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문제 주도권 미·북 손에 넘어가나
  •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
  • 승인 2009.08.10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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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전향적인 대북 정책 내놓을 가능성 커 이명박 정부의 대북 실용주의도 시험대에 오를 듯

▲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 함께 북한을 떠나 미국에 도착한 북한 억류 여기자 로라 링(왼쪽 두 번째)과 유나 리(오른쪽 두 번째). ⓒAP


빌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만났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한반도 위기 정세가 대화 국면으로 전환되는 전기가 마련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미국은 클린턴의 방북에 대해 여기자 석방을 위한 제한적 목적의 개인 방북으로 그 의미를 축소하고 있지만, 방북 인물의 비중으로 볼 때 단순한 ‘개인 활동’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클린턴 전 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 1999년 가을 페리 프로세스, 2000년 10월 북·미 공동 코뮈니케를 만든 장본인으로 북한 문제 해결에 적극성을 보였던 지도자이다. 아쉽게도 임기 말 평양 방문이 이루어지지 못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밑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재임 8년 동안 원점에서 다시 북핵 해결을 시도했지만 북한의 강한 반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숙제를 다시 민주당 오바마 행정부로 넘겼다.

북핵 문제 해결의 실무 책임자가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부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라는 점에서 이번 클린턴의 방북을 단순하게 보아 넘길 수 없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북·미 관계 정상화, 경제·에너지 지원,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등을 포함하는 ‘포괄적 패키지’를 제안한 시점에 클린턴-김정일 면담이 이루어졌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북한 매체들이 두 사람 간에 “공동 관심사로 되는 문제들에 대하여 폭넓은 의견 교환이 진행되었다”라고 주장한 점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조미 대결의 근본 문제와 관련된 좀더 폭넓은 의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라고 주장한 점 등에 비추어볼 때 클린턴의 방북은 북·미 간에 국면 전환의 새로운 전기가 될 가능성이 크다. 향후 미국의 전향적인 대북 정책이 나올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북한의 로켓 발사와 핵실험에 대한 유엔 차원의 대북 제재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미국이 자국민 구출을 서두름으로써 동맹국들의 반발을 초래할 수 있다. 때문에 미국 당국자들은 일단 클린턴 방북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클린턴의 방북이 이루어지는 동안 하와이에서 한·미 6자회담 수석대표 회동이 있었던 것도 한국 정부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나름의 조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재임 중 북한 문제 해결에 적극적

북한은 여기자 석방을 대내외적으로 십분 활용했다. 북한은 한국 전쟁의 주된 교전 상대국이자 ‘철천지 원수’라던 유일 초강대국의 전직 대통령을 ‘혁명의 수도’ 평양으로 불러들여 그들의 영도자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김정일 위원장의 리더십을 강화하는 데 활용하고 있다. 북한 국내법을 위반한 미국 언론인을 김위원장이 특사를 실시해 풀어줌으로써 국제 사회에서의 ‘불량 국가’ 이미지를 바꾸는 데도 활용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클린턴-김정일 면담을 통해서 건강 이상설을 잠재우고, 김위원장이 북한의 국정을 확고히 틀어쥐고 권력을 정상적으로 행사하고 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과시했다는 점이다. 김정일의 건강 이상을 급변 사태와 연결하면서 대북 강경 노선을 견지하고 있는 한국과 일본을 압박하겠다는 의도에서 클린턴-김정일 면담을 극적으로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오바마 행정부 출범 이후 강경 대치하는 치킨 게임을 해 왔던 북한과 미국이 여기자 석방을 계기로 대결에서 대화로 국면을 전환하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북핵 실험 이후 국제 사회의 제재와 압박이 본격화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하지 않는 한 북·미 직접 대화가 곧바로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5일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고 도발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길이라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NBC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북한에 관계 개선의 길이 있음을 말해 왔다. 더 이상 핵무기들을 개발하지 않고, 도발적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이 그것에 포함된다”라고 말했다. 미국 국무부는 5일 억류 여기자를 석방하기 위한 클린턴 전 대통령의 북한 방문과 핵폐기 협상은 별개의 사안이라면서 북한이 핵합의를 이행하고 협상에 복귀할지는 더 지켜보아야만 한다고 밝혔다. 로버트 우드 국무부 부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에서 “이번 방북과 관련해 시작될 때부터 핵협상과는 분리된 개인 차원의 인도주의적인 활동이라는 점을 매우 분명하게 밝혀왔다. 두 사안은 전혀 연계성이 없다”라고 말했다. 우드 부대변인은 “북한은 2005년 9월 공동 합의에 명시된 목표를 이행하기 위한 협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면서 6자회담에 복귀하겠다고 다짐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지금까지 북핵 문제 해결의 원칙론만 제시하고 포괄적 패키지의 구체적 내용을 내놓지 않는 것은 북핵 문제 해결의 역진을 반복하지 않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불가역적인 북핵 해법을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된 해법을 마련하겠다는 것이 오바마 행정부의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

북·미는 풀리는데 남북은 교착 국면

북한 핵실험의 낙진이 어느 정도 가라앉고 제재와 압박의 효과가 본격적으로 나타날 때쯤 북·미 간에 큰 틀의 북핵 협상이 시작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될 경우 한반도 문제의 주도권은 다시 북·미 구도로 넘어갈 것이다. 남북 갈등이 지속될 경우 북한이 핵보유의 동기를 남북 관계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우리 정부는 인식하고 북핵 포괄 협상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여기자 억류 이후 미국은 북한의 로켓 발사와 핵실험 등에도 불구하고 석방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해서 석방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1백30여 일 동안 북한에 억류된 현대아산 근로자 유 아무개씨를 접견조차 하지 못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7월30일 연안호가 나포된 지 1주일이 지났지만 선원들이 석방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북·미 관계 진전 조짐과는 대조적으로 남북 관계는 교착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미 관계 진전을 위해서는 한국 정부의 협조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북한이 현재보다 상황을 악화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남한 정부가 진정성을 가지고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전향적인 대북 정책을 제시하지 않는 한 기존의 대남 강경 입장을 고수할 것이다. 북한은 ‘통미봉남’에 따른 한국 정부의 소외 문제를 부각시켜 남측 정부를 압박하려 할 것이다.

대외 관계는 절대 도덕주의로만 풀 수는 없다. 클린턴 방북 이후 사과 여부 등을 둘러싸고 북한과 미국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것도 모호한 합의를 자국에 유리한 쪽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협상에 성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늦더라도 개의치 않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계속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대북 실용주의 접근을 새롭게 시도할 것인지, 그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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