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라운드 돌입한 미디어법 정국 연말 국회에 먹구름 몰려온다
  • 김영화 ㅣ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09.11.0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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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 ‘과정은 위법, 결과는 유효’ 결정으로 논란 재점화…야권, ‘세종시’ ‘4대강’과 묶어 맹공 펼칠 듯

▲ ‘미디어법’의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 및 권한쟁의 심판 사건 선고가 이루어진 10월29일 헌법재판소 앞에서 천정배 전 법무부장관이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미디어법이 절차적 정당성 없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법안의 효력은 인정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그간의 논쟁을 종식시키기보다 새로운 논란의 불씨로 작용하고 있다. 민주당 등 야권이 일제히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결정이다”라고 강력 반발하며 법폐지·재개정에 나서기로 해 연말 정국의 뇌관으로 부상하고 있다.

민주당의 분위기가 처음부터 이렇게 강경했던 것은 아니었다. 입법 단계에서 야당으로서 미디어법이 통과되는 것을 저지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이미 공이 사법부로 넘어간 만큼 설령 결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지 않겠느냐는 기류였다. 물론 헌재가 제대로만 판단한다면 미디어법 표결 과정에서 야당이 지적한 재투표, 대리투표, 표결심의권 침해 등의 문제가 손쉽게 면죄부를 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기대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헌재결정은 어차피 우리 손을 떠난 문제라 권한쟁의 심판청구가 인용되면 ‘대박’이지만 기각 되어도 그만이다”(핵심 당직자)라는 현실적 판단이 우세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10월29일 헌재의 결정이 발표되자 분위기가 일순간에 뒤집혔다. 헌재가 미디어법의 유효성을 천명했지만 법안 처리 과정에서 야당에 대한 권한 침해를 인정한 대목 때문이다.

헌재가 사실상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내린 만큼, 민주당 입장에서는 절차적 위법성의 문제점을 인정하면서도 법 통과를 되돌릴 수는 없다는 헌재의 논리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도 존재한다. 장세환 의원이 곧바로 항의 차원에서 의원직 사퇴 기자회견을 열고, 곳곳에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르냐(이강래 원내대표)”라는 비판과 성토가 터져나온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어쨌든 미디어법 무효화에 사활을 걸었던 야당으로서는 재삼 이슈화를 시도할 만한 명분을 제공받은 셈이 되었다. 당장 민주당이 미디어법에 대한 여야 재협상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민주당은 헌재 결정 당일 의원총회를 열어 결의문을 내고 “헌재의 오늘 결정은 대한민국 헌정사의 오점이자, 법 논리를 가장하여 의회민주주의를 훼손한 최악의 판례이다. 시민사회단체와 적극 연대해 국회에서 언론악법 폐지·개정에 들어가겠다”라고 선포했다. 정세균 대표도 “미디어법에 대한 여야 간 정치 협상이 필요하다”라며 미디어법 의제를 본격적으로 재점화할 계획임을 밝혔다. 민주당은 “일사부재의 원칙을 깼다는 법률 처리 과정의 위법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법률을 다시 개정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명분을 쌓기 시작했다.

물론 한나라당은 더 이상 미디어법과 관련한 논쟁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법률의 유효성을 헌재가 인정한 만큼 곧바로 시행에 들어가면 된다는 이야기이다. 조해진 대변인은 논평을 통해 “헌재의 이번 결정은 의회의 자율성을 존중해 온 전통적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이번 결정으로 미디어법 통과에 대한 위헌 시비의 근거가 사라진 만큼 야당은 더 이상 정략적 공세를 그만두어야 한다”라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조대변인은 또 “헌재가 열거한 일사부재의 등 절차적 문제는 야당의 폭력적 행위에서 야기된 것이다”라며 ‘야당 책임론’으로 방어막을 쳤다.

미디어법 정국의 한복판에 서 있었던 김형오 국회의장도 논평을 내고 “헌재의 결정에 대해 모두가 자기 입장에서 아쉬움도 있겠으나 미디어법과 관련한 논란은 오늘로서 종결되어야 한다”라면서 더 이상 논란이 확산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국회 일정 전면 보이콧 가능성도

▲ 지난 10월29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이강국 소장과 재판관들이 ‘미디어법’ 권한쟁의 심판 사건의 선고를 위해 대심판정에 앉아 있다. ⓒ시사저널 임영무

이같은 한나라당의 입장에도 민주당은 미디어법 재협상을 연말 정기국회 최대 이슈로 부각시킬 태세이다. 여기에는 10·28 재·보선 승리를 계기로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는 자신감도 깔려 있다. 아직 민주당이 재협상 전략을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내년도 예산 심의와 재협상을 연계하거나 남은 국회일정을 보이콧하는 것과 같은 극단적인 전술을 펼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민주당 일각에서는 정기국회를 앞두고 흐지부지되었던 의원직 사퇴 카드를 재활용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되고 있다.

독립된 헌법 기관인 헌재의 결정에 대해서는 가급적 논평을 자제해왔던 야당들이“위조지폐가 맞지만 화폐의 효력이 있다는 것이다(진보신당 노회찬 대표)”, “절도는 범죄이지만 절도한 물건의 소유권은 절도범에게 있다는 것이다(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등 조롱 섞은 비판을 내놓을 정도여서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반대 입장에서 보아도 여권이 민주당의 재협상 요구에 응할 가능성은 매우작다. 18대 국회 초반의 최대 쟁점 법안을 겨우 통과시킨 여권이 제 발로 미디어법 정국으로 원위치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11월1일 법 시행 일정에 맞추어 조선·중앙·동아일보 등 메이저 신문사가 대대적으로 방송사업추진단을 출범시키고 거액의 자본금을 끌어모으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여권이 수용할 가능성은 더 떨어진다.

이처럼 여야 사이에 중간 타협 지점이 거의 없다시피 해 연말 국회의 불안정성은 점차 커지고 있다. 한나라당 의총에서 일부 의원들이 정기국회의 파행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민생 법안과 예산안 처리를 위한 전략 마련을 원내 지도부에 주문한 것도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4대강 사업과 세종시 원안 수정문제 등으로 복잡한 연말 국회에 또 하나의 메가톤급 지뢰가 매설된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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