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던 원로그룹 ‘삼각 편대’ 흔들흔들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9.05.05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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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일 회장 의혹 불거진 후 여권 내부에 미묘한 기류

▲ 지난해 12월9일 ‘국민일보 창간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왼쪽부터)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천신일 회장은 대선 때 고생한 정도로 치면 일등이다. 고려대 인맥과 ROTC 인맥 등을 자기 돈을 써가며 관리했다. 지금 보아서는 검찰 소환을 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안타깝다.”

지난 4월29일 만난 한나라당의 한 친이명박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천회장은 공식적인 직함이 없지만 이상득 의원,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함께 여권 ‘원로 그룹’의 핵심 인사로 꼽힌다. 그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 61학번 동기라는 것과 함께 지난 대선 때 그가 실제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 주목된다. 대선 당시 이명박 캠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한 여권 인사는 “당시 ‘돈’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이는 인물은 천회장과 이상득 의원이다”라고 말했다.

“대선 때 고생 가장 많이 해”

이 때문에 천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단지 한 개인에 대한 수사를 넘어 럭비공처럼 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검찰은 지난 4월 초 천회장에 대해 출국 금지 조치를 내렸다.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은 “아무런 혐의가 없는 사람을 출국 금지시키지는 않는다. 제기된 모든 의혹을 규명하겠다”라며 강도 높은 수사를 예고했다.

검찰은 천회장이 증권거래법을 위반하고, 탈세한 정황이 있다는 첩보를 바탕으로 내사에 들어갔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미 천회장의 주식 거래 내역과 금융 계좌 등을 샅샅이 훑은 것으로 알려진다. 심지어 천회장이 미술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해 많은 그림을 구입한 부분까지 내사를 마쳤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는 마당이다. 여러 정황으로 보았을 때 ‘천신일 소환’으로 가는 스톱워치는 이미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판단된다.

사정 기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12월 이후 천회장은 사실상 청와대 접촉이 차단되었다. 청와대에서 열린 ROTC 모임 때 대통령과 만난 적이 있지만 오래전에 약속되었고, 수십 명과 함께한 의례적인 만남이었다. 정치적으로 의미를 둘 만한 만남이나 접촉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은 한상률 전 국세청장이 태광실업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를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한 직후이다. 이 때문에 당시 세무조사 과정에서 박연차 회장과 천회장과의 관계와 관련한 ‘의미 있는’ 사안이 포착되었다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또한, 천회장이 박연차 회장에 대한 국세청의 세무조사와 관련해 움직이는 초기 단계에 청와대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도 눈여겨볼 만한 일이다. 종합해보면 청와대에는 지난해 말부터 ‘천신일 경보’가 울렸다고 볼 수 있다. 사정 기관들은 천회장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여권 내부의 미묘한 역학관계의 변화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관찰해왔다.

여권 내부에서는 지금도 “천회장에 대한 소환은 불가하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여럿이다. 이들의 논리는 한마디로 “불똥이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 어렵다”라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누군가가 총대를 메고 이 국면을 정리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흐름이 나타나는 것과 함께 천회장 또한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박연차 회장과의 관계나 ‘30억원 의혹’ 등에 대해 ‘혐의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나섰다. 물꼬를 돌리기 위한 천회장측의 반격이 이루어지는 모양새이다.

‘천신일 소환’이 민감한 이유는 그가 ‘원로 그룹’과 막역한 관계에 있는 등 여권 핵심부의 ‘민감한 부분’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지난 2007년 대통령 선거 직후 천회장과 이상득 의원, 최시중 위원장이 부부 동반으로 점심 식사를 했던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천회장은 지난해 2월 설 연휴와 7월 여름휴가 때도 이대통령과 자리를 함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친이계 내에서도 꺼리는 눈치

이 때문에 여권 내에서는 천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가 어떻게 진행되느냐에 따라 여권 핵심 원로 그룹의 위상에도 변화가 올 수 있다는 관측이 벌써 나오고 있다. 여권의 한 인사는 “천회장 문제를 천회장 개인 문제라고 볼 수만은 없다. 천회장을 비롯해 이상득 의원과 최시중 방통위원장 등 이른바 ‘왕당파’는 대통령을 만든 핵심 멤버들이다. 이들은 상당한 ‘천기(天機; 중대한 기밀)’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천회장에 대한 검찰 수사는 바로 이의원과 최위원장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천회장은 이의원과도 남다른 관계이지만 최위원장과 특히 절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회장을 둘러싼 의혹들이 가시화하면서 한나라당 친이계 내에서도 묘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원로 그룹에 포함된 천회장과 각을 세우거나, 거리 두기를 하려는 조짐이 보이고 있다. 홍준표 원내대표는 “대통령과 가깝다거나, 친인척이라거나, 친구라거나, 지인이라는 사람들이 대통령을 빙자해 허세를 부리는 바람에 국정에 혼란이 오고 나라가 어지러워진다”라고 지적했다. 귀국 후 말을 아끼는 이재오 전 최고위원도 “권력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권력을 국민을 위한 도구로 써야지, 부정 부패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안 된다”라고 밝혔다. 여권 내에서는 이들의 발언이 천회장과 박영준 차장 등을 겨냥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포스코 회장 인사 개입설이 불거졌을 때도 친이계 일부에서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방관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친박계는 더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친이계 내부 문제라는 것이다. 오히려 친이계 내부의 미묘한 기류를 즐기는 듯한 인상도 풍긴다.

천회장을 중심 과녁으로 한 여권 원로 그룹에 대한 야권의 공세는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민주당은 천회장이 이대통령의 특별당비 30억원을 대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가 한나라당으로부터 고발당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오히려 한나라당의 고발을 반기는 분위기이다. 민주당의 한 핵심 인사는 “한나라당이 고발을 해옴으로써 오히려 법정에서 진위 여부를 가릴 수 있게 되었다. 말이 특별당비이지 그것은 이대통령의 대선 자금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민주당은 ‘천신일 3대 의혹 진상조사특별위원회’까지 설치했다. 이미 노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로 민주당 역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여서, 더 이상 불리할 것이 없다는 자세이다. 갈 데까지 가보자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민주당은 이를 위해 특별검사제를 도입하라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다. 물론 현실화하기는 어려운 카드이다.

검찰도 사안의 민감성을 잘 인식하고 있다. 홍만표 대검 수사기획관이 “천회장에 대한 수사는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과 관련된 것만 본다. 대선 자금 쪽은 아니다”라고 분명하게 선을 그은 것이 그 반증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무한정 수사를 벌일 수는 없는 일 아니냐”라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검찰이 천회장을 소환·조사한다고 해도 대선 자금까지 수사가 연결될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소환 자체만으로도 여권의 원로 그룹이 입을 정치적인 타격은 심대하다. “향후 원로 그룹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라는 전망이 나 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다. 게다가 이상득 의원은 4·29 재·보선의 참패로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이래저래 몰리는 형국이다. 한나라당 한 관계자는 “천회장에 대한 수사 과정에서 여권과 관련 있는 새로운 의혹이 불거지게 되면 당내에서 정풍운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위상 변화가 여권 내의 급격한 세력 교체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는 데는 섣부른 감이 있다. 박근혜계나 이재오계 등이 목소리를 높이기에는 아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권의 각 세력들은 당분간 불안정한 권력 구도를 유지하면서 내년 지자체 선거와 당권의 향배를 둘러싸고 물밑에서 더욱 치열한 각축전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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