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B 문턱, 높이거나 낮추거나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5.05 22:3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은행마다 고객 자산 규모 조정하며 서비스 차별화…맞선 주선에 프로 골퍼 1 대 1 레슨도

▲ 투자상품 창구에서 고객이 상담을 받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부자들의 돈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다. 어떤 펀드에 수십억원을 한꺼번에 투자한 고객도 있다.”

한국씨티은행 황경일 SKY CE팀장은 최근 투자 동향을 이렇게 설명했다. 경기가 바닥을 친 듯한 징후들이 나타나면서 부자들이 닫아놓았던 금고문을 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빌딩 임대업을 하는 김 아무개씨(56)는 최근 광업주 펀드에 39억원을 투자했다. 앞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판단에서이다. 국제 유가는 1백47달러에서 38달러까지 하락했다. 글로벌 경기 침체로 소비량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하락 폭이 상식을 벗어나고 있다. 알루미늄 등 비철금속도 최근 재고 물량이 늘어나 가격이 바닥을 치고 있다. 변수는 중국이다. 전세계 원자재시장의 ‘블랙홀’로 불리는 중국 경기가 되살아날 경우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의식해 그동안 저평가되었던 광업주 펀드에 부자들이 몰리고 있다.

“부자들은 아직 우량 채권을 좋아해”


그러나 상당수 부자들은 적극적으로 지갑을 여는 데 주저하고 있다. 시장에 발을 담그고 있지만 섣불리 한 곳에 투자하지 않는다. 황팀장은 “언론에서는 현재 경기가 바닥을 친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부자들의 생각은 다르다. 다시 조정이 올 수 있다는 생각에 관망하고 있다. 은행 이자보다 높은 우량 채권이 활발하게 거래되는 정도이다”라고 귀띔했다.

삼성증권 PB연구소가 최근 내놓은 ‘2009 해외 PB비즈니스 7대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전세계 자산 관리 시장은 여전히 얼어 있다. 부자 고객들은 고수익·고위험인 구조화 상품보다 현금이나 채권 등 기본적이면서 전통적인 상품을 선호하는 추세이다.

이에 맞추어 은행들도 PB 전략을 대폭 수정하고 나섰다. 기존의 자산 관리 수준에서 벗어나 유언 및 상속 서비스, 기업 인수를 위한 중개, 고객 간 맞선 서비스 등으로 개인 비서나 커플 매니저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이를 위해 PB 고객도 좀더 세분화해 관리하고 있다. PB 고객이 되기 위한 문턱을 대폭 낮춘 후, VIP와 VVIP로 나누어 차별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국민은행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이다. 지난 2007년까지만 해도 3억원 이상 자산 보유자는 ‘Gold & Wise’ 회원으로 가입이 가능했다. 현재는 5억원으로 한도를 상향 조정했다. 이와 함께 ‘집사형 마케팅’을 위해 HNWI(High Net-Worth Individual) 전용 PB센터를 늘리고 있다. 이곳은 금융 자산이 최소 30억원 이상은 되어야 이용할 수 있다.

하나은행 역시 ‘Gold Club’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금융 자산을 5억원 이상 보유해야 한다. 이와는 별도로 최근 ‘WM(Wealth Management)센터’를 개설했다. 이곳에서 서비스를 받으려면 금융 자산이 최소 10억원은 있어야 한다. PB 대중화의 선두에 섰던 우리은행 역시 최근 전략을 수정했다. 이 은행은 그동안 자산 1억원 이상인 TC(Two Cgairs) 회원과 10억원 이상인 TCE(Two Chairs Executive) 회원 외에도 3천만원 이상이면 PB영업점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지난해 6월부터 최소 자산 기준을 1억원으로 상향 조정했다. 이점수 우리은행 PB사업단 팀장은 “PB 가입 문턱이 낮아지면서 PB 고객과 기존 고객과의 차별화가 되지 않았다. 지난해부터 세 개 등급에서 두 개 등급으로 단순화했다”라고 설명했다.

이에 반해 신한은행은 문턱을 크게 낮추었다. 이 은행의 경우 기존에는 10억원 이상 고객인 PB센터와 2억원 이상인 V라운드로 나누어 운영해왔다. 그러나 최근 WM사업그룹을 신설하면서 기존 V라운드를 WM사업부에 편입시켰다. 이 과정에서 최소 자산을 1억원으로 낮추었다. 이관석 WM사업부 재테크팀장은 “기존 영업점의 VIP 고객에게도 PB센터의 특화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WM사업부를 신설했다. PB 서비스를 받는 고객이 늘어나는 대신, VVIP 고객에게도 좀더 차별화된 서비스가 가능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한국씨티은행은 보유 자산이 5억원이상인 ‘씨티골드 셀렉트’와 1억원 이상인 ‘씨티골드’ 제도를 두고 있다. 외환은행의 경우 세대 합산 자산이 1억원이면 PB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문턱을 낮추었다.

서비스 역시 은행별로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다. 신한은행의 경우 국내 최초로 유언 및 상속 관리 서비스를 선보였다. 전속 레슨프로골퍼인 박경호 프로를 통한 1 대 1 원포인트 레슨, 동반 라운딩, 골프 세미나 등도 열고 있다. 필요하다면 센터에 상주한 세무사로부터 세금 등에 대한 상담을 받을 수도 있다.

PB센터가 자산 관리 수준을 넘어 ‘집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은행 역시 세무사나 골프 컨설턴트를 상주시켜 관련 서비스를 하고 있다. 고객이 은행 업무와 함께 수준 높은 미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갤러리 뱅크’도 운영 중이다. 하나은행은 일찍부터 미술품을 활용한 아트뱅킹을 추구해왔다.

이들 은행과는 달리 우리은행은 고객의 수익률 향상에 전략을 집중하고 있다. 이 은행은 올 초 3개의 PB센터를 개설했다. 이곳에 은행권 최대 규모인 10여 명의 세무사를 상주시키고 있다. 이점수 우리은행 PB사업단 부장은 “골프를 서비스하는 것보다 수익률이 우선이 아니겠느냐. 금융 위기가 전화위복이 되었다. 고객 신뢰 회복을 위해 최근 펀드 손실분을 모두 보상해주었다. 기존 펀드 가입 고객의 손실률이 높다 보니 네 달에 한 번씩 포트폴리오를 다시 관리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우리은행은 PB센터에 세무사 10여 명 상주

한국씨티은행의 경우 뚜렷한 특징이 없는 것이 장점이다. 은행권에서는 그동안 PB사업부의 서비스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았다. 자산운용사를 자회사로 가지고 있는 상당수 은행들이 자사 상품을 권유하는 사례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난해 10월 글로벌 금융 위기를 겪으면서 PB의 추천을 받은 상품의 수익률이 급락함에 따라 수많은 고객으로부터 항의를 받는 곤욕을 치렀다.

그런 면에서 한국씨티은행의 전략이 눈길을 끈다. 한국씨티은행의 경우 현재 판매만 대행하고 있다. 특정 회사에 매이지 않고 상품을 추천만 하기 때문에 투자에 고객들의 대한 책임 논란에서 한결 가벼워진다. 

<금융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진실>(웅진윙스)의 저자인 송승용 희망재무설계 컨설팅 팀장은 “세무나 부동산 관련 업무는 전문가들을 고용해서 지원하는 서비스이다. PB 개인의 역량은 현재 일반 창구 직원들과 큰 차이가 없다. 앞으로 PB들의 실력을 갖추는 데 은행들이 주력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송훈 KB국민은행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은행들의 PB 사업 경쟁으로 고객들의 눈높이뿐 아니라 기대심리 또한 커졌다. 은행들이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고객의 전반적인 금융 니즈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