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과 박연차, ‘주고받기’ 통했나
  • 이경기 | 내일신문 기자 ()
  • 승인 2009.09.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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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최저 구형’으로 플리바게닝 의혹 불거져…“수사 목적이 다른 데 있었음을 반증” 소리 높아

▲ 지난해 12월12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영장실질심 사를 마치고 법원을 나오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단군 이래 최대의 권력형 비리 사건으로 불린 ‘박연차 게이트’.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이 지난 9월16일 1심에서 징역 3년6월(실형)에 벌금 3백억원을 선고받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불러일으켰던 부패 사건의 주범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형량이 다소 약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박연차 게이트 수사로 기소된 21명 중 선고를 받은 14명이 1심에서 모두 유죄가 인정되었다. 이를 두고 검찰의 ‘판정승’으로 보는 분위기이지만, 박 전 회장에 대한 검찰의 ‘봐주기’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박연차 게이트는 권력형 비리 척결이라는 명분을 가졌지만 한편으로는 참여정부 실세 인사, 심지어 노 전 대통령을 타깃으로 한 보복·표적 수사라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그 와중에 검찰은 박 전 회장에 대한 구형 의견을 법정에서 직접 하지 않고, 서면 제출이라는 비공개 방식을 취했다. 수십 년간 재판을 해 온 고위 법관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라고 할 만큼 이례적인 일이었다. 또한, 다른 피고인에 비해 징역 4년이라는 낮은 형량을 구형하면서 그동안 막연히 제기되었던 의구심이 실체를 드러낸 것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하면서 검찰은 박 전 회장에 대해 ‘무한 신뢰’를 드러냈다.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부인하던 피의자들이 박 전 회장과 대면조사를 하면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박 전 회장 본인이 먼저 얘기를 하지는 않지만 돈을 전달한 시점과 당사자에 대해 물어보면 뛰어난 기억력으로 상당히 구체적으로 진술을 한다”라고 말했다. 나중에는 노 전 대통령측에 흘러들어간 6백40만 달러의 의혹에 대해서도 검찰은 박 전 회장의 진술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법조계 안팎에서는 박 전 회장이 검찰 수사에 ‘일등 공신’이 된 이면에는 상호 간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었다. 박 전 회장은 ‘박검사’로 불리기까지 했다.

수사 초기만 해도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던 박 전 회장의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 대검 중수부의 진용이 바뀌고 세간에 떠돌았던 ‘박연차 리스트’에 검찰이 직접 손을 대면서부터였다. 박 전 회장이 입장을 바꿔서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게 된 것도 이때였으며, 그 배경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았다. 박 전 회장의 주변 인사들에 따르면, 검찰이 박 전 회장의 장녀 등을 소환 조사하면서 그는 상당한 심경의 변화를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불법 증여 등의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박 전 회장의 세 딸을 출국 금지했다. 박 전 회장의 장녀는 태광실업 사장 자격으로 불러 조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녀까지 사법 처리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면 박 전 회장이 겪었을 심리적 압박은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한, 수사가 태광실업과 계열사 전반으로 확대되면서 회사를 살리기 위한 기업인의 선택이었다는 말도 나온다.

또 하나는 검찰이 제시한 플리바게닝(유죄협상제)을 박 전 회장이 받아들인 결과라는 분석이다. 박 전 회장은 여러 범죄 혐의가 적용되기 때문에 법률적으로 ‘경합범’이고 이 경우는 가장 무거운 죄가 규정한 최고형의 2분의 1까지 형이 가중된다. 최고 무기징역까지 처해질 수 있는 조세 포탈의 유기징역 최고 형량이 15년인 것으로 고려하면 2분의 1을 가중했을 때 22년6개월이 박 전 회장이 받을 수 있는 최고형인 셈이다.

‘불편한 공생 관계’ 해석도

▲ 지난 6월12일 당시 이인규 대검중수부장이 대검찰청 기자실에서 ‘박연차 게이트’ 최종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그는 최근 박연차 회장을 변호하는 로펌에 들어갔다 ⓒ시사저널 임준선

하지만 검찰의 구형은 징역 4년, 벌금 3백억원에 그쳤다. 법원에서는 검찰이 할 수 있는 최저 구형이었다는 말도 들린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검찰이 6년 정도를 구형하리라고 예상했지만 최대한 봐주면 4년까지도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라고 말했다. 이를 두고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검찰과 박 전 회장이 타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애초에 박 전 회장에 대한 세무조사의 목적이 다른 데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플리바게닝 의혹을 제기했다.

실제로 검찰 수사가 종결되었지만 여전히 미심쩍은 부분이 적지 않다. 최근 공판 과정에서 박 전 회장에게 금품을 건네받은 정치인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 전 회장에게 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여야 정치인의 재판 과정에서 관련 진술이 잇따랐다. 또한, 박 전 회장의 한 측근도 “지난해 국세청이 태광실업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를 벌이면서 정황상 박 전 회장의 돈이 전달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인사 1백40여 명의 리스트를 작성했으며 이를 검찰에 넘겼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해당 리스트에는 여야 정치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리스트를 받은 검찰은 그중에서 일부만 기소했다”라고 말했다. 검찰 수사 과정에 여러 타협 과정이 있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검찰 수사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뇌물을 받은 사람들에 대한 처벌로 볼 수 있지만, 그 종착점은 노 전 대통령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당시 수사 성과에 대한 대검 중수부의 집착은 강했다. 일각에서는 박 전 회장 수사 과정에서 현 정권의 실세인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에까지 뻗어나간 수사가 대선 자금 수사로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내놓았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의 서거로 박연차 게이트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중단되었다. 다만, 남은 검찰의 과제는 기소된 정·관계 인사들의 유죄를 확정받는 일이고 뇌물 사건에서 뚜렷한 물증이 없는 상황에서 박 전 회장의 진술은 검찰의 최대 무기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는 검찰과 박 전 회장이 불편하지만 공생 관계를 가져왔다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이같은 공생 관계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불투명하고, 자칫 ‘신뢰의 추락’이라는 부메랑으로 검찰에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법조계 주변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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