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 제3자에 맡겨라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08.2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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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조정센터, 조정 제도 개선해 소송 건수 감소 기대

ⓒ연합뉴스

한화그룹이 최근 산업은행과 자산관리공사(캠코)를 상대로 법적 절차에 들어갔다. 대우조선해양 인수 실패에 따른 이행보증금 3천억원을 되돌려받겠다는 취지이다. 눈에 띄는 사실은 민사 소송이 아니라 조정을 택했다는 점이다. 통상적으로 기업이나 기관끼리의 분쟁은 소송에 의지하는 것이 보통이다. 분쟁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의견 또한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조정신청서를 낸 한화그룹과 산업은행 역시 현재 주장이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다.

한화그룹의 경우 ‘우선 협상자에 선정되고도 실사조차 하지 못했다’라면서 책임을 산업은행에 떠넘겼다. 산업은행은 ‘한화그룹이 현실성 없는 자금 조달로 매각이 무산되었다’라고 맞섰다. 그런 양측이 소송이 아닌 조정을 택하면서 그 배경에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함윤식 대법원 사법정책실 민사심의관 판사는 “선진국의 경우 소송보다는 조정 제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조정 제도는 일반 소송 인지대의 5분의 1 가격으로 신속하게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조정 신청 건수가 전체 소송의 절반에 달하고 있다. 지난 2008년 기준으로 소송은 77만7천59건, 조정은 38만5천6백26건을 기록했다. 미국 역시 연방 사건 분쟁의 1.5%만이 최종 재판에 도달한다. 나머지는 조정이나 중재 등의 방법으로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는 지난 2007년 민사소송 접수 건수가 1백31만1천1백51건으로, 조정 건수(1만1천4백11건)보다 1백15배나 많다. 우리 국민이 그만큼 소송을 남발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다. 함판사는 “우리나라는 갈등과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합의보다 상대방을 제압하려는 경향이 있다.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한 성리학 사상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의미 없는 소송이 남발되는 경우가 많다. 조정 제도는 제3자가 화해적 해결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소송과는 다른 장점이 있다”라고 말했다.

특히 우리 사회가 최근 급속히 발전하면서 분쟁 유형도 다양해지고 있다. 분쟁의 해결 방식 또한 다변화되었다. 원고와 피고라는 일대일 대립 구조에 기초한 현재의 소송 제도로 한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 아니면 ‘도’ 식의 판단으로는 분쟁이 해결되어도 또 다른 분쟁을 낳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조정 제도는 경험이 풍부한 조정위원이 중재자로 나선다는 점에서 소송과 차별화되고 있다. 양측의 여러 가지 사정을 고려해 배상 액수와 지급 기한 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최근 한화그룹과 산업은행이 소송이 아닌 조정을 택한 것도 이같은 이유로 풀이되고 있다.

경험 풍부한 조정위원, 권한도 조정 담당 판사와 동등

특히 지난 4월 출범한 법원조정센터는 기존의 조정 제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기존 조정제에서는 민간인 출신의 조정위원회는 판사의 보조적 성격에 불과했다. 조정 업무가 있을 때만 소집되어 판사를 돕게 된다. 하지만 새로 생긴 조정센터는 민간인이지만 조정위원이 조정 담당 판사와 동일한 권한을 갖는다.

상임 조정위원은 단독으로, 혹은 조정위원회를 구성해 문제를 해결한다. 조정이 성립되면 확정 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발생한다. 이를 위해 대법원은 15년 이상 판사 및 검사 경력이 있는 법조계 원로 11명(서울센터 8명, 부산센터 3명)을 상임 조정위원으로 위촉했다.

서울과 부산의 조정센터는 박준서 전 대법관과 조무제 전 대법관이 센터장을 맡았다. 나머지 조정위원들도 법원장, 사법연수원장, 부장검사 등 법조계 원로들로 구성되어 있다. 때문에 미세하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조정 신청 건수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조정 신청 내용 또한 수십만 원짜리 분쟁에서부터 수천억 원에 이르는 대형 사건까지 다양하다.

최근 발생한 아역 탤런트와 한 식품회사의 손해배상 청구 사건이 대표적인 예이다. 내용은 이렇다. 아역 탤런트 출신인 김 아무개군(15)은 최근 ㄱ사 라면을 먹다가 깜짝 놀랐다. 라면 안에 벌레가 있었던 것이다. 김군은 정신적 충격으로 10개월간 치료를 받았다. 이후 그는 식품회사를 상대로 5백만원의 치료비 및 위자료 지급 조정 신청을 제기했다.

물론 조정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회사측은 벌레 등 이물질 존재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김군의 정신과 치료가 벌레에 따른 것인지도 증명할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제3자인 조정위원이 나섰다. 회사의 경우 현행법상 책임이 없다고 하기 힘든 점, 소송이 길어질 경우 언론에 보도될 수 있다는 점을 조언했다. 김군에게는 입증의 어려움과 함께 소송 장기화에 따른 정신적·물질적 손해를 조언했다. 결국, 양측은 위로금으로 3백만원을 지급하는 선에서 합의했다. 

박준서 서울법원 조정센터 센터장은 “우리나라는 삼세 번 문화가 강하다. 때문에 대법원까지 가는 소송을 하다 보면 양측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특히 친척 등 혈연 관계일수록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 조정 제도는 화해를 통해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라고 조언했다.


ⓒ시사저널 우태윤
박준서 서울법원 조정센터 센터장 인터뷰

대법관 출신인 박준서 서울법원 조정센터 센터장(사진)은 요즘 세태에 대해 한숨부터 내쉰다. 화해나 협력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기보다는 분쟁만이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비단 소송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최근 발생한 쌍용차 사태가 그랬고, 미디어법을 둘러싼 여야의 대치가 그랬다. 박센터장은 화해·협력을 통한 갈등 해결 방법을 배우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설명한다.

지난 4월 서울과 부산에 법원조정센터가 출범했다.

아직은 시작 단계이다. 조정 신청 건수가 서서히 늘어나고는 있지만, 홍보가 부족하다. 우리 국민은 소송을 지나치게 남용하는 것 같다. 인구 대비 소송 비율이 일본에 비해 20배나 많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원조정센터의 출범은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법조계에서 15년 이상 종사한 원로 법조인이 중재해서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분쟁을 원인부터 해결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소송이 일본 등에 비해 많은 이유는?

선진국의 경우 조정을 해서 안 되면 소송을 제기한다. 우리나라는 일단 소송부터 걸고 본다. 일에도 순서가 있다. 자연 분만을 시도하다가 안 되면 수술을 해도 늦지 않다. 하지만 요즘은 시도도 안 해보고 수술을 한다. 소송은 최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 전반에도 반목이 커지고 있다.

맞는 말이다. 최근 발생한 쌍용차 사태를 보자. 막판에 극적 합의를 이루기는 했지만 늦었다. 손해가 크다. 노사가 처음부터 양보하는 자세를 가졌다면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을 것이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미디어법을 두고 여야가 극심한 갈등을 보였다. 우리 사회가 화해와 합의를 통해 양보하는 기술을 배워야 한다.

향후 계획은?

상임 조정위원 제도를 최대한 빨리 정착시키는 것이 목표이다. 그동안 조정 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화적인 원인과 법조계의 조정 제도 외면으로 자리를 잡지 못했다. 상임 조정위원 제도는 민간인이 조정위원이고, 법원 판결과 같은 효력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정착되면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현재는 서울과 부산에만 조정센터가 마련되어 있다. 내년에는 대전과 대구, 광주로 조정센터를 확대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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