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구하기’ 한목소리
  • 이경기 (내일신문 기자) ()
  • 승인 2009.03.16 2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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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법관 사건으로 대법원장도 조사 대상 올라…법원 안팎에서 “정치적 이용 반대”

▲ 2월10일 인사청문회 때의 신영철 대법관. ⓒ시사저널 유장훈

촛불집회 관련 재판에 압력을 행사한 신영철 대법관 사건에 사법부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 1970~80년대나 있을 법한 법원장의 재판 개입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소장 판사들은 격앙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특히 신대법관이 형사 단독 판사들에게 보낸 8월14일자 ‘무제’라는 제목의 e메일에는 ‘대법원장도 자신의 뜻과 다르지 않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이용훈 대법원장마저 진상조사의 대상이 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법원 안팎에서는 이번 사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면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과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법원장이 위기를 겪던 일이 이번에도 되풀이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지방의 한 부장판사는 “특히 이명박 정부는 1980년대 권위주의 정권을 떠올릴 만큼 과도하게 공권력에 기대고 있다. 행정 부처의 이러한 분위기가 사법부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법원 내부에 상당하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임기는 5년이지만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이어서 대통령은 전임자가 임명한 대법원장과 견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구조이다. 이대법원장은 지난 2005년 법조계 개혁 성향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대법원장에 임명되었다. 당시 이홍훈 법원장(현 대법관)도 강력한 후보였지만,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면서 폭넓게 의견을 수렴한다는 평가를 받은 이대법원장이 사법부 수장에 올랐다. 

이대법원장은 취임 초기부터 검찰 작성 ‘조서’에 의해 진행되던 재판 관행을 비판하고 법정에서 구두로 모든 쟁점이 다퉈지는 공판 중심주의를 강조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사법의 중추 기관은 법원이고, 그 다음에 검찰이나 변호사회 이런 단체들이야 보조 기관들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가 검찰과 변호사협회의 반발을 샀다.

하지만 이후에도 이대법원장은 법관의 재판 독립과 불구속 재판을 강조하면서 검찰과 철저히 선을 그었다. 영장 기각률이 갈수록 높아지면서 검찰의 불만은 더욱 커졌고, 뇌물 등 부패 범죄를 척결하는 특수 수사를 못한다는 불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과거 동등한 것처럼 인식되던 판사와 검사의 지위가 확연히 판사 쪽으로 기울어진 것도 이때부터이다. 노무현 정부 내에서 이대법원장은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던 사법부의 과거사 문제도 끄집어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법원과 지금의 사법부를 단절시키는 한편, 부끄러운 과거를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지가 담긴 것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노무현 정부와 이른바 ‘코드’가 맞았던 이대법원장이 필연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촛불 시위로 호되게 당한 정부가 공권력을 강조하면서 노무현 정부 당시 위축되었던 검찰권이 부활했고, 법원 내부에서는 “검찰의 대대적인 반격이 있을 것이다”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지난 1년간 사법부는 안정되었고, 이대법원장은 취임 3년째를 맞는 지난해 9월26일 ‘사법부 60주년’ 기념식에서 사법부의 과거사를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그는 “과거의 불행한 일들을 교훈 삼아 법관의 양심과 사법의 독립을 굳게 지켜나가겠다”라고 다짐했다.

정권 바뀔 때마다 대법원장이 위기…‘사법 독립’ 훼손 우려

▲ 이용훈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 출근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당시는 이명박 정부가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 비슷하다며 비판받던 시점이어서 이대법원장의 과거사 반성과 사법 독립 발언은 상당히 의미 있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최근 신대법관 사태가 터지면서 이대법원장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대법원장이 현 정부에 발맞추는 쪽으로 돌아섰다는 말도 나온다. 임명 당시부터 이대법원장을 지지했던 개혁 성향 언론들이 맹렬하게 사법부를 공격하고 나선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법원 내부에서는 사법의 독립을 강조하는 이대법원장의 진의를 의심하지 않고 있으며, 이번 사태가 대법원장에게로 번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하다. 과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법원장이 위기를 겪었던 사례를 보면 이런 법원의 우려가 괜한 걱정은 아닌 듯하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헌법 개정을 통해 ‘임명권자가 바뀐 대법원장·대법원 판사 등은 후임자가 선임될 때까지 직무를 행한다’라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 조항은 정권을 유지시키기 위해 사법부를 통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조치였다. 정권이 바뀌면 대법원장의 임기와 상관없이 대통령이 후임자를 임명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1987년 민주화 항쟁을 경험한 사법부는 노태우 정권이 들어선 1988년 2월 초 노대통령이 5공화국 당시 활동했던 사법부 수뇌부를 재임용하려고 하자 반발하며 2차 사법 파동을 일으켰다. 소장 판사 3백35명의 서명이 담긴 ‘새로운 대법관 구성에 즈음한 우리들의 견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결국, 임기가 3년가량 남은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은 사법 민주화를 요구하는 법관들의 반발로 사퇴하게 된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법원은 다시 격랑에 휩싸인다. 문민정부 출범 이후 개혁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한참 높아졌지만 사법부는 여전히 개혁의 무풍지대라고 본 소장 판사 일부는 사법부 개혁을 주장했고, 법원 수뇌부가 일선의 의견을 수렴해 개혁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개혁안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친다고 판단한 소장 판사들은 “사법부의 자기 반성 없이는 진정한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라는 내용의 ‘사법부 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발표하게 된다. 이 사태는 당시 김덕주 대법원장의 사퇴로 이어졌다.

“신대법관 사퇴시켜도 대법원장 지켜야” 여론 우세

후임으로 임명된 윤관 대법원장 역시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1998년에 위기를 맞는다. 의정부 법조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이다. 대법원이 자체 조사를 벌인 결과 의정부지원 판사 9명이 변호사들로부터 명절 떡값, 판사실 유지비 등 명목으로 돈을 받거나 변호사 개업, 주택자금 등으로 수천만 원에서 1억원까지 빌린 사실이 확인되었다. 1999년에는 대전 법조 비리 사건마저 터져 판사 5명이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대법원장 퇴진까지는 이어지지 않았고, 윤대법원장은 임기를 마쳤다. 

1999년 6월 취임한 최종영 대법원장은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 직후 대법관 제청 파문을 겪었다. 기수와 서열 위주의 관행화된 대법관 인선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며 소장 판사들이 연판장을 돌리며 사태를 주도했다. 당시 김용담 대법관의 인선은 그대로 이루어졌지만 이 사건으로 노무현 정부 하에서 본격적인 사법 개혁이 단행되었다.

대법관 제청 파문 이후 최대법원장은 자리를 지키기는 했지만 사실상 힘을 잃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당시 최대법원장은 ‘식물 대법원장’이라고 불릴 만큼 조용히 임기를 지냈고 청와대와 시민단체, 법학자들이 참여한 사법 개혁 작업이 임기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신대법관 문제에 대해 청와대와 여권이 (신대법관을) 보호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지만, 사태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면 물갈이 여론이 형성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전망했다. 그는 “소장 판사들을 중심으로 한 내부 여론은 일단 이번 사태가 대법원장으로까지 번지는 것은 막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라고 말했다. 이번 일을 빌미로 현 정권에서 이대법원장의 거취 문제까지 확산시키려는 정략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법원은 잔뜩 경계심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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