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보는 음악, 그 잔잔한 유혹
  • 정덕현 | 문화평론가 ()
  • 승인 2009.09.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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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TV의 심야 음악 프로그램이 바꾼 자정의 풍경

▲ (왼쪽부터) 유희열의 스케치북, 음악여행 라라라, 김정은의 초콜릿. ⓒ(왼쪽부터) KBS 제공, MBC 제공, SBS 제공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한참 잠자리에 들 시간에 음악 프로그램에 귀 기울이게 될 줄을. 하루 종일 복잡하고 시끄러운 세상에 나가 정신없이 살다 보면, 어느새 귓속 가득히 채워지는 소음과 마음속 가득 담겨지는 조급증이 퇴근 후 서둘러 잠자리를 재촉하는 그 시간, 우리의 귀는 음악 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KBS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 SBS <김정은의 초콜릿>, MBC <음악여행 라라라>가 그 음악의 신세계이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다채로운 음악들과, 낮 동안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귀는 정화되고, 마음은 편안해진다. 가장 고요한 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의 귀는 어쩌면 제대로 음률의 섬세한 결들을 느끼게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정의 풍경을 바꿔버린 듣는 음악 프로그램들의 가치에는 낮은 시청률로는 판단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 그 소리는 낮지만, 그 낮은 소리가 건네는 여운은 깊다.

굳이 이 음악 프로그램들에 ‘듣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까닭은 이 프로그램들이 보여주는 것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 TV 프로그램에서 시각적인 효과를 무시할 것인가. 하지만 이들 듣는 음악 프로그램은 보는 것이 듣는 것을 강화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보는 음악의 시대에 눈앞에 현란하게 펼쳐지는 춤과 퍼포먼스의 향연은 물론 그 자체로 즐거운 것이지만, 한편으로 듣는 음악의 측면을 가리기도 한다. 반면, 이 듣는 음악 프로그램들은 특별한 장식 없이 동일한 무대라는 열려진 공간 위에 오롯이 가수들을 세운다. 주류와 비주류, 댄스가수와 포크가수, 아이돌과 중년의 록커는 이 음악을 중심으로 세우는 무대 위에서는 아무런 차이를 내세우지 않는다.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과 기획형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가 같은 무대에 서서 노래하는 것이 하등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풍경이 되었다.

저녁 시간대, 눈을 즐겁게 하는 아이돌들의 논스톱 클럽 파티에 끼지 못한 많은 가수는 이 늦은 시간으로 속속 들어와 저마다의 음색으로 우리네 가요의 다채로움을 알렸다. 그곳에는 가장 핫한 아이돌 그룹의 음악에서부터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진 중견 가수들의 음악은 물론이고, 완전히 새로운 인디레이블의 독특한 음악 세계까지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려지곤 한다. 중심에서 밀려난 편성 시간은 오히려 소음과 자극으로만 일관되는, 중심의 음악들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을 주었다. 음악 프로그램은 오히려 음악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이 공간은 가수라면 누구나 설 수 있는 열린 공간이 되었다. 눈은 정작 감기는 그 시간, 우리의 귀는 음악으로 온전히 채워지며 그 다양한 맛의 포만감을 느끼게 했다.

이렇게 달라진 자정 풍경의 중심에 서 있는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이소라의 프로포즈>와 <윤도현의 러브레터> 그리고 <이하나의 페퍼민트>의 계보 위에 서 있는 음악 프로그램이다. <이소라의 프로포즈>가 음악을 중심에 세우는 프로그램을 말 그대로 프러포즈했다면, <윤도현의 러브레터>는 좀 더 도발적으로 음지에 있는 음악인들(예를 들면 힙합이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하는 밴드들)을 무대 위로 끌어들였다. <이하나의 페퍼민트>는 이 토양 위에서 주류와 비주류에 대한 편견 자체를 지워버린 상태에서 귀가 즐거운 음악의 향기를 퍼뜨렸고, <유희열의 스케치북>은 마치 토크쇼를 가미한 듯 좀 더 유쾌한 음악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무대와 객석 없애고 ‘귀로 보는’ 프로그램 지향

<김정은의 초콜릿> 역시 <유희열의 스케치북>과 마찬가지의 선상에 있다. 음악성을 중심으로 초대되는 가수들, 소극장 같은 작은 무대가 주는 집중력 같은 것이 그것이다. <유희열의 스케치북>이 유희열이 가진 촌철살인의 말 재주와 특유의 능청스러운 매력을 프로그램의 개성으로 내세웠다면, <김정은의 초콜릿>은 김정은이 가진 ‘만인의 연인’ 이미지를 앞세웠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에는 마치 연인들이 서로 이벤트를 해주는 것 같은 컨셉트가 부가되어 있다. 물론 자정의 듣는 귀를 열어주는 프로그램이지만, 가끔 시각적인 이벤트(라틴 댄스를 춘다거나, 연주를 하는 것 같은)가 감초처럼 등장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음악여행 라라라>는 더 극단적으로 듣는 귀를 중심에 세운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무대를 없애고, 반응을 유도하는 객석도 없앴다는 점이다. 심지어 초기에 프로그램에 세워두었던 ‘라디오스타’ 4인방도 불필요해졌다. 김창완 혼자 MC로 앉아 있지만, 그 존재감은 편안하게 손님들을 맞이할 정도이다. 몇 마디 말하고는 노래를 듣는 식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듣는 노래가 저 녹음실에서 녹음되어 음반으로 만들어져 라디오나 TV의 전파를 타고 우리의 귀까지 들어오는 지난한 과정을 거친다면, 이 프로그램은 그 과정을 녹음실에서 바로 TV로 당겨왔다. 그만큼 생생해졌고 음악은 직접적으로 귀로 파고들었다. TV가 기본적으로 시각을 저버릴 수 없는 매체라고 할 때, <음악여행 라라라>가 보여주는 영상은 ‘귀로 보는’ 어떤 것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음악화’ 되어 있다.

이들 듣는 음악 프로그램의 진정한 가치는 수직적인 음악들의 위계를 버리고, 수평적인 음악의 향연을 펼쳐놓았다는 점이다. 무대는 어떤 가수이든 자신의 음악을 채워 넣을 수 있는 열린 공간으로 기능했고, 그러자 주류와 비주류, 각종 장르와 세대로 구분되던 음악은, 음악이라는 이름 하나로 같은 무대에 세워질 수 있었다. 이 퓨전적 기능은 청각적으로나 시각적으로나 현실 속에 존재하는 차이에 대한 어떤 벽을 없애는 힘을 발휘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이 듣는 음악 프로그램들이 모두 자정의 시간대로 밀려나 있다는 점은 또한 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 프로그램들은 밀려난 곳에서 자신들의 그 위치를 역발상으로 돋보이게 했지만, 그것이 말해주는 것은 여전한 음악 프로그램들의 볼거리 편향일 것이다. 따라서 이 편향 없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듣는 음악 프로그램들의 낮은 시청률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좀 더 많은 사람이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시간대를 찾아가는 것은 그 프로그램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네 가요계 전체의 편향을 없앤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래서일까. 이들 듣는 음악 프로그램들이 대중들에게 내미는 손길은 더 간절하고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 자정으로 밀려난 프로그램들이 그 자리에서 오히려 ‘대중들과 좀 더 가까이’ 다가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이 소통과 공감에 대한 갈증은 이들 프로그램들이 빛을 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집단적인 놀이로서 음악에 참여하던 시대는 점점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 대중들은 음악을 좀 더 가까이 듣고 공감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아마도 이것은 작금의 어려운 상황이 대중들로 하여금 노래에서 어떤 위안을 찾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부응하듯 음악 프로그램들은 성큼 대중 앞으로 더 다가왔고, 그만큼 공감의 폭도 깊어졌다. 우리의 자정 풍경을 바꿔버린 음악 프로그램들의 향연에 피곤함조차 잊고 눈을 빼앗기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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