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재점검하고 기본에 충실해야 국민 신뢰 얻는다
  •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
  • 승인 2009.03.03 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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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원 개편, 교류와 분석·융합은 이 시대 정보 개혁의 키워드…능력에 입각한 공정 인사가 조직 살리는 길

     
 




문제는 신뢰이다. 국가정보원의 존립은 오로지 시민과 의회의 신뢰에 의존한다. 국정원장에 대한 통치권자의 신뢰가 아니다. 통치권자에 대한 국정원장의 충성심은 더더욱 아니다.

미국에서는 정권 교체를 이유로 중앙정보국(CIA) 수장과 국가정보국(DNI) 수장에 대한 인사가 있었다. 우리도 정치적 이유로 국정원장에 대한 인사가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라 할 수 있는 원세훈 전 행정안전부장관이 신임 원장으로 취임했다.

국정원의 개편 방안에 대한 논란은 청문회장에서 시작되었다. 원원장은 인사청문회에서 “국정원의 국내와 해외 파트를 합치는 방향으로 개편하겠다”라고 말했다. 이는 국정원의 기능과 조직에 대한 전면적 개편의 신호탄으로 받아들여졌고, 사회적 논란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발언의 파장과는 달리 현 시점에서는 원장의 구상이 오해였을 뿐이라고 해명한다.

국정원의 한 핵심 관계자는 “당시의 보도는 잘못된 것이다. 정보 통합 교류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것이지, 1차장과 2차장의 조직과 기능의 통합을 말했던 것은 아니었다”라고 확인했다. 그런 차원에서 1, 2, 3 차장들에 대한 후속 인사가 단행되면, 이 부분에 대한 논란은 말끔히 정리될 것이다.

국정원 조직은 대의회 업무와 예산 등 살림을 담당하는 기획조정 파트, 국외 파트, 국내 파트, 대북 파트 등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조직은 정보 기관 조직 원리에 따라 각기 독립적으로 분리되어 운영된다. 문제는 이러한 조직 원리가 부서 간 정보교류와 융합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하는 데 있다. 인사와 예산 등을 둘러싼 조직 이기주의가 생겨나기도 한다. 대외적 팽창을 지향하던 국정원의 임무와 조직은 정권 교체를 거듭하면서 축소되었다. 이런 영향의 연장선상에서 관심은 내부로 모아지고, 지역 편중 인사, 승진만을 노린 줄대기라는 잘못된 습성이 배태되기도 했다. 이런 조직 운영의 불합리함은 결국, 정보 기관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진 한편, 정보의 융합과 집중성의 원칙에 크게 어긋나는 상황으로 치닫기까지 했던 것이 현실이다.

미국은 지난 9·11 사태 이후 16개 정보 기관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 착수했다. 수많은 첩보를 획득하고도 9·11 테러를 막지 못한 정보 기관의 책임은 교류와 융합의 결여에 있었다. 그래서 국가정보국(DNI)이라는 기구가 새로 만들어졌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정보의 교류·분석·융합은 이 시대 정보 개혁의 키워드에 해당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부끄러운 한국적 현실이다. 혈연, 지연, 학연 등 각종 사적 연고로부터 정부 활동이 제약을 받아서는 안 된다. 철저히 능력에 입각한 공정 인사, 사적 인연으로부터 자유로운 탕평 인사야말로 정보의 융합만큼이나 중요한 조직의 융합이다. 

수많은 첩보에도 9·11 테러 막지 못한 미국

노무현 정부 시절의 일이다. 국회가 중심이 되어 국정원 개혁 법안을 만들고, 여당이던 당시 열린우리당은 별도의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국정원 개혁 방안을 논의했다. 수차례 회의 끝에 안을 만들어, 청와대 비서 라인 최고위층과 여의도 어느 호텔에서 조찬을 겸한 회의를 갖게 되었다. 국내 정치 정보 수집 기능과 정책 조정 기능, 국정원 기능에 대한 의회와 문민 통제 강화 등이 주된 쟁점이었다. “이 정부까지만 그대로 쓰고, 그 다음에 하면 안 될까요?” 이 한마디에 국정원 개혁은 그 즉시 멈춰서고 말았다.

정보의 공급자가 국정원이라면, 정보의 수요자는 청와대이다. 정보는 결국, 소비자이자 주문자인 청와대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다. 국내 정보 특히 정치 정보에 대한 수요가 바로 그것이다.
      
한나라당은 의원 입법으로 정치 정보에 대한 국정원의 임무를 확실히 하자고 나서고 있고, 민주당은 역시 반대 입법을 통해 정보 기관의 월권을 경계한다. 국정원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미흡한 상태에서 법안 논쟁의 결론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이 문제는 역사적 전환기에 놓인 국제 정세 그리고 국민의 눈높이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리언 파네타 신임 CIA 국장은 청문회에서 CIA의 ‘새로운 장’을 약속하면서, “의회와 미국 대중에 대한 정직과 책임성을 요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네타는 부시 정부가 과도한 비밀 문화를 키워온 탓에 일을 그르쳤다고 비판했다. 데니스 블레어 신임 DNI 국장은 청문회에서 16개 정보 기관들에 대해 ‘극히 중요한 균형’을 추구할 것이라며, “나는 의회에 의한 것도 포함해, 독립적인 모니터링의 중요성을 믿는다. 이는 악용을 방지하고 시민의 자유를 지키고자 함이다”라고 했다. 이는 현재 우리 시민사회가 추구하는 국정원의 비전과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다.

▲ 국자정보원 청사. ⓒ국가정보원 제공

최근 미국 오바마 행정부는 스위스 은행의 비밀주의에 대해 행동을 개시했고, 조세 피난처를 통한 탈세 행위에 대해서는 제재조치를 준비 중이다. 우리도 금융감독원이 있고, 금융정보분석원이 있고, 검찰에는 금융조사부와 범죄정보기획관실이 있다. 산업기술 유출에 대한 정보 기관의 협조와 대응은 당연하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경제 정보에 대한 대응을 요구한다. 돈 세탁, 조세 피난, 불법 자금 거래 등이 그 예이다. 국정원의 조직과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국내 파트와 국외 파트의 융합에서는 물론 유사 정보 기관인 검찰과 경찰, 금감원, 국세청, 외교부와의 협조와 융합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의 융합과 조정이라면, 국민은 선뜻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는 좁은 땅에 8천만이나 되는 인구가 밀집해 있고, 남북은 분단 상태이다. 휴전선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무력 긴장이 고조되어 있다. 주변에는 ‘미·일·중·러’라는 세계 초강대국들이 버티고 있다. 코끼리가 사랑을 해도, 혹은 싸워도 잔디밭은 망가지기 마련이라는 스리랑카 속담이 있다. 중일전쟁과 러일전쟁이 그러했고, 일정 부분 한국전쟁도 그런 측면이 있었음을 역사는 잘 말해준다.

북한은 김일성 전 주석 탄생 100주년인 2012년을 계기로 새로운 체제를 출범시키려 한다. 남북은 각기 ‘통미’만을 고집하며, 서로 간 대화의 끈은 놓아버렸다. 신자유주의로 대표되는 세계 경제 체제, 테러와의 전쟁과 미국 일방주의로 대표되는 국제 안보 체제는 지금 대전환기에 들어섰다.

원세훈 체제의 국정원은 바로 이런 국제 정세와 국민의 관점에서 국정원의 역할을 재점검하고,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이다. 국정원은 청와대의 신뢰보다는 국민의 신뢰를 먹고사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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