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작품에는 성역 없었고, 무차별 직격탄을 날렸다”
  • 김지영 (young@sisapress.com)
  • 승인 2009.09.22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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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우 교수가 회고한 고 김상택 화백 / “스트레스 너무 많이 받은 듯”

▲ ① 김상택 화백이 암으로 사망한 다음 날 동아일보 4컷 만화 을 그렸던 이홍우 화백을 만나 얘기를 들어보았다. ② 1995년 7월18일 김상택 화백의 출판기념회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이 김상택 화백. ③ 중앙일보 8월19일자에 실린 마지막 만평. ⓒ시사저널 이종현  


시사만화가 김상택 화백이 9월15일 위암을 끝내 이기지 못한 채 55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김화백은 지난 1988년 경향신문에서 시사만화가로 입문한 뒤 1999년 중앙일보로 옮겼다. 2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1년여 동안 요양한 뒤 지난해 다시 펜을 잡았지만, 지난 8월19일자 중앙일보 만평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 날인 16일, 기자는 동아일보 만평 <나대로 선생>으로 유명한 이홍우 상명대 겸임교수(60)를 만났다. 이교수는 김화백과 얽혔던 일화와 함께 고인이 남긴 시사만평의 위상에 대해 담담하게 전해주었다.

김화백과의 첫 인연은 언제인가?

김화백은 원래 충무로 영화판에서 미술감독을 하려고 했다. 영화 <애마부인>의 여주인공이었던 안소영씨의 핸드백을 들어주는 등 애환도 많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다 경향신문에 들어가 경향신문 노보에 만평을 그렸는데, 그것이 재미있으니까 경향신문 2면에 처음으로 만평을 그리게 되었다. 당시 나는 최종률 경향신문 사장과 점심을 먹는 자리에서 ‘김상택 화백에게는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가 있는 것 같다. 한번 잘 키워보면 괜찮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얼마 뒤부터 1면에 만평이 실리기 시작했고, 이후 작품마다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너무 갑작스럽게 부고를 접해서 조금 놀라웠다.

2007년 4월 위암 수술을 받을 때만 해도 김화백이 ‘요양만 하면 괜찮아진다’라고 해서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경향신문에 있을 때부터 위궤양을 앓으면서 많이 망가져 있었다. 그러다 중앙일보로 옮기게 되면서 더 잘 그려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심했다. 지난 8월19일자 만평이 나간 다음 날 중앙일보에 김화백이 요양해야 하기 때문에 연재를 마친다고 했을 때 다시 재발했다는 것을 알았다. 2년 전 수술을 받은 다음 일을 그만두었어야 했다.

시사만화가의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인가?

매일 작품을 마치고 나면 나처럼 술을 마시든 노래방을 가든 스포츠 관람을 하든 그날 저녁에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다. 스트레스의 앙금이 남아 있으면 큰 병이 온다. 아침·점심·저녁 뉴스가 다르다 보니까 스트레스의 연속이다. 매일 단두대에 올라가는 심정이다. 네티즌의 비난 댓글과 항의 전화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 

김화백은 어떤 성격이었나?

김화백은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지 않았다. 혼자 산과 사찰에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김화백 작품에 사찰이 많이 등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모임에 가끔 나와도 말수가 적었다. 만평집인 <10센티 정치>의 서문에도 ‘저는 만화에 대해 잘 모릅니다’라고만 적었다. 

김화백의 만평을 평가해달라.

그의 작품에는 성역이 없었다는 점이 제일 좋았다. 복싱에는 어퍼컷도 있고 잽도 있고 스트레이트도 있는데, 김화백은 무조건 스트레이트였다. 직격탄을 날렸다. 특히 노태우·김영삼(YS) 정부 시절 그 진가를 발휘했다. 특정 정치인을 봐주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다. 균형 감각 있게 그렸다. 당시 ‘경향신문은 김상택 만평만 보면 다 본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김화백은 그날 뉴스의 키포인트를 잡아내는 데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었다. 촌철살인의 기법이 뛰어났다. 

김화백이 경향신문에서 중앙일보로 옮긴 다음 화풍이 바뀌었다는 평가도 있는데.

중앙일보에서 직급이 상무이사 대우까지 올라갔다. 항간에는 김화백이 중앙일보로 옮긴 다음 날카로움이 좀 무뎌진 것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다. 하지만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가면 비바람을 맞게 마련이고 이런저런 일들도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진보 성향의 신문 만평에서는 북핵 문제 등을 잘 다루지 않는데, 김화백은 남북 문제와 관련된 작품을 많이 다루었다.

마지막 만평도 김정일 위원장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그림 기법이 경향신문 시절에는 아주 간략했지만 중앙일보에서는 사선이 많아졌고 복잡해졌다. 인물도 직접 묘사하기보다는 주로 화살표로 표시했다. 그러다 지난해 다시 작품을 시작하면서 인물을 그대로 묘사했다. 어떤 사람은 그의 작품에 대해 독특하다며 박수를 쳤고, 어떤 사람은 너무 복잡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김화백이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고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화백의 죽음이 이교수 개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김화백 상갓집에서 만난 작가들이 <나대로 선생>이라도 부활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시사만화계의 위기라는 우려도 나왔다. 나는 지금 재충전의 시간을 갖고 있는데, 조만간 마음의 결정을 내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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