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도 구조조정 중
  • 로스앤젤레스·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9.02.10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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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직원 감축 등으로 미국 떠나는 한인도…오바마의 경기 부양책에는 ‘반신반의’

▲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경기 부양책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EPA

미국 할리우드 애니메이션계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한인 리키 장씨(47)는 이달 초부터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재택 근무를 시작했다. 말이 재택 근무이지 사실은 지난 10년간 다니던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있다. 회사측이 애니메이션 게임 스튜디오 13개 가운데 5개를 폐쇄하기로 결정하고 5개 스튜디오에 업무 배당을 중단하면서 해당 직원들이 모두 출근할 필요가 없게 된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본격화한 경기 침체와 기업들의 대규모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장씨는 서울 명문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로스앤젤레스 소재 캘리포니아주립대학(UCLA) 대학원에서 영화를 전공한 뒤 한때 세계적 애니메이션 회사인 픽 사에서 근무했다. 그는 10년 전 할리우드의 중간 규모 디지털 게임 제작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지금까지 12만 달러가 넘는 연봉을 받아가며 팀장으로 일했다.

장씨는 회사가 대규모 직원 감축을 예고하자 뉴욕과 워싱턴 등 동부를 비롯해 미국 내 애니메이션 회사 10여 곳에 재취업 지원서를 냈지만 모두 실패했다. 애니메이션업계에 대규모 직원 감축이 이어지는 마당에 높은 연봉의 새로운 일자리가 나올 리 없었던 것이다.

1년간 2백60만명 실직…산업 전반에 타격

그는 현재 한국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자신의 할리우드 경력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한국도 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것은 알고 있지만 자신의 내공이 한국에서는 먹혀들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장씨 회사의 구조조정은 다른 회사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소규모에 속한다. 대공황 이후 80년 만에 닥친 경제 위기를 맞은 미국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섬뜩할 정도이다. 대표적인 회사는 자동차 제조회사 제너럴 모터스(GM)이다. 지난해 11월 이미 판매량이 줄어들면서 9개 공장을 폐쇄하고 3만명을 해고했다. 실직과 소득 감소로 소비자들의 새 자동차 구입이 줄어들면서 자동차 회사들이 당장 타격을 받았다.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서키트시티와 주방기기를 판매하는 린넨 앤드 싱스, 저가 의류 판매를 다루는 머시즈같이 짱짱하던 대형 회사들이 줄이어 문을 닫는 것은 물론 어린이 장남감 제조 및 판매에서 세계 최대를 자랑하는 마텔 사도 매출이 46%가 줄어들어 고사 직전에 몰려 있다.

최근 중장비 건설회사 케이터필러가 2만명을, 세계 최대 알루미늄 채광 및 제조회사 알코아 사가 1만5천명을, 항공기 제작사 보잉이 1만명을, 제약회사 파이저가 8천5백명을, 이동전화 서비스 회사 스프린트 넥스텔이 8천명을, 건설 및 주택 관련 제품 판매업 체인 홈디포가 7천명을, 백화점 체인 메이시가 7천명을, 텍사스 인스트루먼트 3천4백명을 각각 해고하면서 대형 사업장에서 실직자가 한꺼번에 10만명이 쏟아져나왔다. 지난 한두 달 사이에만 부양 가족을 포함해 30만명의 도시 인구가 추가로 무소득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미국에서 지난 1년간 일자리를 잃은 사람 숫자는 무려 2백60만명에 이른다. 지난 한 해 동안 부양 가족(한 가구 4명)까지 따지면 서울시 전체 인구에 버금가는 1천만명의 수입원이 끊긴 것이다. 몇 달 사이에 서울시민 전체가 소득이 없어 주택을 잃거나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고 가정한다면 그 참상이 어떠할지 짐작할 만하다.

이번 미국 경제 위기의 발원지인 뉴욕 월스트리트의 금융회사들은 리먼 브러더스와 같이 아예 파산을 당하는 비극을 맞거나 줄줄이 합병이나 매각으로 연명하고 있다. 모건 스탠리 라스베이거스 지사의 카스트로 부사장은 요즘 자신을 믿고 주식에 투자한 10년 고객들을 만나면 그저 고개를 숙이고 미안해 할 뿐이다. 자신의 전적인 잘못은 아니지만 몇십만 달러씩 투자한 고객들의 자산이 절반으로 줄어든 데에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미국 내 첫 여성 금융컨설턴트로 자부했던 카스트로 부사장에게서 씩씩하고 당당했던 종전의 자세는 사라진 지 오래다.

▲ 미국 뉴욕의 거리에서 한 실직자가 일자리를 구하는 내용의 호소문이 적힌 포스터를 목에 걸고 있다. ⓒAP연합

2년 내 회복 기대… 위기를 호기로 삼는 사람도 없지 않아

로스앤젤레스 인근 산타 클라리타의 혼다 자동차 딜러는 판매 직원이 아예 절반 이하로 줄었다. 찾아오는 고객이 감소하면서 괜히 출근용 자동차 가스와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애프터서비스를 비롯한 정비 부서는 접수 창구가 5개 있으나 일하는 직원은 2명뿐이다. 한때 장시간 순서를 기다려야 했던 이곳도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산하다. 정비실 직원 역시 3분의 1밖에 출근하지 않는다. 혼다측은 새해 들어 정비 수수료를 20% 이상 인상했다. 줄어든 매출을, 한꺼번에 더 많은 수수료를 청구해 메우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정비 수수료가 오르면서 고객의 발걸음은 더욱 뜸해졌다. 인근 히스패닉 계가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에 가면 절반 가격으로 급한 정비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번 경제 위기를 호기로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 않다. 이상 호황으로 소비가 낭비나 다름 없었던 미국 경제가 거품이 빠지면서 제모습을 찾고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케빈 유씨(63)는 최근 로스앤젤레스 변두리의 오래된 집을 시세보다 싸게 구입했다. 한때 40만 달러를 호가하던 이 집은 은행에 차압된 뒤 12만 달러에 매물로 나왔다. 유씨는 이를 구입해 다시 10만 달러를 들여 리모델링을 하고 월세로 시장에 내놓았다. 늦어도 2년 후에는 집값이 적어도 30만 달러 이상 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케빈 유씨의 이런 계산은 버락 오바마 정부의 경기 부양책을 감안한 것이다.

오바마의 경기부양 법안은 당장 8천2백90억 달러의 재정 지출을 요구하고 있다. 하원을 통과해서 상원에서 논란을 벌이고 있는 이 법안은 전체 재원의 78%에 달하는 6천9백40억 달러를 오는 2010년까지 지출하도록 되어 있다.

미국민들은 지금 오바마와 미국 상원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백악관과 의회가 어떤 타협점을 찾아 궁지에 몰려 있는 경제의 숨통을 튀어줄지 지켜보고 있다. 이달 중순을 경기부양법안 통과의 분수령으로 삼고 있는 오바마의 역량에 많은 국민의 기대가 실려 있다.

미국 경제의 앞날은 아직 예단하기에 이르다. 오바마를 믿지 않고 한국으로 눈길을 돌린 리키 장씨나 오바마를 잔뜩 믿고 있는 케빈 유씨 중 누가 옳은 선택을 했는지는 더 두고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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