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한 미국 뒤통수 친 북한 답답해진 한국
  • 임영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공동대표) ()
  • 승인 2009.08.1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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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 대북 정책, 난기류 맞아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 이행 약속해야

▲ ‘6·15 공동선언 9주년 범국민 실천대회’가 열린 지난 6월14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회 참석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이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 남북 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한다. 이번 방북에 대해 오바마 대통령의 특사가 아닌 개인적 방문이다, 여기자 석방을 위해 간 것이라고 토를 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북·미 간, 남·북 간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데는 크게 이견이 없어 보인다. 이른바 보수 언론들도 이를 인정하는 분위기이다. 1년 반 가까이 남북이 서로 등지고 살아왔고, 급기야 대북 인도 지원 사업마저 중단되었던 사정이고 보면 매우 다행스럽고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뒷맛이 썩 개운치는 않다. 우선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남의 덕을 보는 모양이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의 대북 정책이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또 하나는 이번 방북이 그간 우리 정부로부터 자주 들어오던 미국의 입장과는 일치하지 않는 양상이고 그것도 갑작스럽게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사전에 방북을 통지받았다 하더라도 우리 정부의 입장은 곤란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대북 문제와 관련해 미국과의 공조를 강조했던 우리 정부의 태도가 짝사랑이라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앞으로 열릴 국회도 걱정이다. 이번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우리 정부가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를 두고 여야 간에 한바탕 시끄러울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갑작스런 미국의 태도 변화는 정부에 부담스러운 일

지난 10년을 좌파 시절로 규정하고 ‘비핵 개방 3000’을 최고의 대북 전략으로 내세워온 현 정부로서는 갑작스런 미국의 태도 변화와 한반도 정세의 급변 조짐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일종의 트레이드마크가 아니었던가. 또한, 대북 문제에 대한 지지 기반의 인식과 태도도 고려해야 하는 처지이고 보면 대북 정책에서 변화를 모색하는 것은 그리 간단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정부의 처지를 고려하면 지난 8월4일자 조선일보의 사설은 눈여겨볼 만한 내용이다. 조선일보가 대표적인 보수 신문으로, 또 대북 문제에 대해 매우 완고한 입장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터인 만큼 현 정부의 지지자들에게 크게 거부감이 없을 듯해서 인용해 본다.

“솔직하게 말하면 클린턴 방북 소식을 접하고 많은 사람은 당혹스럽고, 미국에 배신감까지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일은 국제 정치를 움직이는 동력(動力)이 오직 자국의 이익 추구일 뿐이라는 현실을 다시 일깨워주는 사례일 뿐이다. … 클린턴의 방북은 유엔을 통한 대북 제재가 갖고 있는 효용의 한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북핵처럼 우리 운명이 걸린 문제에서 유엔의 권능에 대해 환상을 갖는 것은 금물이다. 중국이 있는 한 대북 봉쇄도 소용없고, 그렇다고 전쟁으로 북한을 굴복시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하나 더 인용해 본다. 독일 통일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동방정책’의 설계자로서 빌리 브란트 전 서독 총리의 비서실장과 국가안보 고문을 지낸 에곤 바가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이 터지고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직후인 1963년에 행한 연설이다. 이 연설은 ‘동방정책’의 구상이 처음 밝혀졌다는 데 의의가 있으며, 당시 에곤 바는 서베를린 시의 대변인이었고 그때 시장은 독일 통일에 토대를 놓은 빌리 브란트였다.

“정권 전복을 직접적인 목표로 하는 어떤 정책에도 희망을 걸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결론은 우리의 감정에 반하는 매우 고통스럽고 불편한 것이지만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 얘기는 오직 체제 내부로부터의 변화만이 그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제적인 곤란을 야기해서 체제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입니다. 베를린 장벽을 두고 공산 정권이 불안감과 체제 유지에 대한 절박함을 나타내는 신호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문제는 공산 정권이 그러한 불안감에서 벗어나, 변화에 대한 위험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국경 감시와 장벽을 완화함으로써 점진적으로 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접촉을 통한 변화’라는 정책입니다.”

이 두 가지 인용문을 참고해 본다면 현 정부가 대북 정책에서 어떤 변화를 꾀해야 하는지는 자명해 보인다. 물론 쉬울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국가 정책이 대통령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은 망설이며 머뭇거릴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칫 한반도 문제 해결에서 구경꾼이 되어 귀동냥이나 하는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강경 천명했던 미국, 대북 인도 지원은 계속

무슨 일이든 해법은 있기 마련이다. 한 가지 해법을 클린턴의 깜짝 방북을 기획·연출한 미국이 이미 제시했다. 미국은 대북 강경책을 고수하면서도 대북 인도 지원 사업만큼은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공개적으로 밝혔고, 실제 실천하고 있다. 지난 3월, 북한이 미국에게 식량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통보했을 때도 미국 국무부 산하 국제개발처는 미국의 민간 단체들과 공동으로 진행해 오던 4백만 달러 규모의 병원 및 의료 장비 지원 사업을 중단하지 않을 것임을 밝혔다. 실제 미국의 한 민간 단체가 5월24일부터 10일간 북한을 방문해서 국립결핵표준검사소의 개조 사업 준비 상황을 최종 점검하고 결핵약을 포함한 각종 의약품과 의료 장비를 북한에 전달했다. 5월25일은 북핵 실험이 있었던 날이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달랐다. 북측이 개성공단의 직원을 억류하고 핵실험을 한 이후 우리 정부는 민간 단체가 북쪽에 지원 물자를 보내는 것을 선별적으로 허용하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모두 불허했다. 민간 단체의 방북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지난 7월28일에야 현인택 통일부장관이 북한 이탈 주민의 취업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최소한의 인도적 지원에 한해서’라는 단서를 달아 대북 인도 지원 재개 의사를 밝혔고, 지난 8월3일 비로소 정부는 10개 민간 단체들의 대북 인도지원 사업에 남북교류협력기금 35억여 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같은 날 56개 대북 인도 지원 단체 모임인 대북협력민간단체협의회는 정부의 선별적 지원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수용을 유보하기로 해 빛이 바래고 말았다.

오는 8월15일 이명박 대통령의 경축사에 세간의 관심이 쏠리는 모양이다. 대북 정책에 대해 획기적인 전환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높다. 한 가지만 권하고 싶다. 지난 10년 동안 정부가 공식적으로 추진해 온 대북 정책이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한 순간에 휴지 조각이 된다면 남북 간의 신뢰는 파탄이며 민족에게는 또다시 불행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경축사에서 6·15 공동선언과 10·4 선언의 실천을 확약해 주기를 바란다. 6·15 공동선언과 10·4선언은 고속도로를 놓은 것과 같다. 그 길을 달릴 수 있는 기회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주어졌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이 통일 경제의 초석을 놓은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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