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전선에 ‘오픽’이 뜬다
  • 안성모 (asm@sisapress.com)
  • 승인 2009.04.06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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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말하기 실력 요구하는 기업 점차 늘어…삼성 등은 영어 회화 성적 필수

ⓒ시사저널 임준선

생각했던 것보다 못 본 것 같아요.” 지난 3월31일 오후 3시, 서울 중구 순화동에 위치한 오픽(OPIc) 센터를 나서는 최슬기씨(24·여)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처음으로 치른 오픽 시험 성적이 그다지 좋게 나올 것 같지 않아서였다.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최씨는 올해 하반기나 내년 상반기에는 취업을 해야 한다. ‘5학년 대학생’이 즐비한 상황이라 다소 여유가 있어 보이지만, 경기 침체로 더욱 좁아진 취업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나 지금이나 취업에서 영어 성적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토익(TOEIC)으로 대표되는 영어 시험 성적표 제출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지 오래다. 대학 도서관에서 전공 대신 토익 공부에 열중인 학생을 보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최씨도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토익 시험을 다섯 번이나 보았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취업 준비생 사이에 영어 말하기 열풍이 불면서 해당 시험장이 북적대기 시작했다. 듣기와 읽기 중심이던 영어 평가 기준이 말하기 중심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 들어 이러한 현상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오픽과 토익 스피킹(Speaking) 등 영어 말하기 시험 응시생 규모에서부터 잘 나타난다. 2월에 2천7백15명이던 오픽 응시생 수는 3월 들어 1만7천명으로 급증했다. 지난해 2월과 3월에는 각각 6백9명과 2천6백43명이 응시했는데, 불과 1년 사이 5백% 내외의 가파른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토익 스피킹 시험도 응시자가 올해 들어 3백% 이상 늘어나면서 전체 영어 평가 시험에서 차지하는 말하기의 비중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기업들, 영어 면접에 비용 많이 들어 선호

취업 준비생을 중심으로 한 영어 말하기 시험 열풍은 채용 공급자인 기업의 요구에 따라 나타난 현상이다. 그동안 주로 영어 면접을 통해 취업 희망자의 회화 능력을 평가했다면 이제는 영어 말하기 시험 성적을 통해 좀더 효율적인 평가를 하겠다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다. 직접 영어 면접을 실시할 경우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많다. 면접에 소요되는 비용도 적지 않다. 특히 채점 기준이 불명확하다 보니 능력을 객관화하기 어려운 점이 문제로 지적되어왔다.

그렇다고 직원을 채용하면서 영어 말하기 능력을 시험하지 않기도 어려운 실정이라는 것이 대다수 기업의 입장이다.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두고 있고 해외 파트너와의 관계가 중요한 기업일수록 더욱 그렇다. 여기에다 주로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창업주의 2, 3세가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회화 능력에 대한 기업의 요구는 그 강도가 더 높아지는 분위기이다.

유력 대기업들이 열풍을 선도하는 모양새이다. 삼성이 대표적이다. 삼성그룹은 올해부터 신입사원 공채시 기존의 토익 성적이 아닌 영어 회화 성적 제출을 필수로 의무화했다. 지난해까지 미제출자를 대상으로 실시했던 영어 회화 테스트는 더 이상 보지 않기로 했다. 이에 따라 삼성에 입사하기 위해서는 오픽이나 토익 스피킹 등 영어 말하기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야 한다. CJ그룹도 마찬가지이다. 역시 토익 대신 영어 말하기 시험 성적을 반드시 제출토록 했으며 성적에 따라 가산점을 반영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신입사원 채용시 영어 말하기 시험 성적표를 제출토록 하는 기업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평가기관에 따르면 두산그룹, 미래에셋, 한진중공업 등이 영어 말하기 시험 성적으로 영어 면접을 대신하고 있다. 또 LG전자, 이수그룹, 한국타이어, 현대택배, 벽산건설, 온세텔레콤 등도 영어 말하기 시험을 신입 채용에 활용하고 있다. 크레듀 이지환 오픽팀장은 “지난해부터 영어 말하기 시험 성적표 제출을 요구하는 기업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올해 들어서는 필수가 되어가는 분위기이다”라고 설명했다.

임직원들의 인사·승진 평가 등에 활용하는 것까지 포함한다면 영어 말하기 시험에 대한 대기업의 수요는 훨씬 더 많아진다. LG그룹과 SK그룹 계열사, 포스코,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이 인사 평가 방안 중 하나로 영어 말하기 시험을 도입했다. 한국토익위원회 최세열 토익 스피킹팀 부장은 “영어 말하기 능력에 대한 기업의 실질적인 요구가 늘었다. 이미 2백50여 개 기업에서 토익 스피킹 시험 성적을 활용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대학 풍경도 달라지고 있다. 지난해 중순까지만 해도 영어 말하기 시험에 대한 대학 관계자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해당 기관이 설명회에 나섰지만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올해 들어 상황이 급격히 변했다. 취업 전선에 나서게 될 학생들의 요구가 커지자 영어 말하기 시험에 대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연세대와 세종대는 취업 준비생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평가와 함께 고사장을 운영하고 있다. 동국대, 숙명여대, 아주대 등은 온라인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건국대, 경희대, 고려대, 동아대, 성신여대 등에서는 교육평가 방안으로 활용하고 있다. 성균관대와 중앙대는 졸업 인증제를 도입했고, 경동대와 단국대에서는 영어 말하기 시험 성적이 학점으로 인정이 된다.

영어 말하기 시험 열풍은 가뜩이나 주머니가 가벼운 취업 준비생들에게는 경제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취업 준비 중인 대학원생 유래형씨(28·남)는 “시험 비용이 만만치 않지만 대기업 채용에서 영어 말하기 시험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안 볼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한 달에 영어 공부에 들어가는 비용이 15만원 정도라고 밝힌 유씨는 주변의 경우 학원비와 시험 응시료를 더해 40만원 정도 쓰는 학생들도 있다고 전했다.
최슬기씨도 시험 비용에 대해 “솔직히 부담스럽다. 한 번에 원하는 점수를 받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여러 번 시험을 보다 보면 돈도 많이 들고 시간도 많이 뺏긴다”라고 밝혔다. 그런 만큼 학업과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다고 했다. 학원에 다닐 때는 한 달에 15만원 정도 들었다는 최씨는 최근 스터디그룹에서 공부하면서 영어 교육에 들어가는 비용을 아끼고 있다. 대학원생으로서 역시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이상협씨(28·남)는 “학부 때는 토익을 잘 보기 위해 학원도 다녔지만 영어 말하기 시험을 대비해서는 별도로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 미국 드라마를 보는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충분히 준비해서 보면 시험 비용 줄일 수 있어”

시행 기관의 입장은 취업 준비생들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영어 말하기 시험이 토익과 달리 채점자가 답변 하나하나를 듣고 직접 평가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비용이 상대적으로 높을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현재 토익의 경우 응시료가 3만9천원가량, 토익 스피킹은 6만6천원가량 된다. 오픽은 이보다 조금 많은 7만1천5백원의 응시료가 든다.

이지환 팀장은 “토익의 경우 자주 시험을 보면 점수가 오르기도 하지만 영어 말하기 시험은 그렇지 않다. 충분히 준비를 해서 시험을 보아야 하고, 그러면 비용 부담이 크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세열 부장은 “듣기와 읽기만 공부해서 회사에 들어가면 말하고 쓰기를 위한 재교육에 더 많은 비용이 들 수도 있다. 투자 비용이 조금 더 들지만 나중에 나타날 효과는 그 이상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영어 시험이 듣기와 읽기, 말하기와 쓰기 등 부문별로 나뉘어 있는 것도 취업 준비생으로서는 어려움을 갖게 만드는 대목이다. 이에 대한 시각은 엇갈렸다. 영어 말하기 시험 열풍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이며, 기존의 토익이 가졌던 영향력에 변화가 올 것이냐에 대한 전망에서 입장 차를 보인 것이다. 이지환 팀장은 “올해 말과 내년 초 사이에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한 가지 시험만 보아도 될 것이다. 적어도 3년 이내에는 기업이 요구하는 채용 조건에서 말하기 평가가 필수가 되고 토익 등 지필 시험은 선택이 될 것이다. 이중으로 투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올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반면 최세열 부장은 “지난해 토익 응시자가 2백만명을 넘었다. ‘토익 시대는 끝났다’라는 평가는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난 것이다”라고 반박했다. 최부장은 “듣기와 읽기가 중요했다가 이제는 말하기가 중요해졌는데, 지난해부터 포스코, 현대중공업, 대한항공 등 쓰기를 요구하는 대기업이 생겨나고 있다. 모든 기업이 말하기만을 중요시할 수는 없다. 결국 듣기와 읽기, 말하기와 쓰기 등 네 가지 모두를 평가에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 서울 순화동에 위치한 크레듀에서 영어 말하기 시험을 치르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국내에서 실시되고 있는 영어 말하기 시험은 다양하다. 오픽과 토익 스피킹 이외에도 지-텔프(G-TELP) 한국위원회의 구술능력평가(GST)가 있다. 또, 서울대의 텝스 스피킹(TEPS Speaking), 숙명여대의 메이트 스피킹(MATE Speaking) 등 국내 대학에서 개발한 평가 프로그램도 있다. 이 중에 기업에서 주로 활용하는 대중적인 시험은 오픽과 토익 스피킹이라고 할 수 있다.

오픽과 토익 스피킹은 영어 말하기 능력을 평가한다는 목적은 같지만 개발 및 시행 기관이 다른 만큼 시험 방식에서도 차이가 있다. 일단 시험 시간은 오픽이 40분, 토익 스피킹이 20분이다. 사전에 시험에 관한 설명을 제외한 시간이다. 모두 12~15문항으로 이루어진 오픽은 문항당 답변 시간을 수험자가 조절할 수 있다. 질문 청취는 두 번 가능하다. 반면, 총 11문항으로 구성된 토익 스피킹은 문항별로 답변 시간이 나뉘어 있다. 질문은 한 번 들을 수 있다.

채점 방식도 다르다. 오픽의 경우 문항에 대한 답변 전체를  평가해 채점을 하지만, 토익 스피킹의 경우 각 문항별로 채점을 한다. 오픽이 시험 결과를 7등급으로 나누어 등급만을 발표하는 반면, 토익 스피킹은 8등급으로 나누어 점수도 함께 발표한다. 오픽 최상급 등급인 ‘Advanced’는 글로벌 업무를 거의 완벽하게 수행할 수 있는 수준이며, 2백점 만점인 토익 스피킹에서 1백90점 이상인 8등급은 연속적이고 지속적인 대화가 가능하며 문법과 단어 구사가 정확해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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