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짜’에는 그들이 다 앉았다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07.0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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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정책연구원 핵심 멤버들, 국세청장 등 정부 요직 곳곳 다 차지하나

▲ 바른정책연구원 출신들은 대통령직 인수위에 대거 참여했다. 위는 이대통령과 인수위 위원들의 회의 모습.

“정부 요직은 ‘바른정책연구원’(BPI)이 접수했다.” 지난 6월21일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이 국세청장에 내정되자 관가에서 회자된 말이다. 언론에서는 연일 바른정책연구원을 주목했다. 백용호 국세청장 내정자가 바른정책연구원의 원장 출신이기 때문이다.

바른정책연구원은 지난 대선 당시 국제정책연구원(GSI)과 함께 이명박 대통령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던 곳이다. 국제정책연구원이 주로 현안이슈에 치중했다면 바른정책연구원은 중·장기적인 정책 과제들을 쏟아냈다. 이대통령은 양 그룹을 쌍끌이로 해서 대선 승리까지 거머쥘 수 있었다.

대선 이후 두 연구원은 해체되었으나 이명박 정부의 인력풀로 작용했다. 두 연구원의 핵심 멤버들은 대통령직 인수위를 거쳐 정부 요직에 들어갔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국제정책연구원 좌장이었던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서울대 교수)과 바른정책연구원을 이끌었던 백용호 국세청장 내정자(이화여대 교수)이다.

관운은 여러 변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터진 광우병 쇠고기 파동은 두 사람의 운명뿐 아니라 연구원 출신들의 앞길에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6월에 단행된 청와대 인적 쇄신에 류실장이 포함되었고, 그는 취임 1백17일 만에 청와대를 떠나야 했다. 역대 최단명 비서실장이라는 오명까지 얻었다. 좌장을 잃은 국제정책연구원의 뒷심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반면, 백용호 공정거래위원장은 국세청장으로 영전하면서 승승장구했고, 힘의 균형은 자연스럽게 바른정책연구원으로 기울었다.

대선 당시 이명박 대통령 싱크탱크 역할

바른정책연구원은 태동하면서부터 베일에 싸여 있었다. 이대통령은 서울시장을 그만둔 직후인 지난 2006년 7월 백용호 당시 이화여대 교수를 통해 외곽 정책그룹인 바른정책연구원을 출범시켰다. 바른정책연구원 멤버들은 오래전부터 얽히고설키며 꾸준히 친분을 맺어왔다. 백교수는 지금까지 10년 넘게 이대통령의 정책 브레인으로 지내왔다. 두 사람이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1996년이다. 백교수는 15대 총선에 서울서대문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후 이듬해인 1997년 한나라당 내 미래경쟁력분과에서 이대통령을 만났다. 당시 이 전 대통령은 분과위원장을 맡았고, 백교수는 강만수 현 국가경쟁력위원장과 함께 분과 내 민간위원으로 일했다.

지난 2002년 이대통령이 서울시장에 출마하자 백교수가 적극 도와주었고, 서울시장에 당선된 후에는 시정개발연구원장이 되었다.

이대통령이 대권 도전에 나서자 백교수는 시정개발연구원장 시절의 정책포럼을 기초로 외곽정책자문그룹을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바른정책연구원이다.

서울 강남 교대 근처에 사무실을 낸 바른정책연구원은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각 분야 전문가들을 영입했다. 한때 회원이 약 6백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대학교수와 각계 전문가들이 22개 포럼으로 나누어 활동했을 정도로 인적 구성이 광범위했다. 당시 연구원에 들어오기 위해 명함을 내민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원장인 백용호 교수를 주축으로 강명헌 단국대 교수(정책실장), 김중현 연세대 교수(운영실장)가 중심인물이었다. 이곳에서는 정치, 경제 사회, 복지, 문화 등의 공약을 만들어냈다.

알려진 멤버 외 참여 인사들은 지금까지도 베일에 가려 있어

연구원에 참여했던 한 대학교수는 “연구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비밀병기나 다름없다. 그러다 보니 보안을 철저하게 지켰다. 회원들의 활동은 점조직으로 움직였다. 포럼 중심으로 움직였기 때문에 회원들 개개인을 알 수 없었다. 여기에 참여한 인사들도 혹여 신상에 불이익이 될까 봐 자신들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극히 꺼려했다”라고 말했다. 실제 바른정책연구원의 참여 인사들은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다. 회원으로 알려진 것도 고작 20여 명에 불과하다. 아직 마땅한 자리를 받지 못한 참여 인사들 중에는 한사코 회원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른정책연구원 멤버들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이다.

지난 2007년 12월22일 대통령 당선인 신분이던 이대통령은 일명 ‘테니스 모임’을 개최했다. 대선 때 고생한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자리였다. 여기에는 바른정책연구원 멤버들이 대거 초청되었는데, 안병만 전 외국어대 총장, 강명헌 단국대 교수, 김중현 연세대 교수, 이준승 이화여대 교수, 이정재 서울대 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때 처음으로 연구원의 실체가 일부나마 드러나게 된 것이다. 바른정책연구원은 지난 2007년 12월26일 송년회 겸 해단식을 갖고 사실상 해체 수순을 밟았다. 약 17개월 동안의 시한부 생명이 끝나는 순간이다. 그동안의 연구 결과를 모은 <바른정책백서>를 발간한 것이 마지막 일정이었다.

연구원이 해체된 후에는 보은 인사가 이어졌다. 바른정책연구원 이사장 출신인 안병만 전 외국어대 총장은 초대 미래기획위원장을 맡았다가 지난해 8월 교육과학기술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책실장이던 강명헌 단국대 교수는 지난해 4월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이 되었으며, 차기 공정거래위원장 1순위로 꼽히고 있다. 이명박 정부 초대 기획재정부장관을 지낸 강만수 국가경쟁력강화 위원장도 바른정책연구원 출신이다.

운영실장을 맡았던 김중현 연세대 교수는 교과부 차관에, 김태준 동덕여대 교수는 한국금융연구원장에 임명되었다. 김태효 청와대 대외전략비서관, 김우상 호주대사, 이준승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장, 이정재 녹색성장위원회 민간 위원도 바른정책연구원 출신이다. 박천일 숙명여대 교수는 지난해 4월 대통령 추천으로 방송통신심의위원이 되었으나 임기 3년 중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지난 5월 사퇴했다.

바른정책연구원 이사로 활동하며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관리했던 유인촌 전 서울문화재단 이사장은 문화체육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최재덕전 건설교통부 차관도 ‘MB맨’으로 꼽힌다. 최 전 차관도 바른정책연구원 이사 직함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주택공사 사장에 임명되었다. 이명박 정부 초대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이종찬 전 서울고검장도 바른정책 연구원 이사 출신이다. 바른정책연구원은 공식적으로는 실체가 없다.

지금은 각 포럼에 참여했던 멤버 중심으로 가끔 만나는 친목모임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한다.

경제 분야 쪽에 참여했던 한 인사는 “연구원에 참여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원봉사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솔직히 떡고물이라도 생각하고 참여한 것 아니겠는가.

그러다 보니 정권이 끝나기 전에 혹시나 해서 (자리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끼리 가끔 만나서 정보 교환은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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