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법인화, 밑그림부터 바로 그려라
  • 정준모 | 미술문화정책가·국민대 초빙교수 ()
  • 승인 2009.09.15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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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부, 서비스의 질과 효율성 강화 이유로 추진…“말만 앞세운 밀어붙이기” 등 비판 일어

▲ 경기도 과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시사저널 박은숙

문화체육관광부가 ‘기무사 부지를 활용한 국립미술관 서울관’ 건립을 추진한 것과 관련해서 잡음이 나더니 다시 ‘국립현대미술관의 법인화’ 문제를 밀실에서 추진해 논란이 일고 있다. 행정자치부(약칭 행자부)는 올해 초 ‘국립예술기관 법인화추진단’을 꾸렸고, 문화부는 한국행정학회에 용역을 의뢰한 상태이다. 지금까지 예로 보아 용역을 실시한다는 것은 ‘밀어붙이기’ 위한 사전 조치에 불과하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책임 운영 기관으로 전환된 것은 불과 3년 전인 2006년이다. 그때도 책임 운영 기관의 폐해를 우려하는 이들이 ‘행정형 책임 운영 기관’으로 윤색해서 도입했다. 그때 내세웠던 논리는 예산, 조직, 인력 운영의 자율성을 강화해서 서비스의 질과 효율성을 강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똑같은 이유를 들고 있다.

 3년 전 책임 운영 기관을 도입할 당시 필자는 진정한 개혁과 변화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법인화’로 가자는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관료들은 미술관에 대한 장악력이 떨어질 것이 무서워 검토조차 하지 않았다. ‘법인화’는 미술관이 발전하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이다. 또, 그 필요성에 공감하고 찬성하는 사람도 많다. 필자도 그렇다. 하지만 ‘법인화’의 전제가 되는 조치가 선행되지 않고는 어떤 제도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이라는 이름의 피로감만 남긴 수많은 행정 이벤트를 경험했다. 그것과 달라지려면 30세기의 대한민국 모습을 내다보고 시행착오를 줄이면서 느리지만 탄탄하게 가자는 것이다. 

법인화로 가기 위해서는 법인화의 진정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책임 운영 기관처럼 무늬만 개혁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쉬운 개혁, 문화부 스스로 할 수 있는 가시적인 변화들을 우선 모색해야 한다. 예를 들면, 미술관의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기획운영단의 직제를 축소하고 단장직(문화부 3급)을 폐지하는 것이다. 이는 수십 년간 지적되어왔지만 ‘자리 보전’이 목표인(?) 관료들 때문에 이름만 바뀐 상태로 지금까지 유지되어왔다. 남은 희생시키면서 자신들의 자리는 보전한다면 어떻게 개혁이 가능하겠는가.

법인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문제는 문화부가 법인화의 큰 그림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인화가 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지만 그 말은 이미 ‘책임 운영 기관’으로 전환할 때 들었던 말과 한 글자도 다르지 않다. 미술계에서는 개혁과 변화라는 이름으로 또 한 번 속이려 한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법인화가 최선이라면 법인화 이후의 그림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예를 들면, 대한민국을 다섯 개 권역으로 나누어 권역별로 국립미술관을 설치하고 장르별·시대별로 특화된 미술관을 건립하며, 장기적으로 국립미술관에 연 100억원씩 10년간 1천억원을 투입해서 경제 규모에 걸맞은 국립미술관으로 컬렉션을 강화해나가겠다는 등의 비전 말이다. 또, 장기적으로 부처별로 나뉘어 있는 과학관이나 천문대 같은 과학박물관까지 총괄하는 박물관청을 신설하거나 문화부 산하에 국을 두는 방안 등도 함께 검토되어야 할 사안이다.

편파적 행정에 심리적 반발감도 불러

▲ 2월 2일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에 출석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장관이 의원들의 질의를 듣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또, 만만한(?) 기관만 대상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전면적으로 문화부 산하 모든 국립기관을 동시에 법인화는 하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이다. ‘왜 나만?’ ‘뭘 잘못했기에’ 법인화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심리적인 반발감도 법인화의 큰 걸림돌이다.

 법인화를 내세우면서 현금과 작품의 기증과 기부가 이어질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가정에 불과하다. 유인책이 없기 때문이다. 현재도 국립미술관을 비롯한 국립 기관이 기부금을 확보하는 길은 있다. 지금까지 각 기관들은 사단법인 형태의 후원회를 두고 우회해서 기부나 후원을 받아왔다. 관장 이하 소속원이 기부를 받으려고 하면 얼마든지 길이 있다. 미술관이 안이했기 때문에 기부금을 모으지 못했을 뿐이다. 따라서 법인화를 해야만 기부금이 확대되어 미술관이 활성화될 것이라는 것은 법인화를 위한 명분에 불과하다.   

또, 외국의 사례들을 들어 법인화를 강요하지만 영국이나 미국의 미술박물관(Art Museum)은 출발부터 법인이었다. 프랑스는 중앙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관장한다. 영국과 미국의 법인화가 성공적인 것은 기부금 제도가 활성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양 문화권은 십일조의 전통 때문인지 기부가 일상화되어 있다. 기부금에 대한 세제 혜택이 잘 되어 있어 기부금이 많아지면 비례해서 납세액이 줄어든다. 이렇게 풍토와 토양이, 여건과 환경이 다름에도 외국의 사례만 들어 법인화를 추진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여기에 더해서 고려할 것은 경기가 악화되면 기부금이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경우 이번 경제 위기로 6~7개의 미술관이 폐관하고 대다수 미술관이 계획을 축소하거나 폐지했다.

작품 기증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작품을 현금으로 환산해서 기증에 대해 세제 혜택을 주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만약 이 제도가 도입된다면 법인화가 되지 않더라도 작품 기증이 한층 늘어나게 될 것이다.
 미술관과 문화부 산하 모든 기관이 법인화로 가기 위한 전제는 ‘특별법인’이라야 한다. 왜냐하면 미술관 등은 ‘공공의 복지 또는 공익을 위하거나 국가 중요 시책 및 범국가적으로 일률적이고 광범위하게 운영되어야 하는 특별한 사업’이기 때문이다. 또, 정부가 매년 최소한 85% 이상의 재정을 지원할 것을 법에 명시해야 한다. 국가가 문화 부문의 예산을 축소하려는 수단으로 법인화를 추진하는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예산을 절감하려는 속내를 가졌다면 법인화는 철회되어야 마땅하다.

 국가가 예산 지원을 하지만 기관장과 소속원의 인사권은 제한되어야 한다. 국가는 의결권 없는 대주주의 역할에 그쳐야 한다. 그리고 미술관에 일정 금액 이상을 기부하는 기업이나 개인들을 이사로 선임해서 이들에게 미술관의 인사·재정 등을 위임해야 할 것이다. 권한을 가지는 만큼 철저하게 의무를 부과하는 것이다. 일부 공공 법인에서 아무런 기여와 책임도 없이 권한만 행사하는 이사가 포진해서 거수기 역할을 하는 폐해를 사전에 제거해야 한다.

미술관에서 기업이나 개인으로부터 기부금을 유치했다면 그에 비례해서 특별예산을 지원하는 매칭펀드(matching fund) 방식을 도입하는 것도 법인화를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이외에도 고려하고 고민해야 할 일은 많을 것이다. 한 가지 전제는 국민은 그렇게 미개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정책을 도입해서 개혁과 변화를 시도하려면 그 주체인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추진력’만 믿지 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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