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 빠진 재정에 터미네이터 ‘컴백’
  • 워싱턴·진창욱 편집위원 ()
  • 승인 2009.07.14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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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주, 할리우드 볼까지 매각 고려 슈왈제네거 주지사의 ‘밀어붙이기’ 성공할까

ⓒ연합뉴스


여윳돈이 많은 개인이나 기업은 지금이 자기 이름이나 회사를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잘만하면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세계적인 문화 명소인 할리우드 볼을 매입해서 자신의 이름이나 회사명을 크게 써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아는가. ‘김길동 할리우드 볼’이 세계 관광 안내 책자에 버젓이 실릴지.

20년 안에 최대의 재정 위기를 맞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최근 예산 적자를 메우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할리우드 볼을 매각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할리우드 볼은 할리우드의 산자락에 자리 잡은 1만8천석의 대규모 야외 공연장이다. 미국이 세계적인 명소 중 하나라고 자부하는 곳이다. 캘리포니아가 주의 자존심을 버릴 정도로 재정 위기가 심각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중범죄자 감옥으로 알려져 있는 샌프란시스코의 샌 켄틴 형무소 역시 매각할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전체 면적이 4백32에이커(약 53만평)인 이 감옥은 금문교(골든 브리지)에서 북쪽으로 자동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샌프란시스코만 바닷가에 있다. 샌 켄틴 형무소 매각설은 캘리포니아 주의 재정 상황이 중요한 감옥마저 처분해야 할 정도로 다급한 상황이냐는 질문이 나오게 한다.

일부 언론은 할리우드 볼이나 샌 켄틴 형무소의 매각설을 두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지나가는 농담 정도로 치부한다. 그러나 주지사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결단력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중범죄자 감옥 ‘샌 켄틴 형무소’도 팔 가능성 있어

슈왈제네거 주지사는 별명이 가버네이터(Governator)이다. 주지사를 뜻하는 가버너(Governor)와 ‘끝장내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터미네이터(Terminator)의 합성어이다. 정치인인 가버너이기도 하지만 터미네이터이기도 한 슈왈제네거라면 할리우드 볼 정도는 가볍게 매각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슈왈제네거는 오스트리아 출신 이민자로 보디빌딩 세계 챔피언 경력에 이어 회사 경영인, 그리고 영화배우로 이름을 얻은 정치인이다. 그가 할리우드의 공상 과학영화 <터미네이터>로 영화계 스타로 입신한 이래 그의 이미지는  터미네이터로 각인되어 있다.

슈왈제네거의 결단력은 젊은 시절부터 유명했다. 오스트리아 경찰이었던 엄격한 부친 아래서 친자식이 아닐 것이라는 오해를 사 구박을 받으며 자랐던 슈왈제네거는, 훗날 돈 많고 유명한 사람이 됨으로써 아버지의 구박에 보복하겠다고 다짐했다. 먼저 시작한 것은 보디빌딩이었다. 자신이 가장 빨리 유명해질 수 있는 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슈왈제네거는 모든 정열을 보디빌딩 훈련에 쏟아부었다. 그는 19세에 이미 세계대회에서 우승하고 20세에 보디빌딩 올림픽에서 우승했다. 그는 보디빌딩 인연으로 20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꿈을 다졌다. 판매 사업으로 돈도 많이 번 그의 목표는 할리우드에서 유명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꿈을 이루었다.

할리우드에서 이름을 얻은 그의 다음 목표는 정치였다. 그의 첫 정치 무대는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다.
2003년 현직 데이비스 주지사가 탄핵으로 물러나면서 도전에 나선 슈왈제네거는 공화당 후보로 나서 민주당 소속 경쟁자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했다. 그는 2005년 선거에서 재선했다.

슈왈제네거는 목표를 세우면 과감하게 실천함으로써 결실을 이끌어냈다. 그는 주지사에 취임한 뒤 보수건 진보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정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자신이 소속한 공화당과 상대당인 민주당이 함께 동참할 수 있는 이른바 양당 정책(Bipartisan Policy)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공화당이 싫어하더라도 민주당 쪽 견해가 옳으면 정책으로 반영하겠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민주당이 싫어하더라도 공화당 의견이 옳다면 밀고 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의 양당 정치는 지난해까지는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특히 민주당의 호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해 의회 표결을 통해 법을 개정하는 등 제도 개혁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 재정 위기에서는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2009~10년 주정부 예산에서 세수 부족으로 인한 재정 적자가 4백20억 달러에 이르자 슈왈제네거는 적자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만들어 의회에 제출했다. 슈왈제네거는 세율을 올리고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고전적인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세율 인상은 공화당이 싫어하고, 교육과 노인복지 등 사회복지 예산을 감축하는 것은 민주당이 반대했다. 이 새해 예산안을 두고 공화당과 민주당이 당리를 앞세워 다투면서 통과에 실패했다. 두 당 모두 양보하지 않았다. 양당을 끌어안으려는 양당 정책이 양당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

슈왈제네거는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공채를 발행하는 등 자금을 차입하기에 앞서 연방정부에 지불 보증을 요청했다. 하지만 워싱턴은 주정부의 재정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라고만 대답했다.

슈왈제네거는 의회의 예산안 협의 진행이 지지부진하자 지난 6월19일 한시적 세율 인상과 이를 통한 예산 조정안 5건과 주정부 공무원 연봉 인상 동결 1건 등 모두 6개항을 주민투표에 부쳤다. 주민들은 세율 인상은 반대하고 공무원 연봉 인상 동결에서만 동의했다. 투표 결과에 따라 공무원 급여 예산에서 지출을 대폭 줄여 예산 적자가 2백60억 달러로 조정되었다. 슈왈제네거는 나머지 적자 폭을 축소하기 위해 사회복지 예산 감축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는 세율 인상이 무산되기는 했지만 민주당이 원하는 세율 인상안을 수용했으니 이제는 사회복지 예산 감축에 민주당이 협조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할 것”

지난주 슈왈제네거는 캘리포니아 주 예산의 긴급 상황을 선포하고 예산안 심의를 최우선으로 처리해달라고 의회에 요청했다. 그는 의회가 예산안을 처리하지 않을 경우 의회가 의결한 모든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화당이나 민주당이 대상이 아니라 의회를 대상으로 선전 포고를 한 셈이다.

슈왈제네거는 또 당장 주 공무원에 대해 매월 3일간의 무급 휴가를 강제 시행하기로 하고 교육 예산, 노인복지 지원금 등 전반적인 예산 지출을 감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우선 공립대학 신입생 수를 5만명 이상 줄이는 등 캘리포니아 주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생각보다 커 보인다.

슈왈제네거는 정부 지출을 감축하는 것은 그동안 예산을 방만하게 집행해 온 타성을 타파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1998년 균형 예산 형태로 되돌아가는 것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자신의 정책이 소속 공화당에 대한 충성도 아니고 상대당을 공격하기 위한 것도 아니라고 강조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균형 예산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한다는 식이다.

슈왈제네거의 이같은 밀어붙이기에 대해 이미 공화당과 민주당 모두가 등을 돌리기 시작했고, 주민들마저 세율이 인상된 데 불만을 가지며 지지율이 내려가기 시작했다. 터미네이터의 터미네이션(종식)이 아니냐는 말까지 나돈다. 반면, 가버네이터에 의한 당파 간 당리 싸움에 대한 터미네이션이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정당 간 이익 다툼으로 의회가 무력해진 데 대한 가버네이터의 결단이 조만간 일을 낼지 모른다는 추측도 있다. 슈왈제네거의 뱃심에 대한 칭찬이다. 할리우드 볼의 운명에 대한 추측도 거기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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