다. 단순히 온라인에 글을 게재한 것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비화되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다. 온라인에 글을 쓰면 온라인에서만 통용될 것이라고 생각한 내가 잘못이다. 나는 정치인도 아니고 연쇄 살인범도 아니다. 정치적인 사건으로 만들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심경을 밝히기도 했다.

박씨는 향후 앞날에 대해서도 불안해하고 있다. “앞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는 불안한 심정을 변호인단에 내비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잘못했으면 벌금으로 끝내지 꼭 구속까지 시켰어야 했나. 젊은 사람의 꽃봉오리를 꺾은 것이 아닌가”라며 검찰 구속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면서도 “풀려난다 해도 전과자가 되는 것인데 누가 알아주겠나. 막일도 할 수 없게 되었다”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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