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람에서 왕좌까지’ 선택받은 그들 재벌 3세 ‘경영 전쟁’ 막 올랐다
  • 이철현 기자 (lee@sisapress.com)
  • 승인 2009.12.2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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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 부사장·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 전면 등장

 

▲ 왼쪽부터 이재용 부사장·정의선 부회장·정용진 부회장.


2010년 경인년 재계에서는 재벌 3세들이 경영 전면에 나선다. 이들이 그룹의 핵심 계열사 최고경영진에 합류하면서 경영권 세습이 일단락되었다. 지금까지 정치권력이나 국민 여론을 살피며 경영권 세습을 주저하던 재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친 기업 성향을 표방한 이명박 정권이 잇따른 경영권 세습 행태를 용인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와중에 국내 대기업 집단은 상대적으로 탁월한 실적을 발표했다. 재벌들이 경영권 세습 과정에서 저지른 탈법 내지 불법 행위와 관련한 법적 논쟁 또한 마무리되었다. 20대 초부터 그룹 핵심 계열사에 입사해 경영 수업 과정을 거친 차기 총수들은 이제 40세 전후의 나이가 되었다. 기업 안팎의 환경이 개선되고 악재가 사라지면서 경영권 세습을 마무리하는 데 최적의 조건이 마련된 것이다. 한국 경제는 이제 도박을 벌이고 있다. 삼성전자, 현대·기아차, 신세계, 대한항공처럼 한국 경제를 이끌어가는 대기업 집단의 총수에 40세 안팎인 재벌 3세들이 올랐다. 

▲ 이재용 삼성전자 부사장(사진 왼쪽)이 2009년 8월 이건희 전 회장과 함께 고 김대중 대통령 국회 빈소를 찾았다. ⓒ주간사진공동취재단

국내 대기업 집단은 지금까지 미등 전략(tale light strategy)을 구사했다. 앞서 가는 미국·유럽·일본 기업의 꽁무니를 따라가며 제품과 기술 경쟁력을 키웠다. 한국 기업들은 이제 스스로 길을 만들어가며 지금까지 아무도 가지 않았던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이 일갈했듯이 ‘(한국 기업은) 지금까지 선진 기업이라는 등대가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망망대해를 스스로 나아가야만 한다’. 이처럼 경영 전략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으므로 신선한 발상과 패기를 갖춘 3세 경영인이 경영 전면에 나서기에 적절한 시점일 수 있다.

 반면, 3세 경영인이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나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장진호 전 진로그룹 회장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선대 회장이나 전문 경영진이 창업과 경영 현장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면서 경영 능력을 쌓은 것과 달리 3세 경영인은 약관의 나이에 회사에 들어가 책상 앞에서 총수로 키워졌다.

3세 경영인들이 어느 길을 밟을지는 올곧이 그들이 갖춘 역량과 품성에 달렸다. 하지만 3세 경영인들이 지닌 경영 역량이나 품성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전사적으로 차기 총수를 보위하다 보니 외부 인사로부터 흘러나오는 평가나 홍보팀을 통해 정제된 단편적인 사실밖에 없다. 그런 만큼 3세 경영인이 지닌 가치관은 무엇이고, 경영 능력은 어느 정도일지 궁금해진다. <시사저널>은 3세 경영인 주변 인사들과 관련 회사 안팎에 대한 취재를 통해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능력 검증’ 본격 시험대 올라

▲ (왼쪽)이부진 호텔신라·삼성에버랜드 전무, (오른쪽)이서현 제일모직·제일기획 전무

이재용 부사장(41)은 삼성전자의 최고운영책임자(COO)이다. 최고경영자(CEO) 최지성 사장과 함께 기업 내부 사업을 총괄한다. 이재용 부사장은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에게 도제식으로 경영 교육을 받았다. 삼성전자 사장단과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위원으로부터 일대일 교육을 받기도 하지만, 이재용 부사장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이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 전 회장이다. 이제 경영 일선에 나왔으므로 그가 어떤 리더십 스타일을 보여줄지 예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재용 부사장이 아버지로부터 사람 다루는 법을 배웠다면, 창업주 이병철 회장에서부터 이건희 전 회장을 거쳐 이재용 부사장까지의 경영 행태는 초현실적 권위에 근거한 통치라는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부사장을 만난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미국 시사 주간지 <타임>과 가진 인터뷰에서 ‘(이부사장을 만나보니) 삼성은 복이 많은 기업이다. 삼성의 미래는 밝다’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임직원은 이부사장이 ‘소탈하다’ ‘겸양이 몸에 배어 있다’ ‘예의바르다’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카리스마적 리더십에 반드시 따라야 할 신앙에 가까운 복종심을 임직원들로부터 끌어내지 못하는 것이 이부사장이 아버지와 다른 점이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전략기획실 전신) 소속이었던 김 아무개 부장은 “이부사장이 아버지처럼 행동하면 직원 사이에 ‘왜 저러는데?’라는 볼멘소리가 나온다”라고 말했다. 

▲ 2006년 3월 기아차 미국 공장 조인식에 참석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사진 앞줄 왼쪽).

이재용 부사장이 아버지처럼 제왕적 리더십을 원한다면 임직원에게 신앙적 복종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경영 능력을 입증해야 한다. 이부사장은 한 차례 실패했다. 지난 2000년 5월 인터넷 사업을 벌이며 ‘e삼성’을 설립했으나 초기 투자비 5백5억원을 날리고 삼성그룹 계열사에 그 손실을 떠안겼다. 이부사장이 최지성 사장이라는 단계를 거쳐 삼성전자, 나아가 국내 최대 기업 집단의 총수에 오르려면 COO로서 경영 성과를 거두어야 한다. 이건희 전 회장이 삼성전자를 세계 최대 반도체업체로 성장시켜 부자 세습 논란을 잠재웠듯이 말이다. 


 

금융 제외한 삼성 주요 포스트 이씨 3남매 포진 

▲ 어머니인 이명희 신세계 회장과 나란히 선 정용진 부회장(사진 오른쪽). ⓒ연합뉴스

이재용 체제를 준비하기 위한 포석으로 여동생들이 핵심 계열사 임원에 전진 배치되었다. 이건희 전 회장의 장녀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39)는 그룹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의 경영전략 담당 전무를 겸직하고 있다. 이부진 전무는 호텔신라 면세점 사업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인천공항 면세점 사업을 확장하고 부산 파라다이스호텔 면세점까지 인수했다. 2008년 매출 8천7백48억원, 영업이익 5백31억원으로 전년도 같은 기간과 비교해 각각 1백26%, 76% 늘렸다. 2009년 매출은 1조원을 넘길 전망이다. 이부진 전무는 생김새와 성품 면에서 아버지 이건희 전 회장과 가장 많이 닮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호텔신라 인사팀 출신으로 이전무와 함께 일한 적이 있는 김 아무개 부장은 “이전무는 성격이 불같다. 마음에 들지 않은 사안이 있으면 자기 마음에 들 때까지 집요하게 부하 직원을 닦달한다”라고 말했다. 둘째 동생 이서현 제일모직 전무(36)는 제일기획 기획담당 전무를 겸직한다. 이서현 전무는 미국 파슨스디자인스쿨 출신으로 패션 분야 전공을 살려 제일기획의 세계화 전략을 주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로써 보험, 증권, 카드, 자산운용 같은 금융 분야를 제외한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의 핵심 포스트는 이씨 3남매가 장악했다.  

▲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39)은 기획·영업 담당이다. 정부회장은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 옆에서 현대차 경영을 보좌하며 총수에 오를 기반을 닦고 있다. 현대·기아차그룹 마케팅 부서 관계자는“최고경영자 신분으로 회사 시스템 안에서 실무자와 커뮤니케이션하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차기 총수에 필요한 경험을 쌓고 있다”라고 말했다. 정부회장은 현대차 국내영업본부 임원으로 있을 때 함께 등산한 직원과 어울려 등산로 초입에 있는 술집에서 막걸리를 즐겼다. 정몽구 회장이 워낙 눌변이다 보니 공식 행사에서조차 언론과 인터뷰하지 않는다. 현대·기아차그룹 임직원은 정회장이 나서지 않는 상황에서 언론에 나서는 것을 불경이라고 생각한다. 정의선 부회장은 이와 같은 기업 문화 탓인지 공식 행사에서 원고로 읽는 것 외에는 짤막하게라도 언론과 인터뷰한 적이 거의 없다.

 정의선 부회장을 뒷받침할 그룹 인사도 3세 경영인들이다. 정부회장과 연배가 비슷한 3세 경영인들이 핵심 계열사를 이끌고 있다. 정부회장의 첫째 매형인 신성재 사장(42)이 현대하이스코를 이끌고 있다. 현대하이스코는 자동차 소재인 냉연강판을 생산한다. 둘째 매형인 정태영 현대캐피탈 사장(49)은 금융 계열사를 맡고 있다.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경영대학원 슬론스쿨을 졸업한 재원이다. 정부회장의 사촌인 정일선 대표이사(39)는 삼미특수강을 인수해 BNG스틸을 만들어냈다. 여동생 정성이씨는 광고대행사 이노션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3세 시대, 한국 경제에 기회이자 동시에 위기

▲ 조원태 대한항공 상무(왼쪽 첫 번째)가 2009년 4월6일 대한항공 본사 빌딩에서 열린 ‘김연아 선수 후원 협약식’에 참석했다. ⓒ대한항공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41)은 지난 12월1일 ㈜신세계 총괄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정부회장은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아들이자 배우 고현정씨의 전 남편이다. 지난 2006년 부회장으로 일찌감치 승진했으나 결제 라인에서 배제되었다. 정부회장은 지난 12월 초 대표이사로 승진하면서 경영 전면에 나섰다. 정부회장은 신세계백화점과 이마트를 함께 개발하는 복합쇼핑몰을 도입하고 이마트를 세계화하는 일에 집중할 계획이다. 정부회장의 여동생인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37)이 정부회장을 최측근에서 보좌한다. 

정용진 부회장의 대항마로 현대백화점그룹이 내세운 이는 정지선 회장(37)이다. 정회장은 지난 2003년 부회장 겸 대표이사로 취임해 일찌감치 경영 전면에 나섰다. 취임 이후 매출은 2003년 5조8천5백87억원에서 2009년 7조8천51억원으로 늘렸다. 경상이익은 2003년 2천38억원에서 2009년 6천35억원으로 세 배 증가했다.

 대한항공에서 눈에 띄는 인물은 조현아 상무(35)이다. 조상무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맏딸로 칼호텔네트워크 대표이사와 한진관광 등기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조상무는 지난 2007년부터 대한항공 기내식 사업을 주도하고 있다. 조상무는 야심이 대단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녀는 미국 코넬 대학 호텔경영학과 출신이다. 조양호 회장 자녀 가운데 가장 영민한 것으로 알려졌다. 키는 1백75cm가 넘고 성격은 불같다.

조양호 회장의 장남인 조원태 상무(33)는 누나 조현아 상무와 달리 신중하게 처신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2008년 말 대한항공의 핵심 부서인 여객사업본부장으로 취임했다. 조원태 상무는 누나 조현아 상무와 달리 두각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조원태 상무가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경영권 승계에 조현아 상무보다 앞선다고 자신할 만한 것은 아직 없다. 

두산그룹은 4세까지 경영 전면에 나섰다. 박용곤 명예회장의 장남인 박정원 두산건설 회장(47)이 그룹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눈에 띄게 커졌다. 박정원 회장의 동생인 박지원 두산중공업 사장(44), 박용현 회장의 장남과 차남인 박태원 두산건설 전무(40), 박형원 두산인프라코어 상무(39)도 4세 경영진에 합류했다.

이제 경영권을 세습하는 것은 한국 기업의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오랫동안 옥신각신하다 보니 경영권 세습에 대한 비판적 감수성도 무뎌진 것처럼 보인다. 재벌들은 끊임없이 2세 경영의 성공 사례를 들어 3세 경영을 정당화한다. 전 계열사가 동원되어 3세 경영인의 치적을 만들어낸다. 제프리 페퍼 미국 스탠퍼드 대학 경영학 교수는 ‘한 집단의 성공을 의인화를 통해 설명하기 위해 그 집단 리더의 개성·태도·능력에 의해 성공을 창출했다고 표현하는 것은 신화이다’라고 지적했다.

젊고 패기가 넘치지만 경영 능력을 검증받지 못한 미완의 총수들이 직계 존비속이라는 이유만으로 최고 경영진으로 나서는 것은 한국 경제에 있어 기회이자 동시에 위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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