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한국 현대사 인생에 고스란히
  • 정락인 (freedom@sisapress.com)
  • 승인 2009.08.25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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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전 대통령, 출생에서 서거까지 / 사형 선고→망명→민주화 투쟁 등 큰 족적 남겨

▲ 1970년대 초 서울 동교동 자택에 모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족들의 단란한 모습. ⓒ연합뉴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거기에는 수많은 사건과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삶에는 또 인생의 ‘희(喜)·로(怒)·애(哀)·락(樂)’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 인간의 굴곡 많은 삶과 위대한 지도자의 파란만장한 영욕의 세월이 그대로 묻어난다. 그는 모든 것을 털고 갔다. 갈등도 치유하고, 용서하고 화해했다. 한때 그를 죽이려고 했던 정적도, 그와 등을 대고 날을 세웠던 동지와도 손을 맞잡았다. 김 전 대통령은 이제 ‘민주화의 상징’에서 ‘화해와 평화의 상징’으로 승화되었다. 그는 대한민국의 ‘행복한 대통령’이 되었다.

 

▲ 1971년 신민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유세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고 김운식 옹·고 장수금 여사의 차남으로 출생 (1924년 1월6일)

▲ 1962년 5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와 재혼했다. ⓒ연합뉴스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24년 1월6일 일본인 지주의 소작농이던 아버지 고 김운식 옹과 어머니 고 장수금 여사 사이에서 4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 전 대통령이 태어난 하의도는 목포에서 34km나 떨어진 서남쪽 끝에 위치한 섬이다. 그는 여기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 3학년까지 다니다 목포 북교 공립소학교로 전학했다. 하의도 보통학교는 4년제였기 때문에 상급 학교 진학이 안 되었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의 부모는 하의도의 집과 농토를 모두 처분하고 목포로 이주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머리가 명석해 목포 북교 소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5년제인 목포상업학교(현 전남제일고)에도 수석으로 입학했다.

▒ 차용애 여사와 결혼 후 사별 (1946년 4월~1960년)

김 전 대통령은 목포상고를 졸업한 후 해운회사인 목포상선에 취업한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였다. 김 전 대통령은 이곳에서 첫 번째 부인인 고 차용애 여사를 만났다. 차여사는 목포상고 동창생의 여동생이었고, 김 전 대통령은 첫눈에 반했다. 그 후 끝없는 구애를 통해 결혼에 골인했고, 김홍일·홍업 두 아들을 두었다. 하지만 민의원 선거에서의 잇단 실패와 부정 선거 등의 영향이었던지 차여사와 사별하게 된다. 결혼 생활이 채 10년이 안 된 때였다.

▒ 정치적 스승 ‘장면 박사’를 만나다 (1956년 10월)

‘정치인 김대중’을 만든 인물은 고 장면 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장면 박사는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스승이자 천주교의 대부이기도 하다. 1956년 10월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민주당 부통령 후보이던 장면 박사의 권유로 민주당에 입당한다. 다음 해에는 장박사의 권유로 천주교에 입문하기도 했다. 4·19 혁명으로 집권한 장면 총리는 민의원 선거에 연거푸 낙선한 김 전 대통령을 여당인 민주당의 대변인으로 지명하는 등 정치적인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 1987년 7월1일 김영삼 민주당 총재와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이 당사 입주식에서 축하 테이프 커팅을 한 후 당원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 평생의 반려자 ‘이희호 여사’와 재혼 (1962년 5월)

1962년 5월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희호 여사와 재혼한다. 김 전 대통령과 이여사의 ‘러브스토리’는 각별하다. 두 사람은 1951년 부산 피난 시절에 처음 만났다. 당시 이여사는 대한여자청년단 외교국장을 맡고 있었는데, 한 독서 클럽에 나가면서 김 전 대통령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김 전 대통령은 유부남이었고, 이여사는 미혼이었다. 그러다가 1961년 이여사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YWCA연합회 총무를 맡고 있을 때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 사이 김 전 대통령은 첫째 부인인 차용애 여사와 사별한 뒤였다.

두 사람은 결혼한 후 평생의 반려자이면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던 이여사는 김 전 대통령을 만나면서 ‘고난의 인생길’로 접어든다. 1971년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한 후 망명·구금·투옥 등의 가시밭길을 함께 해쳐왔다. 남편이 구속되었을 때는 석방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당시 이여사는 수감 중인 남편에게 차입하는 옷은 속옷까지도 다려 넣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김 전 대통령에게 이여사는 언제나 ‘존경하는 당신’이었다. 김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 사이에는 삼남인 홍걸씨를 두었다.

▒ 제7대 대선 출마, 박정희 대통령과 대결 (1971년 4월)

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맞대결을 펼쳤다. 개표는 처음부터 박정희 후보의 우세로 발표되었고, 결국 약 95만표 차이로 김 전 대통령이 패배했다. 당시 관권 선거·부정 선거가 판을 치던 때인 것을 감안하면 김 전 대통령으로서는 이기고도 진 게임이었다. 그 뒤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의 집중 견제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이희호 여사는 당시 상황에 대해 “개표가 완료되기 전 남편 선거를 도왔던 사람들이 하나 둘 육군 보안사령부 특별취조본부에 연행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은 그림자의 미행과 도청이 따라다녔고, 음모와 술수·연금과 구금 등으로 끊임없이 괴로움을 당했다”라고 회상했다.

▒ 전두환 전 대통령과 악연, 사형 선고 (1980년 9월)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사이에는 질긴 악연이 있다. 12·12 군사 반란으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 세력은 1980년 5월17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보안사로 연행한 후 ‘내란음모죄’와 ‘반국가수괴죄’로 사형을 구형했다. 김 전 대통령을 네 번째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국제 사회의 반발로 사형 집행이 어렵게 되자 급기야 미국으로 강제 추방한다.

▒ 미국 망명 시절 미국 저명 인사들과 교류 (1982년 12월~1985년 2월)

1982년 12월23일 김 전 대통령과 가족은 미국 비행기에 올랐다.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 등 미국의 정계·학계·종교계 등 각계 각층의 유명 인사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 국가가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에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망명 시절에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당한 필리핀 야당 지도자 아키노 상원의원을 만나 교류하기도 했다.

▲ 2003년 2월25일 노무현 16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식장을 떠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 김영삼 전 대통령과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취임 (1985년 3월)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민주화의 동지’이자 경쟁자였다. 1983년 5월 서울에서 당시 신민당 총재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 투쟁에 들어가자 워싱턴·뉴욕 등지에서 지원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1985년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야권 통합을 합의하고 민추협 공동의장직을 맡았고, 1987년 8월 통일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했다. 하지만 1987년 제13대 대선을 앞두고 야권 후보 단일화에 실패하면서 두 사람은 ‘물과 기름’처럼 갈라섰다. 이후 최근까지 ‘동지’가 아니라 ‘적’이 되다시피 했다.

▒ 김대중·김종필(DJP) 연합 (1997년 10월)

지난 1997년 10월27일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JP)와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총재(DJ)가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다. 이른바 ‘DJP 연합’이다. 호남과 충청 지역을 대표하는 두 정치인이 손을 맞잡았다. 김종필 총재는 단일화 조건으로 ‘내각제 개헌’을 내걸었다. 김 전 대통령이 이를 수락하면서 연합에 성공하고 대권까지 거머쥘 수 있었다. 하지만 정권을 창출한 후 ‘내각제 개헌’이 수포로 돌아가자 DJP 연합도 깨지고 만다.

▒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정상회담 (2000년 6월)

2000년 6월13일은 역사적인 날이다. 남한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최초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2박3일간 진행된 남북 정상회담에서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 남북 스포츠 교류가 본격화되면서 남북한이 평화 공존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증진시킨 공로로 그해 12월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는 ‘아시아의 만델라’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 흑인 인권운동을 펼치다 27년간 복역한 후 극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만델라와 인생 역경이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지난 1997년 대선 때 만델라는 감옥에서 27년간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김 전 대통령에게 선물로 보내오며 당선을 기원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에 김 전 대통령은 20년간 들고 다니던 가방을 답례로 선물했다고 한다. 만델라는 1995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직 이양 (2003년 2월)

지난 1997년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 김 전 대통령은 5년 뒤인 2002년 후계자라고 할 수 있는 노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김 전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다. 전생에 노대통령과 나는 형제간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라며 비통해했다. 노 전 대통령은 김구 선생, 미국의 링컨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다. 두 분은 어쩌면 전생의 형제였을지도 모른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김 전 대통령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87일 만에 노 전 대통령의 곁으로 가게 되었다.

▲ (왼쪽부터)1980년 내란음모죄 관련 재판을 받는 모습. 1981년 김 전 대통령 옥중 가족 면회 사진. 1982년 미국 망명 시절의 가족 사진. ⓒ연합뉴스

 

▲ (왼쪽부터)1996년 국민회의-자민련 합동 송년회.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역사적 만남. 2001년 청와대에서 만델라 전 대통령과의 회동.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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