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총수 행보 현대는 잰걸음 삼성은 소걸음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09.01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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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선 부회장 “수업 끝”…이재용 전무 “좀 더”

▲ 기아차 미국 공장 조인식에서 악수하는 정의선 부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현대·기아차그룹 차기 총수’ 정의선씨(39)가 지난 8월21일 현대차 기획·영업 담당 부회장에 올랐다. 현대·기아차그룹 총수 자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선 것이다.

명목상으로는 기아차 사장으로 있을 때 ‘디자인 기아’를 제창하며 기아차의 디자인 혁신과 실적 향상을 치하한 포상 승진이나, 실질적으로는 현대·기아차그룹이 순항하고 있을 때 차기 총수 승계 작업을 앞당기자는 의도가 엿보인다. 전세계 자동차업체가 흔들리는 와중에 현대차와 기아차는 승승장구한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분위기도 좋고 정부회장이 기아차 최고 경영진으로서 경영 능력을 입증했다는 그럴듯한 명분도 생겼으니 그동안 외국인 주주나 여론의 눈치를 보느라 늦추던 ‘태자’ 책봉을 이참에 마무리한 것이다.

현대·기아차 잘나갈 때 ‘태자’ 책봉 마무리

정부회장은 이제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MK) 옆에서 그룹 핵심 계열사인 현대차 경영을 보좌하며 차기 총수직에 오를 기반을 닦을 것으로 점쳐진다. 현대·기아차그룹 내부에서 정부회장에게 더 이상 ‘경영 수업’이라는 수사를 붙이지 않는다. 김익환 전 기아차 부회장이 한때 정부회장 교육을 담당한 적이 있었으나 이제 정부회장 교육을 맡은 이는 없다. 현대·기아차그룹 관계자는 “정부회장은 이제 개인 교수에게 경영 수업을 받을 단계를 넘어섰다. 최고 경영자 신분으로서 회사 시스템 안에서 실무자와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차기 총수에 필요한 경험을 쌓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의선 체제’가 가동되면, 정부회장을 뒷받침할 인사로 눈에 띄는 인물들은 주로 ‘진골’ 출신들이다. 정부회장과 친인척 관계인 정씨 일가 3세 경영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계열사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정부회장과 연배가 비슷한 3세 경영인들은 정부회장만은 못해도 주요 계열사 핵심 부서를 돌며 경영 수업을 받아왔다. 이들이 정의선 체제의 친위대 구실을 하리라는 추측이 나온다. 그 대표적 인물이 MK의 셋째 사위이자 정부회장의 매형인 신성재 현대하이스코 대표이사 사장(42)이다. 신부회장은 자동차 주요 소재인 냉연강판을 생산하는 현대하이스코를 이끌고 있다. 이 회사는 현대차그룹에서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부회장은 한보철강 인수 작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MK 둘째 사위인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사장(49)은 현대차그룹 금융부문을 맡고 있다.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 경영대학원 슬론스쿨을 졸업하고, 1987년 현대종합상사에 입사했다. 현대정공 기획·관리·재정 담당 전무와 현대·기아차 구매총괄본부 부본부장을 지냈다.

정태영 부회장은 종로학원 정경진 회장의 맏아들로 가업을 이어받아 학원 사업 경영도 부업으로 겸하고 있다. 정부회장의 사촌인 정일선 BNG스틸 대표이사(39)는 법정관리 기업이었던 삼미특수강을 인수해 경영을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업무 추진력을 보여주었다. 또, 정회장의 맏딸 정성이씨는 종합광고대행사 이노션의 대주주이면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이들 친인척 인사와 달리 전문경영인 가운데 정의선 체제를 뒷받침할 만한 인사로 주목되는 이는 아직 없다. 정부회장이 현대차로 옮기면서 기아차에서 데려온 인사도 없다. 기아차 사장으로 있을 때 정부회장이 인선한 고위 임원은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 총괄 부사장밖에 없다. 정부회장의 측근으로 거론되는 인사가 없는 것은 MK가 지독하게 측근이라는 개념을 싫어한 탓이다. MK는 과거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 주위에 포진한 가신들 때문에 많은 고초를 겪었다. MK는 측근이 생기기 전에 파격 인사를 자주 벌여 가신이 생길 여지를 만들지 않는다. 이 탓에 정부회장의 경우에도 측근으로 분류할 만한 인물이 아직 부각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정부회장은 차기 총수로서 포스트 MK 체제를 준비하고 세계 4위 자동차그룹을 이끌기 위해서는 인재와 지지 세력을 갖추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나흘째를 맞은 8월21일 삼성그룹 이건희 전 회장이 삼성전자 이재용 전무와 국회 빈소를 찾았다. ⓒ주간사진공동취재단

이건희 전 회장과 동행하며 경험·인맥 쌓고 있어

‘삼성의 황태자’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41)는 지금까지 정의선 부회장과 달리 후계 구도 정착에 차질을 빚고 있다. 지난 2007년 삼성전자 전무에 오르면서 COO(최고고객책임자)로서 차기 경영 구도 구축을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다. 비자금 사건 때문에 지난 2008년 2월 피의자 신분으로 수사까지 받으면서 아버지 이건희 전 회장이 일선 경영에서 물러났고, 이전무는 백의종군이라는 명목으로 러시아·인도·브라질 같은 신규 시장 개척에 나섰다. 지난 2월에는 부인 임세령씨와 이혼하면서 온갖 구설에 시달렸다. 차기 체제가 동생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 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니냐는 터무니없는 소문까지 나왔다.

차기 총수로서 이전무의 입지는 명확하다. 이전무는 지금도 미국과 중국 주요 거래선과 회의할 때에는 이윤우 삼성전자 부회장과 함께 참석하고 미국이나 일본 출장에는 최지성 삼성전자 사장과 동반한다. 혼자 미국이나 중국을 돌면서 애플, AT&T, 닌텐도, 소니 최고 경영진과 면담하기도 한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전무는 해외와 국내를 오가며 삼성전자 매출에서 절대치를 차지하는 해외 시장 개척과 기존 거래선 유지에 집중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후계 구도를 암중모색하는 와중에 이전무에게 반가운 소식이 날아왔다. 지난 8월14일 서울고법이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헐값 발행 결심 공판에서 이건희 전 회장의 배임혐의 유죄는 인정했으나 집행유예를 선고한 데 이어 8월27일에는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CB) 헐값 발행 사건에 대해 피고 허태학·박노빈 전 삼성그룹 고위 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경영권 편법 승계와 관련해 지난 13년 동안 이전무를 끈질기게 괴롭혀온 논란이 일단락된 것이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온갖 구설에 상관없이 (삼성의) 차기 후계 구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전무는) DJ 조문을 비롯해 경조사마다 이 전 회장과 어김없이 동행하고 있고 그룹 경영 시스템 안에서 최고 경영진과 현장 실무자와 교류하며 (최고 경영자로서) 경험과 인맥을 쌓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재용 체제를 보좌할 인물로 가장 먼저 꼽히는 이는 최지성 사장(58)이다. 최사장은 그룹 회장 비서실 출신으로 삼성전자 주요 사업부를 거쳤다. 부품이나 반제품은 이윤우 부회장이 맡고 있지만, 완성품은 최사장이 총괄하고 있다. 최사장은 주요 해외 행사에 참석하거나 거래선과 만날 때 이전무와 동행한다. 이인용 홍보담당 부사장은 이전무와 서울대 동양사학과 동문으로 주목되고 있다. 주요 핵심 계열사를 중심으로 일부 인사가 이전무 측근으로 거론되고 있으나 아직 명확하게 부각되는 인물은 눈에 띄지 않는다. 그가 명실상부하게 경영 전면에 나서기 전까지 이재용 체제를 보좌할 인물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삼성그룹이 이전무 행보와 관련한 정보가 회사 밖으로 나가는 것을 철저하게 통제하기 때문이다. 이재용 체제는 지금 수면 아래에서 모양을 갖추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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