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금융제국 런던’은 없다
  • 조명진 | 유럽연합 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0.01.1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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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화된 영국 경제 상황, 호전 기미 없어…전자 상거래 확산과 세제 혜택 없애는 정책도 추락의 원인

▲ 지난해 12월 중순 영국 런던의 옥스포드 거리에 어려운 경제 상황을 비웃듯 쇼핑객들이 붐비고 있다. ⓒ연합뉴스

금융 위기의 여파로 영국 경제 상황이 악화하는 것과 동시에, 금융 중심지로서 런던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영국이 유로화를 채택하지 않고 파운드화를 고집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런던만의 장점이었던 세제상의 혜택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세계 금융 중심지로서 런던의 위상을 살펴보자. 런던에서 금융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100만명에 이르고, 이 가운데 환거래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이 30만명이나 된다. 금융업 부문에서 나오는 법인세는 영국 전체 법인세의 3분의 1을 차지하며, 그 중심에 있는 런던시티는 영국 국내총생산(GDP)의 3%를 점유한다. 영국에서 영업 중인 외국 은행의 수는 4백81개로, 미국의 2백87개와 독일의 2백42개 그리고 일본의 92개를 크게 앞선다.

대다수 외국 은행들이 런던에 위치하고 있어 실제로 뉴욕 월스트리트보다 더 많은 외국 금융 기관이 런던시티에 있다. 세계 외환 거래의 3분의 1이 런던에서 이루어지면서 환율 결정에 영향을 주고, 보험 부문에서도 영국의 해상 운송과 항공 운송 보험의 순수 프리미엄 비중은 세계에서 가장 크다. 증권 부문에서도 런던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5백여 개의 외국 증권사들이 영업하고 있고, 국제 채권 시장 거래의 70%가 런던에서 이루어진다. 유럽 내 영국의 독보적 위치는 금융 자산 규모를 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럽연합(EU)의 총 금융 자산 규모가 2008년 기준으로 2천1백87억 유로인데, 그중 영국은 7백94억 유로를 차지함으로써, 3개 메이저 EU 회원국인 독일의 2백86억 유로, 프랑스의 2백35억 유로, 이탈리아의 1백51억 유로를 모두 합친 액수보다 크다.

세계 최대 금융 도시로서 런던의 위상은 외국 회사를 환영하는 역사적 개방성(openness)에 기인한다. 금융 위기 이전인 2008년 3월에 실시된 조사에서 런던은 유럽 최고의 비즈니스 도시로 선정되었다. 런던은 유럽 내 도시들 중에서 친비즈니스 환경, 삶의 질, 인적 자원, 투자 매력도, 인프라 등에서 1위를 차지했다.  2위는 파리, 3위는 베를린, 4위는 코펜하겐, 5위는 암스테르담이었다.

그러나 최상의 금융 중심지였던 런던의 위상은 최근 흔들리고 있다. 그 원인 중 하나는 기술 혁신적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 상거래는 지리적으로 반드시 런던에 위치해 금융 거래를 할 필요가 없게 만들고 있다.

노동당 정부의 비호의적 정책, 외국 금융회사들의 대이탈 부를 수도

▲ 지난해 12월9일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가 주재하는 내각회의에서 각 부 장관 등이 참석해 재무장관의 새해 예산에 대한 보고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 영국의 재정 적자는 국내 총생산(GDP)의 10%를 상회하고 있다. 이같이 정부 재정에 어려움이 생기자, 고든 브라운 총리는 금융권의 고액 보너스 수령자들에게 특별세로 50%의 세금을 물리는 정책을 포함해 ‘부자들을 벌하는(to punish the rich)’ 정책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서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12월19일자는 영국의 세금 납부자 중 상위 1%가 전체 세금 액수의 24%를 그리고 상위 5%의 세금 납부자가 전체 세금의 43%를 점유하는 현실을 볼 때, 노동당의 정책은 유동 자본과 고액 납세자들을 영국 밖으로 쫓아내는 정책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데일리 텔리그라프의 보도에 따르면, 영국에는 신용 경색과 경기 침체에 상당 부문 책임이 있는 금융권의 보너스 관행이 여전히 만연하고 있다. 2009년 100만 파운드 이상의 연봉을 받은 5천명의 금융권 종사자들 중에서도 임원급 고위직들이 받는 연봉의 총 규모는 무려 50억 파운드에 달한다. 특히, 영국 재무부는 로얄 뱅크 오브 스코틀랜드(RBS)와 로이즈(Lloyds) 은행에 추가로 5백억 파운드의 국고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결국, 국민들의 혈세로 지원했는데 금융권은 정작 자신들만을 위한 돈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영란은행(Bank of England)에 따르면 시중에 풀린 화폐량은 증가했으나, 실제 거래에 사용되는 화폐량은 감소했다. 소매업계에서 거래할 때 현금이 사용되는 비율은 4%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영국인들의 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에 대한 불신이 커지면서 직접 현금으로 돈을 보관하는 것에 안도감을 느끼는 영국인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은행 저축 금리가 최저 0.05%까지 하락하면서 더 이상 은행에 현금을 저축하는 것에 따른 혜택을 누리기 어렵게 된 점도 한몫했다. 현금을 직접 보유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은 경기 회복을 더디게 할 것이며, 이것은 종국적으로 금융 중심지 런던의 위상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노동당 정부의 비호의적 정책으로 인해, 런던의 외국 금융회사들은 다른 나라로의 이전을 고려하고 있다. 특히, 가장 이동성이 높은 헤지 펀드들이 탈 런던의 선두 주자가 될 전망이다. 블루크레스트 캐피탈 매니지먼트(BlueCrest Capital Management)와 오데이 에셋 매니지먼트(Odey Asset Management) 같은 헤지 펀드는 회사 전체가 이전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스위스 제네바에 사무실을 개설했다.

금융회사뿐만 아니라 런던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스웨덴 발렌베리 가문의 지주회사인 인베스토(Investor AB)가 스톡홀름으로 돌아가거나, 사르코지 대통령의 특별세 인하 정책으로 런던에 본거지를 둔 프랑스의 회사들이 파리로 돌아갈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영국 정부는 세입 면에서 ‘루저’가 될 것이 자명하다.  런던에 거주를 하든, 방문을 하든 이들의 사업에 따라 납부하는 직접적인 세금과, 식비나 쇼핑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납부하는 부가가치세(VAT)도 ‘우발적인 세금(windfall tax)’으로서 영국의 세입원이기 때문이다.

세계 금융 중심지로서 런던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면, 2012년 올림픽 개최 도시로서 인프라 건설에 투자하는 것을 통해서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런던이 단기간 내에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잃지는 않더라도, 이미 그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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