빚더미 눌려 침몰하는 ‘제국’
  • 조명진 (유럽연합 집행이사회 안보전문역) ()
  • 승인 2009.06.02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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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국제 전쟁에 끼어들다 재정 적자에 두 손 들어

▲ 영국 은행이 거리에 세운 간판. ⓒAP연합

산업혁명의 본거지로서 보험과 증권업이 시작된 금융의 메카였던 영국이 모든 측면에서 고전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상임 5개 이사국 중 한 자리를 차지해온 영국의 국제적 위상은 이제 그 정점을 지난 것으로 보인다. 국가 재정이 받쳐주지 않으면 제국을 경영할 수 없고, 헤게모니의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역사의 이치를 영국의 사례를 통해서 목격하게 된다.

영국은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에 늘어나는 재정 적자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쟁에 참가해왔다. 1982년 아르헨티나와 벌인 포클랜드 전쟁을 포함해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다양하다. 1990년대 초반 걸프 전쟁 때부터 미국과의 공조를 위한 군대 파견 비용 부담에는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의 위상뿐만 아니라 과거 대영제국의 영화를 인식한 ‘체면 유지비’의 측면이 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포클랜드 전쟁을 치르는 데 든 비용은 12억 파운드, 걸프 전쟁에는 34억 파운드, 1999년 코소보 전쟁에는 10억 파운드가 들었다.

지난 5월27일을 기해서 영국군은 이라크 바스라에서 완전 철수했다. 블레어 총리 당시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미국 편에 섰던 잘못을 인정한 결정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철군 배경은 전비로 인해 늘어나는 재정 적자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국내 사정이 있다. 영국군이 1년간 이라크에 주둔하는 데 드는 평균 비용은 10억 달러였다. 영국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 예산으로 30억 파운드를 확보했었는데, 2007년까지 4년간 든 비용이 이미 74억 파운드에 이르렀다. 이번에 완전 철수할 때까지 영국이 이라크 전쟁에 지출한 금액은 100억 파운드로 추산된다. 뿐만 아니라 추가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서 다른 정부 예산을 이용해야 할 정도로 이라크 군비는 영국 정부를 압박한 요소였다(30억 파운드 규모의 예산이면 영국에서 1만명의 교사를 10년간 고용할 수 있고, 종합병원 44개를 지을 수 있는 금액이다).

영국군은 이라크에서는 철수한 상태지만, 세계 곳곳에 배치되어 분쟁에 개입하고 있다. 국가와 병력 수로 보자면, 아프가니스탄 8천명, 발칸 지역(코소보, 보스니아) 8백50명, 키프러스 3천3백명, 포클랜드 1천3백명, 독일 2만1천명, 북아일랜드 1천5백명, 지브랄타 5백명, 아센시온 섬 40명, 디어고 가르시아 50명, 그리고 유엔 평화유지군으로 3백30명이 해외에서 작전 중이다.

영국은 미국과 공조하기 위해서 2천5백억 달러에 이르는 역사상 최대 무기 획득 사업인 JSF에 참여하고 있다. 영국은 개발비 명목으로 20억 달러를 약속한 상태이다. 하지만 실질적인 수요에 의한 참여라기보다는 국제적 위상을 고려한 정치적 야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새로운 무기 획득보다도 시급한, 노후한 기존 장비에 대한 업그레이드에는 재정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한 예가, 2006년 9월 아프가니스탄에서 14명의 탑승 승무원을 희생시킨 님로(Nimrod) 항공기의 추락 사건이다. 사고 원인은 연료통 누출에 의한 화재로 밝혀진 바 있다.

재정 상태 악화로 영국은 급기야 유로파이터 전투기 구매 취소를 고려 중이다. 5월12일자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영국은 유럽의 4개국이 참여하는 다국적 차세대 전투기 사업인 유로파이터 최종 제작 단계에 부담하기로 했던 지불금을 제때에 내지 못함으로써 60억 달러에 해당되는 벌금을 물게 생겼다. 문제는 경제 위기를 겪고 있는 영국 정부로서 이같은 거액의 벌금을 조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발 금융 위기도 월스트리트보다 먼저 맞아

▲ 모기지 은행 노던 록 앞에 길게 늘어선 사람들. ⓒEPA

총 6백20대를 생산하는 유로파이터 사업에 영국,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은 각각 2백32대, 1백80대, 1백21대, 87대를 주문해놓았다. 그런데 영국은 주문한 유로파이터 중에 2012년과 2014년 사이에 인도될 예정인 88대를 취소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게 될 경우, 영국은 항공방위 산업에서 손을 떼게 된다는 뜻이 된다. 현재는 1차 생산분 49대의 유로파이터와 2차 생산분 91대가 이미 영국 공군에 인도된 상태이다. 더군다나 영국은 미국과 JSF 사업을 함께하고 있어서 재정 확보에 부담이 가중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지되어온 앵글로-색슨의 공감대가 오히려 영국 재정 상태를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시 말해 미국발 금융 위기의 직격탄을 월스트리트보다 영국이 먼저 맞은 것은 미국과 영국의 밀월관계가 낳은 부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모기지 은행인 노던 록의 부실과 국영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지난해 2월에 국영화된 노던 록의 2008년 한 해 경영 손실액은 15억 파운드에 이르렀다.

문제는 노던 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30억 파운드의 공적자금이 소요될 것이라는 점이다. 참고로 아이슬란드가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신청을 하게 된 것은 5억 달러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헝가리의 IMF 구제 패키지 규모가 25억 달러였음을 볼 때, 노던 록의 부실과 구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다른 문제는 경영진의 자세이다. 국영화된 노던 록의 신임 호프만 은행장은 지난해 70만 파운드의 연봉을 받았고, 개인연금으로 28만 파운드를 추가로 수령했다. 영국 국회에서 요구하는 것처럼, 노던 록의 구제 문제는 공적자금을 쏟아붓는 것만이 아닌 경영진의 도덕적 비전 없이는 성과를 내기가 어려워 보인다. 앵글로-색슨의 특별한 유대는 1990년대 이후 우후죽순식으로 생겨난 헤지펀드 회사의 수가 뉴욕 월스트리트 다음으로 많은 곳이 런던의 더 씨티라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실제로 금융 위기의 원인 중 하나는 미·영 헤지펀드 간의 담합과 공동 투기였다.

유로화를 도입하지 않고 파운드화를 집착하는 영국은 이에 따른 환율 손실도 보고 있다. 금융 위기 이후 파운드는 주요 통화에 대해서 맥을 추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외국투자자들은 영국 정부 채권을 투매하는 현상까지 나타나 유로화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영국 중앙 은행이 5월13일 발행한 분기별 보고서는 영국 GDP가 2009년 마이너스 4.1%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3개월 전 마이너스 3.4%보다 더 악화된 전망이다. 재정 적자에 대응해 정부 채권을 구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영국 중앙 은행은 이미 1천2백50억 파운드의 돈을 발행했다. 문제는 늘어나는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 통화를 늘리면 파운드화가 계속 하락한다는 점이다.

나뎀 왈라얏 같은 경제 전문가는 영국 경기는 2012년이 되어도 호전되기 힘들어 보이며, 실업자 수가 3백만명을 넘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게다가 영국의 부채 규모가 향후 5년간 1조4천억 파운드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5월21일 미국의 신용평가 기관 스탠다드 앤드 푸어스(S&P)는 영국의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negative)’으로 하향 조정했다. S&P가 이런 평가를 내린 데는 막대한 부채 부담을 안고 있는 영국의 재정 악화가 주요 이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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