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남을 ‘일편단심’ 3인방
  • 한준희 (KBS 축구 해설위원) ()
  • 승인 2009.03.03 0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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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클럽 ‘충성과 헌신’ 바친 유럽 축구 거목들

▲ 한 차례도 이적을 하지 않은 스타 선수들. 맨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레알 마드리드의 라울 곤살레스, 맨유의 라이언 긱스, AC밀란의 파올로 말디니. ⓒAP연합

선수 경력 전체를 통틀어 단 한 차례도 이적을 하지 않고 오직 한 클럽에서만 활약한 사나이들을 우리는 통상 그 클럽의 ‘전설’이라 일컫는다. 천문학적인 금전이 횡행하는 요즈음 축구판의 풍토에서, 수시로 찾아오는 모든 유혹의 손길을 뿌리친 이러한 전설들에게는 실로 존중과 찬사가 아깝지 않다.

물론 이적을 자주 했던 선수라고 해서 그들에게 비난을 퍼부을 이유는 없다. 프로 선수에게 이적은 그 자체로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필수적인 경우들마저 존재하기 때문이다.

곤살레스, 3백11골로 최다골 기록 행진

그래서 한 차례도 이적을 하지 않은 선수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행운아’들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이적을 하지 않아도 좋을 조건들을 계속해서 누려왔다는 평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러한 선수들의 뼈를 깎는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좋은 클럽에서 계속 좋은 대우를 받으며 활약하는 것이 노력 없이 가능한가? 좋은 클럽일수록 우수한 선수들 간의 경쟁이 끊임없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경기력 면에서 높은 기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선수는 그만큼 쉽게 도태되는 법이다. 뿐만 아니라 좋은 조건을 누리고 있는 선수라 하더라도 ‘더 좋은 조건’을 찾아 나서지 말라는 법이 없다. 바로 이러한 측면들이야말로 한 클럽에 청춘을 바친 ‘충성과 헌신의 사나이’들에게 존중과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이다.

이렇듯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한 충성과 헌신에 그치지 않고, 축구사에 아로새겨질 위대한 기록까지 써가고 있는 우리 시대의 거목 3인방이 있다. 다름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라울 곤살레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라이언 긱스 그리고 AC밀란의 파올로 말디니가 그 주인공들이다.

2009년 2월15일, 스포르팅 히혼과의 경기에서 라울이 저 위대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레알 마드리드 통산 최다골 기록을 깨뜨렸던 순간은 레알을 넘어 전세계를 들썩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디 스테파노라는 인물이 펠레, 마라도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전설 중의 전설이었을 뿐 아니라, 디 스테파노의 3백7골이라는 기록 자체가 예전에 비해 골이 적게 나는 지금의 축구를 감안할 때 여간해서는 접근 불가능한 수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1994~95 시즌부터 레알에서만 15시즌을 활약해온 라울은 단 한 시즌을 제외하고 매 시즌 두자릿수 득점(모든 대회를 통틀어)을 올린 끝에 이 기록을 넘어설 수 있었다. 지금 현재 라울은 자신의 골 기록을 3백11골까지 늘려놓은 상태이다.

라울의 기록 행진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이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로 국한한 골 수에서도 2백18골로 레알 마드리드 기록 보유자(종전 기록은 역시 디 스테파노의 2백16골)가 되었다. 이 2백18골은 프리메라리가 역대 최다골 순위 6위에 해당하는 기록으로서 텔모 사라(2백51골), 우고 산체스(2백34골), 디 스테파노(2백27골; 디 스테파노는 레알 이외에 에스파뇰에서 기록한 11골이 더 있다), 세자르(2백26골), 키니(2백19골)만이 라울보다 높은 곳에 존재한다. 올 시즌이 끝나기 전 라울은 5위 이내로 진입할 것이 확실시된다.

물론 라울은 이미 UEFA 챔피언스리그 역대 최다골(64골) 및 최다 출전(1백22회) 부문에서도 과거와 현재의 모든 스타들을 제치고 1위를 달리고 있다. 다음 시즌이면 마누엘 산치스의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다 출전 기록(7백12경기)도 경신할 수 있을 전망. 결국, 라울은 유럽 클럽 축구에서 불멸의 기록들을 가장 많이 수립하는 사나이가 될 것이 확실하다.

어쩌면 라울은 우리 시대를 수놓았던 다른 스타 공격수들에 비해 얼마간은 특징이 없어 보이거나 덜 두드러져 보이는 선수일 수도 있다. 실제로 라울은 파괴적인 개인기, 불같은 스피드, 대포알 슈팅, 공포의 헤딩력 그 어느 것 하나 최고 수준이 아니며, 그가 능기로 삼는 절묘한 왼발 칩샷과 같은 무기 또한 그 부문의 ‘역대 최고’라고 평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또한 ‘올해의 선수’와 같은 한 해를 결산하는 시상식장에서 정상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고, 국가대표 선수로서도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선수 경력 전체를 고려할 때 라울만큼 꾸준하고 성실했던 선수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그 꾸준함과 성실함이야말로 범접하기 어려운 기록들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긱스, 매 시즌 골…말디니, ‘최다 출장’ 갱신

라울보다 더 오랜 기간 한 클럽에서 최고의 수준을 유지해온 이 시대의 공격 재능으로는 긱스가 있다. 최근 BBC의 축구 칼럼니스트 알란 핸슨이 자신의 칼럼을 통해 긱스가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 올해의 선수에 선정될 자격이 충분함을 주장했을 정도로 긱스가 펼쳐보이고 있는 근년의 활약상은 그의 높은 연령을 무색케 할 만큼 인상적이다.

물론 지금의 긱스에게는 ‘가장 좋았던 시절’ 주무기로 삼던 공포의 쾌속 드리블이 존재하지 않는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 또한 이미 그를 전문 날개 자원으로 분류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순간순간 번뜩이는 긱스의 볼 다루는 솜씨와 정교한 패스, 얄미우리만치 영리한 플레이들은 여전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실로 귀중한 자산이다. 요즈음 그의 플레이에 가장 잘 어울리는 하나의 문장은 틀림없이 “클래스는 영원하다(Class is permanent)”일 것이다.

긱스 또한 빛나는 기록의 사나이이다. 2월8일 웨스트 햄 전에서 결승골을 터뜨림으로써, 긱스는 프리미어리그 출범(1992~93 시즌) 이래 단 한 시즌도 거르지 않고 매 시즌 골을 터뜨린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무려 17시즌 동안이고, 사실상 그가 데뷔했던 때가 1990~91 시즌임을 감안하면 긱스는 잉글랜드 1부 리그에서 19시즌 연속으로 득점에 성공한 선수이다. 그의 놀라운 기록은 유럽 무대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긱스는 11시즌 연속으로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 득점에 성공한 유일무이한 선수인 동시에, 13시즌에 걸쳐 챔피언스리그 골이 있는 유일한 선수이다. 물론 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통산 7백90회 출장은 보비 찰튼의 종전 기록(7백58회)를 일찌감치 넘어섰다.

세계 최고 수준의 축구 실력, 모범적 자기 관리의 본보기 그리고 범접하기 어려운 기록이라는 모든 측면들에서 반드시 언급되어야만 하는 ‘살아 있는 축구의 역사’는 어쩌면 이탈리아에 존재한다. 바로 수비수의 대명사, 수준 높은 수비의 교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AC밀란의 파올로 말디니.

1984~85 시즌부터 무려 25년간 밀란을 위해 봉사해온 그는 지난 2월15일 자신의 선수 경력 최후의 ‘밀란 더비(AC밀란과 인터밀란의 라이벌전)’를 치렀다. 물론 이 노병은 자신의 마지막이자 56번째 밀란 더비에서 인터밀란의 공격수들을 상대로 적잖이 고생하기는 했다.

그라운드를 한 번씩 밟을 때마다 말디니는 출전에 관한 각종 기록을 새롭게 써내려가고 있는 상태이다. 말디니의 이탈리아 세리에A 6백36회 출장은 이미 지안루카 팔류카, 디노 조프보다 높은 자리에 위치한다. 모든 대회를 총합한 밀란에서의 출장 횟수는 무려 8백90회. 지난해 2월16일, 그는 이미 대표팀 경기 등을 포함한 공식 경기 1천회를 돌파하는 금자탑을 세운 바도 있다.

사실 말디니는 ‘수비수’라는 포지션상의 불리함(그리고 어쩌면 그가 활약했던 시절 이탈리아 대표팀의 트로피 부족)이 아니었다면, 올해의 선수를 가리는 시상식장에서 한 번쯤은 가장 높은 위치에 올랐어야 했던 선수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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