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황제’ 아들, BBC에 돌을 던지다
  • 이남진 | 뉴시스 국제팀 기자 ()
  • 승인 2009.09.15 18:22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임스 머독 “국영 저널리즘이 시장 왜곡시키고 있다” 공격…“우리는 모든 시청자에 봉사하는 게 목표”

ⓒREUTERS


영국의 더 타임스, 미국 폭스 TV 등을 소유한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의 ‘뉴스코퍼레이션’과 공영방송을 대표하는 영국의 BBC 간에 진검 승부가 벌어졌다. 지난 8월28일 영국 가디언그룹 주최로 에든버러에서 열린 국제 TV 페스티벌에서 루퍼트 머독의 아들인 제임스 머독 뉴스코프 유럽·아시아 최고경영자(CEO)가 “국영 저널리즘이 시장을 왜곡시키고 있다”라고 비난하면서 영국 내 방송의 ‘공영성’ 논란을 재점화시켰다. 경기 침체 속에 미디어 산업은 수입이 급감하면서 위기에 직면했지만, BBC와 같은 공영 미디어는 수신료를 통한 정부의 지원으로 ‘게임이 되지 않는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이 머독의 주장이다.

머독 CEO는 특히 BBC의 인터넷판 뉴스를 지목해 “국영 저널리즘이 뉴미디어 영토를 강점하고 있다. 이것은 다원성과 독립성을 저해하고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한다”라고 지적했다. 공영방송인 BBC가 정부 지원에 힘입어 인터넷판 뉴스를 무료로 운영하기 때문에 다른 상업 미디어의 유료화 부문을 잠식한다는 것이 논점이다. 이에 대해 BBC의 감독 기구인 ‘BBC트러스트’의 마이클 리온스 이사장은 “BBC는 상업적 이해를 벗어나 모든 시청자에게 봉사한다는 목표로 운영되고 있다”라고 맞받아쳤다. 

영국 시청자들은 일단 BBC의 손을 들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BBC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고, 수신료 부담에 대한 시청자의 불만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9월4일 가디언의 보도에 따르면, 여론조사 기관 ICM의 조사 결과, 영국 시청자의 77%가 “국민의 방송 BBC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답했다. 5년 전(2004년) ICM의 같은 조사 결과(68%)보다 무려 10% 가까이 늘어난 수치이다. 수신료 납부와 관련해서도 조사 대상의 63%는 “수신료를 부담할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답해 2004년의 59%에 비해 저항감이 줄어든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같은 결과는 불과 5년 전 공영성과 관련해 강한 도전에 직면했던 BBC로서는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지난 2004년 대중에 공개된 ‘허튼 보고서(Hutton Inquiry)’는 BBC의 신뢰성에 결정타를 날렸다. 무기 전문가 데이비드 켈리 박사의 사망 사건에 대한 조사를 담당했던 허튼 경은 보고서에서, “BBC의 앤드류 길리건 기자가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이라크 관련 정부 문서를 사실무근이라고 보도했다”라며 BBC의 게이트키핑(gate keeping·뉴스 취사 선택 과정) 문제점을 강하게 질책했다. 허튼 경은 “공영방송인 BBC의 경영 이사진이 공익의 수호자로서 길리건 기자의 기사 원고를 확인한 후에, 타당성을 문제 삼았어야 했다”라고 경영진을 싸잡아 비판했었다.

영국 시청자들, 루퍼트 머독의 스카이방송에도 전폭적인 지지 보내

▲ ‘미디어 황제‘로 불리는 루퍼트 머독. ⓒ연합뉴스

이뿐만이 아니다. BBC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스캔들과 관련한 허위 전화가 여과 없이 사실인 양 보도되고, 여왕 엘리자베스 2세에 대한 화면 설명이 잘못 나가는 등 잇따른 악재가 BBC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단초를 제공했다. 그러나 최근 BBC의 신뢰도는 상당히 회복되었다. 지난 2004년에는 ‘신뢰하지 않는다’라는 시청자가 60%였지만, 이번 조사에서는 69%가 ‘신뢰한다’라고 답했다. ‘허위 스캔들’ 보도로 추락한 BBC의 대중적 신뢰도는 BBC의 강도 높은 자구책에 힘입어 2007년 조사 때부터 가파르게 반등하기 시작해 지금은 시청자의 다수가 신뢰하는 공영방송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BBC는 조나단 로스와 같은 유명 방송 진행자와 방송국 직원들의 고액 연봉에 대한 반감도 상당 수준 극복했다. 이번 조사에서 BBC가 전체 직원의 연봉을 공개해야 한다고 답한 사람은 49%이며, 그 반대는 50%였다. 그동안 시청자로부터 고액 연봉에 대해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BBC는 지난 6월에 임원들의 연봉을 공개하는 특단의 조치를 단행했다. 그러나 조나단 로스와 같은 유명 방송인에 대한 연봉이 빠져 있어 또 다른 갈등을 초래한 바 있다.

하지만 공영방송 BBC가 헤쳐나가야 할 험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국 정치권은 현재 BBC에 대한 일부의 재정 지원을 상업방송 ITV의 지역 뉴스 서비스와 채널4의 아동 전문 프로그램에 지원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여기에 영국 시청자들은 BBC에 대한 신뢰와는 별도로 루퍼트 머독이 대주주인 스카이 방송 등에도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BBC에 또 다른 부담을 안기고 있다.

BBC가 다른 방송 미디어에 비해 더 객관적이라고 보는 시청자들은 38%에 불과했다. 또 다수인 58%가 BBC와 다른 채널의 차이점이 없다고 판단했다. 단, BBC가 국민의 수신료를 통해 운영되는 공영방송인 만큼 ‘불편부당(不偏不黨)’한 보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시청자는 무려 81%로 압도적이었다. 이와 더불어 “국영 저널리즘이 민주주의의 다원성과 독립성을 훼손한다”라는 제임스 머독의 주장과 관련해 영국인들은 상당 부문 공감하고 있었다. ‘언론이 정치적 외풍(外風)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전체의 61%로 나타나 머독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하지만 BBC 인터넷판의 경우 유료화될 것으로 보는 사람은 16%에 그쳤다. 방송의 질적 측면에서도 BBC는 시청자들로부터 따가운 질책을 받았다. 시청자의 57%가 BBC의 방송의 질이 떨어졌다고 답해 다수를 이루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