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간 벌어진 형제의 경영권 지분 매집 경쟁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8.04 17:5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 싸움에 세 과시…‘쿠데타 진압’으로 끝나

▲ 금호아시아나그룹 본사. ⓒ시사저널 임준선

 

▲ 억측과 오보가 난무한 가운데 박삼구 전 그룹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인 박찬구 전 금호석유화학 회장. ⓒ연합뉴스

금호아시아나그룹이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자금난 탓에 대우건설을 매물로 내놓았다. 게다가 그룹 소유주인 형제 사이에 싸움까지 벌이고 있다. 박삼구 전 회장은 지난 7월28일 금호석유화학 긴급 이사회를 열고 박찬구 전 회장을 대표이사직에서 전격적으로 해임했다.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의 삼남인 박삼구 금호아시아그룹 전 회장과 사남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전 회장 사이에 금호석유화학 경영권을 두고 아귀다툼을 벌인 것이다. 대우건설이 팔리면 금호석유화학은 금호그룹의 지주회사 역할을 맡아야 하는 핵심 계열사가 된다. 재계 8위 기업 집단의 경영권 향배와 관련되다 보니 온갖 억측과 오보가 난무하고 있다. 지난 6월 중순부터 물밑에서 진행된 지분 다툼 과정은 피보다 진한 자본의 냉정한 논리가 관철되는 과정이었다. 박씨 형제의 싸움은 정교한 수식과 치밀한 판단이 어우러진 수 싸움에다 세 과시와 완력이 버무려진 기업 경영권 다툼의 완성판을 만들어냈다.

첫 총성을 울린 이는 박찬구 전 회장이었다. 박찬구 전 회장의 아들인 박준경 금호타이어 부장이 지난 6월15일 주당 2만9천4백원에 금호석유화학의 주식 37만주가량을 장내에서 사들였다. 박찬구 전 회장까지 합세해 7월2일까지 20차례로 나누어 1백63만주가량을 매집했다. 박삼구 전 회장이 동생 일가의 주식 매집을 눈치 채고 맞대응하기 시작한 때는 7월2일이다. 박삼구 전 회장의 아들인 박세창 그룹전략경영본부 상무와 고 박정구 전 금호산업 회장의 아들인 박철완 아시아나항공 부장이 지난 7월2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각각 44만6천주씩 매집했다. 찬구 회장 일가의 1백63만주 매집에 대항하기 위한 조처였다.

박찬구 전 회장 일가는 그 다음 날 반격에 나섰다. 7월3일부터 7월16일까지 12차례에 걸쳐 부자가 번갈아가며 주식 51만5천주를 사들였다. 지분 매집 경쟁으로 비화하자 박찬구 전 회장 일가가 유리했다. 금호산업 지분을 전량 매각해 실탄을 충분히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의결권이 있는 금호석유화학의 주식 약 2천만주 가운데 박 전 회장 일가가 소유한 지분이 4백70만주나 되었다. 지분이 23.67%로 껑충 뛰었다. 박삼구 전 회장 일가는 긴장했다. 이들 부자가 소유한 지분은 15%에 불과했다. 조카 철완씨의 지분 15%와 맏형이자 그룹 전 회장을 지낸 고 박성용씨의 아들 재영씨가 소유한 지분 5.9%를 합치면 36%를 확보하게 된다. 두 조카를 우군으로 둔 덕에 박삼구 전 회장은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박찬구 전 회장 일가가 앞으로 지분 10% 이상을 장내에서 사들이지 않는 한 지분 구도를 뒤집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분 경쟁에는 예상치 않은 돌발 변수가 나올 수 있다. 박삼구 전 회장은 무언가 찜찜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을 듯하다. 지분 매집 경쟁으로는 경영권 단독 탈취가 힘들다는 것을 모를리 없는 동생이 10만주 단위로 주식을 계속 사들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박삼구 전 회장이 간과했던 돌발 변수는 자사주였다. 자사주는 경영권 향방을 좌우하는 결정 변수로 부각되었다. 금호석유화학은 자사주 56만주(의결권 지분 22%)를 보유하고 있다. 자사주가 박삼구 전 회장의 우호지분이라고 보도하는 언론 보도는 오보이다. 자사주는 의결권이 없는 주식이다.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이 벌어지면 자사주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사주가 제3자에게 팔리면 상황은 바뀐다. 제3자가 취득하는 순간 자사주는 의결권을 갖게 된다. 회사 정관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이사회나 대표이사가 자사주를 특정인에게 팔 수 있다. 장내에서도 팔 수 있으나 대표이사나 이사회 재량에 의해 특정인에게 자사주를 배정할 수 있는 것이다.

쫓겨난 박찬구 전 회장, 복귀할 여지는 충분해

박찬구 전 회장이 자사주 22%를 우호 세력에게 판다면 지분 구조는 역전된다. 갖고 있는 주식에 자사주를 합치면 지분이 40.5%나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박삼구 전 회장 부자를 비롯한 친지들의 주식을 합친 지분은 28%로 줄어든다. 금호석유화학 소액 주주가 2만명이 넘는 것을 감안하면, 지분을 40% 갖고 있으면 금호석유화학을 안정적으로 지배할 수 있다. 금호석유화학을 접수하면 금호아시아나그룹 경영권 전체를 장악할 수 있게 된다. 자산 규모 기준 국내 8위 기업 집단이 박씨 공동 소유에서 박찬구 전 회장 단독 소유로 바뀔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았는지 박삼구 전 회장은 지난 7월28일 전격적으로 금호석유화학 이사회를 개최하고 박찬구 전 회장을 대표이사직에서 해임한다. 대표이사직을 유지하고 있으면 유사시 자사주를 자기 우호 세력에게 팔 권한을 보유하게 된다. 박찬구 전 회장의 의중이 무엇인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박삼구 전 회장은 시한폭탄을 발밑에 두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때 금호석유화학을 감사했던 회계법인의 감사팀 관계자는 “대주주 지분 변동과 관련해 공시의무가 있으므로 박삼구 전 회장은 박찬구 전 회장의 주식 매집 사실을 일찌감치 알 수 있었다. 주식 매집을 용인한 것은 자기 우호 지분을 위협하지는 않으리라 판단한 듯하다. 하지만 자사주 제3자 배정 내지 매각이 몰고 올 파장을 간과하다가 뒤늦게 깨달은 듯하다”라고 말했다.

박삼구 전 회장은 2006년 대우건설, 2008년 대한통운을 잇달아 인수해 그룹 규모를 키웠다. 재계 5위까지 성장하겠다는 목표까지 발표했다. 이 탓에 그룹은 자금난에 시달려야 했다. 더 이상 보유했다가는 그룹 존망에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대우건설을 매물로 내놓았다. 하지만 매매 금액이 3조7천억원이나 되어 선뜻 매수 주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탓에 그룹 안팎에서 ‘박삼구 책임론’이 부각되고 있다. 동생인 박찬구 전 회장은 쿠데타의 명분을 얻었다고 판단한 듯하다. 장자 우선이라는 구태의연한 원칙이 박씨 일가에 자리하고 있지만 그룹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신이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조카들에게 알리고자 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65세가 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원칙이 있다. 형인 박삼구 전 회장은 올해 64세이다. 내년에는 그룹 경영권을 동생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동생인 박찬구 전 회장은 자신이 차기 그룹 회장이 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형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이제 35세인 조카 세창이 입사 1년 만에 그룹전략경영본부 상무로 진급하면서 차기 그룹 총수로 부상한 것이다. 형제 세습에서 장자 세습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 들 만하다. 그룹 경영권 세습 양상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 께름칙한 상황에서, 형이 실정으로 인심을 잃자 쿠데타를 감행한 것으로 해석된다.

동생이 대표이사직에서 쫓겨나면서 쿠데타는 18일 만에 진압되었다. 박삼구 전 회장은 그룹 회장에서 물러났다고 하지만 그룹 주요 계열사 세 곳의 대표이사직을 유지하고 있어 그룹 경영권을 장악하고 있다. 하지만 대우건설 매각은 난항에 빠졌고, 자금난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상황 변화에 따라 박찬구 전 회장은 복귀할 여지가 충분하다. 더욱이 그룹 지주회사의 지분 23.7%를 보유한 1대 주주를 무시할 수 없다. 몸을 바짝 엎드린 채 권토중래를 꾀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