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은 남한 내에서는 또 다른 ‘이방인’이다.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왔으나 남한 사회의 장벽은 분단의 장벽만큼이나 높다. 그동안 탈북자는 남한의 정권에 따라 위상이 갈려왔다. 탈북 러시를 이루던 김영삼 정권 때는 탈북자들이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푸짐한 정착지원금은 물론이고 안정적인 직장까지 알선해주는 등 남한으로의 탈북은 ‘꿈의 실크로드’나 다름없었다.
반면, 진보 성향의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혹한기를 보냈다. 남북 정상회담 개최 등 남북한이 화해 무드를 타자 탈북자들은 애물단지가 되어버렸다. 특히 노무현 정부에서는 ‘탈북’이라는 말이 금기되다시피 했다. 정착지원금도 줄고 직장도 알선해주지 않았다. 탈북자를 아예 ‘새터민’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그만큼 탈북자들의 운신의 폭도 좁았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이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는 탈북 단체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보수 정권이 들어서자 ‘물 만난 고기’처럼 활동 폭을 넓히고 있다. 지난해 4월18일에는 탈북 단체 28개가 연합해 ‘탈북인단체총연합’(탈총련)을 결성하는 등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탈총련의 출범으로 탈북 단체들 간의 권력 구도에도 지각변동이 생겼다. 현재 탈총련에는 국내에서 활동 중인 탈북 단체 33개 중 28개가 참여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숭의동지회, 탈북자동지회 등의 관변 단체가 빠졌다는 것이다.
숭의동지회는 1980년 11월에 월남 귀순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로 경찰청이 관리하고 있다. 탈북자동지회는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남한에 망명한 후 만들어졌으며, 그가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현재 국정원이 관리하고 있다. 북한민주화위원회(북민회)도 참여하지 않았다. 북민회는 지난 2007년 4월 황장엽씨 주도로 결성했으며 황씨가 위원장을 맡고 있다.
탈총련 “우리는 황장엽씨에게 관심이 없다”
그런데 탈총련이 출범함으로써 상황이 달라졌다. 자생적인 탈북 단체가 출범하면서 정부의 입김이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또 하나는 그동안 탈북자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상징으로 군림했던 황장엽씨가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한창권 탈총련 회장은 “우리는 황씨에게 미련이 없다. 황씨가 탈총련에 참여하면 원로로서 예우하겠지만, 그가 다른 길을 걷겠다면 우리는 그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북민회는 지난해와 올해 창립 행사를 준비했다가 사람이 모이지 않아서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탈북자들에 대한 황장엽씨의 영향력이 약해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김성민 북민회 부위원장(자유북한방송 대표)은 “북민회가 탈총련에 참여하지 않은 특별한 이유는 없다. 북민회도 탈총련을 대표하고 있고, 나름대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단체들이 각각 가지고 있는 특성을 인정해야 한다. 탈북단체들의 대표성을 따질 것이 아니라 탈북자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 탈총련이 황장엽 선생을 모실 생각이 있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 한두 번 찾아간 후 ‘참여해라 마라’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시사저널>이 취재한 바에 따르면 정부는 탈북 단체들이 독자 노선을 걷는 것을 극도로 경계한 것으로 보인다. 한창권 탈총련 회장은 “북민회가 생기기 전에 국정원에서 탈북 단체들을 통합하자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 후 북민회가 만들어졌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황을 보면 북민회가 출범하기까지 국정원이 직·간접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이 있다. 북민회를 통해 탈북자들을 관리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탈북 단체를 정부 주도 하에 관리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한창권 회장에 따르면 “지난해 초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황장엽씨를 내세워 탈북 단체들을 통합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해왔지만 내가 거절하면서 성사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탈총련과 산하 단체들은 올해 유난히 독자 목소리를 냈다. 대북 문제에 대해서는 주도적으로 나섰다. 북한으로 삐라 보내기를 비롯해 중국 대사관 앞 탈북 난민 강제 북송 반대 시위, 북한이탈주민보호법 개정, 북한 미사일 발사, 개성공단 직원 억류 등에 항의하는 시위에는 어김없이 탈북 단체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탈북 단체들이 정치 현안에도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디어법 개정, 노무현 전 대통령 검찰 소환 등에도 탈북 단체들이 참여해서 독자 목소리를 냈다. 북한에 삐라를 보냈던 탈북 단체를 ‘매국 단체’라고 발언했던 최재성 민주당 의원을 고발하는 등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지난 4월24일에는 ‘노무현 사법처리 국민연대’(노사연)를 결성했고, 5월8일 청계광장에서 집회를 개최했다.
김한규 탈총련 정책위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탈북자를 ‘새터민’으로 부르게 하면서 탈북자들을 변질시켰다. 남북 정상회담을 한다고 평양에 가면서 막 퍼주고 왔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김정일이 대단한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선전 효과만 내게 했다. ‘친북주의자 노무현’은 반드시 구속되어야 한다. 앞으로도 남북 문제에 적극 나설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탈북 단체들은 향후 탈북자를 대표할 수 있는 정치·사회 조직을 구성할 계획이다. 탈북자 출신 국회의원이나 기관장 등을 배출함으로써 남한 사회에서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보수 단체들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 목소리를 내겠다고 한다. 더 이상 보수 단체의 ‘들러리’를 서지 않고 남북 문제에 대해서는 주도적으로 나서겠다는 뜻이다. 향후 탈북 단체들의 행보가 어느 때보다도 주목되는 시점이다.
“친북 좌파와 싸워나가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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