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는 언론과 소통하고 노무현은 접촉 자체 차단”
  • 이석 (ls@sisapress.com)
  • 승인 2009.11.30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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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채 전 문화부장관 회고록에서 엿보는 두 전직 대통령의 언론관

▲ 2007년 10월15일 정부의 취재선진화 방안 강행에 반발해 합동브리핑센터 이주를 거부한 외교부 출입기자들이 외교부 청사 2층 로비에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왼쪽). 정동채 전 장관이 펴낸 (아래). ⓒ연합뉴스(왼쪽) / 시사저널 임영무(오른쪽)

고 김대중(DJ)·노무현 전 대통령만큼 주류 언론의 공격을 거세게 받은 정치인도 드물다. 일부 언론들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좌파 정부’ 혹은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면서 날을 세웠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언론사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단행해 반발을 샀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세금 폭탄을 맞은 조선·중앙·동아일보 등은 ‘언론 길들이기’라면서 김 전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기자실 폐지를 골자로 하는 ‘취재 지원 선진화 방안’을 내놓았다가 역풍을 맞았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접근 방식은 정반대였다. 정동채 전 문화부장관은 최근 발간된 회고록 <동고·동락·동행>(생각의 나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언론과의 소통을 강조한 반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언론 접촉 자체를 아예 차단했다”라고 회고했다. 정치 철학이나 정책에서는 두 전직 대통령이 상당 부분 궤를 같이했지만, 언론관만은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같은 차이는 그동안의 정치 행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 전 장관의 시각이다. 지난 1982년 12월, 김 전 대통령은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워싱턴에 거처를 정한 김 전 대통령은 미국의 인권운동단체나 종교단체, 저명한 대학교의 초청으로 잇달아 강연을 했다. 미국 언론들도 앞다투어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DJ를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반독재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같은 과정에서 DJ는 언론의 힘을 몸으로 체득했다. 때문에 무조건 언론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정치적 역경에 부딪힐 때마다 언론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정 전 장관은 다음과 같은 김 전 대통령과의 일화를 예로 들었다. “5·18 광주민주항쟁 3주기를 앞둔 때였다. 서울에서 김영삼(YS) 당시 신민당 총재가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김 전 대통령은 가택에 연금되었고, 모든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 DJ는 YS의 단식 투쟁이 갖는 의미를 알리는 호소 문을 뉴욕타임스에 기고해 군사 정권을 압박했다”라고 했다. 

이같은 언론관은 야당 총재를 거쳐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이어졌다. 야당 총재 시절에는 매일 아침 언론 대책 회의를 가졌다. 비서실장인 자신을 조·중·동 등 사장들에게 심부름을 보내 용건을 설명하게 했다. 편집국장, 정치부장 또는 출입기자와도 식사를 하거나 휘호 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달랐다. 민주주의와 인권, 동서 화합, 대북 정책 등은 김 전 대통령의 생각을 계승했지만, 언론만은 스스로 접촉을 차단했다는 것이 정 전 장관의 말이다. 그는 “후보 시절부터 ‘잘못된 언론 보도에 항의하면 한 대 더 때린다’라고 자주 불만을 토로했다. 특히 주류로 지칭되는 거대 신문사나 방송의 편파성 있는 보도에 분노를 표시했다. 대안 없이 그저 두들기고, 항의하면 한 대 더 때린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언론에 대한 불신이 아주 강했다”라고 말했다. 

동료 의원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통령 후보가 언론과 각을 세우면 안 된다는 시각이었다. “대언론 접촉의 중요성을 말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라고 건의하면 “나는 생각이 다르다”라고 딱 잘랐다. 간단한 회식을 겸한 기자간담회를 갖자는 건의에도 “하지 마라”라고 거부했다. 심지어 “DJ가 언론에 얼마나 당했나요. 뭐, 잘해준다고 논조가 달라지기나 합디까”라고 되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대변인이었던 이낙연 의원이 후보와 기자들 사이에서 고생을 많이 했다.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언론 대책반’이 꾸려졌다. 하지만 특정 언론사를 담당하는 의원들이 해당 기자들과 술 마시고 밥 먹고 하는 정도였다. 

때문에 노 전 대통령은 당선 이후에도 보수 언론과 각을 세워야 했다. 이는 2007년 6월2일 안희정 민주당 최고위원이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는 ‘참여포럼’ 창립식에서도 극에 달했다. 노 전 대통령은 장장 네 시간에 걸쳐 주류 언론들을 아주 심하게 질타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이면에 언론의 보복이…”

특히 기자실 문제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노 전 대통령은 “지금 기자실 논란이 뜨겁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다. 폐해가 있어서 개혁한 것이다. 이대로 넘겨주면 다음 정부에서는 기자실이 다시 부활되고 사무실 무단 출입이 나타나고, 자전거 일보가 다시 부활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참여정부 시절 언론중재위원회의 역할과 기능을 보장하는 입법 조치를 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참여정부 시절 중재위원회의 중재 건수가 늘어났다. 신문 산업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신문발전위원회의 설립, 군소 신문들의 유통을 지원하기 위해 발족시킨 신문유통원, 고사 직전의 지역 신문을 위해 고육지책으로 생긴 한시적인 지역신문발전위원회 등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정 전 장관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한 데에도 언론의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대통령이 서거한 데에 검찰과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내내, 그리고 퇴임 후 봉하마을로 낙향한 뒤에도 언론으로부터 처절한 보복을 당한 것은 언론의 역사가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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