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대>의 흥행 조짐이 예사롭지 않다. 개봉 첫 주말(7월24~26일) 박스오피스에서 관객 1백55만명을 동원했다(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 기준). 같은 기간 44만명을 동원한 2위 <해리포터와 혼혈왕자>를 멀찌감치 제쳤다. 개봉 2주차를 맞아서도 흥행세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한국 영화 기대작 <국가대표>가 개봉했음에도 상영관 수는 큰 차이가 없다. <해운대>는 개봉 첫 주 서울 1백59개, 전국 7백5개 상영관을 확보했는데 둘째 주를 맞이해서 서울 1백47개, 전국 6백98개 상영관에서 여전히 관객을 맞이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 반응도 좋아 장기 흥행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해운대>는 블록버스터 재난 영화이다. 순제작비만 해도 1백29억원에 달한다. 제작 규모가 큰 만큼 볼거리를 충실하게 전달했는지에 관객의 관심이 몰리게 마련이다. 부산을 덮치는 대규모 지진해일(메가 쓰나미)을 어떻게 구현했는지에 영화의 성패가 달렸다고 볼 수 있다. 적어도 영화가 공개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막상 뚜껑을 열고 나니 해운대 해변 빌딩들을 무너뜨릴 정도로 거대한 쓰나미에서, 재난에 빠진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드라마로 관심의 초점이 옮아갔다. 할리우드와 국내 기술이 합작해서 내놓은 시각효과에 대한 평가가 나쁘지는 않다. 기술적 완성도가 떨어졌다면 영화에 대한 몰입이 방해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압도적인 볼거리보다 영화 속 인물들이 보여준 삶과 행동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한다. 인간적인 드라마가 관객을 웃고 울리기 때문이다. 신파에 기반한 최루성 이야기 전개가 관객들의 감성을 움직이고 있다. 비중을 보더라도 본격적인 쓰나미는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 20분이 지나고 나서부터이다. 윤제균 감독은 “애초부터 전체 3분의 2에 드라마를 배치할 생각이었다. 재난이 덮쳐오는 나머지 3분의 1도 드라마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보면 된다. 준비 과정에서 재난 영화를 100편 넘게 보았는데 천편일률적으로 재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약-중-강으로 재난을 증폭시키는 전형적인 구성은 예산이 많이 들기도 하고, 거대한 자연재해를 맞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사람들의 삶과 인연에 대해 말하고자 했던 본래 의도에서도 벗어난다”라고 설명했다.
<킹콩을 들다> <국가대표> 등도 웃기고 울려
유독 올해 여름 극장가에서 분투하고 있는 한국 대중 영화를 살펴보면, 제작비 규모에 관계없이 웃음, 눈물, 감동을 한데 버무린 새로운 ‘신파 휴먼스토리’가 주를 이룬다. <해운대>가 그랬고, 7월 초 개봉한 <킹콩을 들다>가 그랬으며, 이번 주부터 <해운대>와 경쟁을 펼치는 <국가대표>가 그렇다. <킹콩을 들다>는 시골 처녀 역사들의 성공 신화를 다루면서 신화를 있게 만든 코치의 죽음을 끼워 넣음으로써 감동을 배가시킨다. <국가대표>는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기 위해 고국에 돌아온 입양아, 약물 복용으로 동료 선수까지 수렁에 몰아넣었던 나이트클럽 웨이터, 할머니와 동생의 생계를 위해 군대를 갈 수 없는 청년 가장 등 약자 입장에서 늘 소외받았던 인물들의 이야기로 눈물을 자아낸다.
이 작품들이 예전의 신파 코드와 다른 점이 있다면 웃음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점에서 멈출 수 없는 눈물을 이끌어내기 위해 슬픈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것이 기존 신파가 보여주었던 방식이라면, 최근의 신파는 웃음과 눈물을 쉴 새 없이 번갈아가며 배치한다. 관객을 웃기고 울리다가 결국에는 눈물을 죽죽 흘리면서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게 하는 감성적인 이야기가 흥행 포인트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해운대>가 집중한 요소 역시 웃음과 눈물의 어울림이다. 이를 위해 영화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서로 다른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쓰나미를 경고하는 해양지질학자 김휘 박사(박중훈 분)와 문화엑스포를 준비하는 국제 이벤트 전문가 이유진(엄정화 분) 커플, 해운대 토박이로 시장에서 일하는 최만식(설경구 분)과 강연희(하지원 분), 해양구조대원 최형식(이민기 분)과 피서를 온 삼수생 김희미(강예원 분) 등 중심이 되는 세 쌍의 면면을 보더라도 이런 의도가 잘 드러난다. 이밖에 재개발을 추진하는 기업가, 재력만 믿고 안하무인인 부잣집 아들, 사고나 치는 동네 한량, 한량 아들의 취직을 위해 구두를 사주는 어머니, 막힌 변기를 뚫는 배관 수리공 등이 등장해 작지만 울림 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할리우드에서 만들어내는 일반적인 재난 영화와 다른 점도 이 부분이다. 할리우드는 거대한 재난의 위력을 구현해내고 이를 극복하는 영웅들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할리우드가 <해운대>를 다시 만든다면 주인공은 김휘 박사가 될 것이 분명하다. 대마도 해저 지반 붕괴로 야기되는 대형 쓰나미가 올 가능성을 예측하고 이에 대한 대비를 주장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투모로우>의 데니스 퀘이드, <볼케이노>의 토미 리 존스, <단테스 피크>의 피어스 브로스넌 등 할리우드 재난 영화의 주인공은 모두 재난 조짐을 먼저 알아챈 과학자이다. 자신을 희생해 생명을 구하는 구조대원 최형식도 할리우드가 좋아할 만한 인물이다. 자신만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연적을 구하기 위해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로 다시 뛰어드는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휘 박사와 최형식은 <해운대>에서 그저 조연 중 하나일 뿐이다.
<해운대> 드라마의 힘을 가장 잘 드러내는 인물은 오히려 동네 양아치 동춘(김인권 분)이다. 감독도 가장 애정을 가지는 캐릭터로 동춘을 꼽았다. 동춘은 영화 말미에 이르기 직전까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물이다. 초등학교 동창생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이나 얻어먹고,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어 얻어터지기나 하고, 면접을 보라는 어머니 말에 면박이나 주는 인물이다.
영웅 아닌 동질감 느끼게 하는 캐릭터
그가 재난의 중심에서 천운으로 살아남는 모습들을 이해 못하는 관객들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동춘이 악한 사람은 아니다. 세상에 좌절하고, 일신의 안위를 위해 나쁜 편에 서더라도 살려고 발버둥치며, 인간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가족의 정을 버리지 않는 그의 모습은 우리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 말미에서 동춘이 보여주는 의외의 모습에 거부감보다는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운대>의 인물들은 빼내는 과정에서 태어났다. 시나리오 단계서부터 수백 커플을 도표로 그려내 하나씩 지워가면서 최종 등장인물을 가려냈다. 마지막 단계에서 빠진 커플 이야기도 있다. 7년 만에 임신을 해서 처음으로 해운대로 휴양을 온 기자 커플이다. 특종 때문에 기자인 남편이 해운대를 떠난 사이 쓰나미가 몰려와 생사의 갈림길에 선 부부 이야기이다. JK필름 이지승 프로듀서는 “드라마를 더욱 풍성하게 해 줄 수 있었겠지만 상영 시간의 한계로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한양대 토목공학과 조용식 교수, 부산소방서 항공대장, 해운대 시장 상인 등과의 인터뷰를 통해 캐릭터와 이야기 구조를 정교화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제 <해운대>는 해외 시장을 노크하고 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중국 등 유럽과 아시아권을 비롯한 24개국에 수출이 확정되었다. 특히 외국 영화 쿼터가 있어 할리우드 영화가 주를 이루는 중국에서 개봉이 확정된 것은 인정할 만한 성과이다.
드라마를 강화한 <해운대>의 한국적 블록버스터 전략이 국내에서의 성공을 넘어 숙명적으로 가야 할 해외 시장에서의 성공을 이루어낼 수 있을지 기대된다.
<해운대>가 성공한 것은 한국 CG업계가 한 단계 도약했음을 의미한다. CG업계는 시각 효과를 앞세운 영화와 함께 성장한다. 뉴질랜드 웨타 스튜디오만 보아도 그렇다. 이 업체는 영화 <반지의 제왕>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면서 할리우드 굴지 CG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한국 CG업계도 시각 효과 비중이 높은 블록버스터와 함께 발전했다. 문제는 대부분이 실패작이었다는 점이다. <청연> <중천> 등은 CG 완성도에서 훌륭하다고 평가되었지만 흥행에서는 참패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연이은 실패는 한국 CG업계가 나래를 펼칠 자리를 점점 좁혀왔다. 이런 상황에서 <해운대>가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해운대>가 거둔 성과는 앞으로 제작될 <로보트 태권브이> 같은 작품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고 있다.
국내 CG 기술은 효율성이 높다. 미국 폴리곤엔터테인먼트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해운대>라는 성과물을 만들어낸 모팩스튜디오의 장성호 대표는 “창의적인 면과 기술적인 면을 절대치로 보면 할리우드 수준과 아직 차이가 있다. 그러나 국내 업체의 강점은 효율성에 있다. 조건 대비 완성도를 뽑아내는 것에는 자신 있다. <해운대> 작업을 통해서 우리 작업 체계의 효율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시스템 인프라 구축이라는 측면에서 뒤지는 것이 아쉽다. 지금까지 쌓아놓은 경험에 인프라까지 따라준다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