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에 민감한 ‘속 모를 충청’ 캐스팅보트 역할 이어갈까
  • 김형준 | 명지대 교수·한국선거학회장 ()
  • 승인 2010.01.19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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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선에서 결정적 힘 발휘…박 전 대표, 충청 민심 얻는 데 성공했지만 대선 때까지 지속될지는 미지수

▲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위)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7년 대선(아래)에서 충청권 승리를 발판으로 대권을 거머쥐었다. ⓒ시사저널 임준선


▲ ⓒ시사저널 우태윤

정부가 9부2처2청의 행정 부처를 이전하는 원안을 백지화하고 교육·과학 중심의 경제도시 건설을 골자로 하는 세종시 최종 수정안을 확정해 발표했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수정안에는 원안은 다 빠지고 ‘플러스 알파’밖에 없다”라면서 반대하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울러, 충청 여론이 호전되어도 “내 입장은 변함이 없다”라고 강조했다. 박근혜 전 대표가 세종시 원안을 고수하는 입장을 굽히지 않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지만, 초반부터 이명박 대통령과 퇴로 없는 전면전을 펼치는 이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충청 주민들이 정부 수정안에 현혹되지 않도록 초기에 강한 메시지를 던졌다는 분석과 차기 대선을 겨냥해 신뢰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더 나아가 홍사덕·김무성 의원 등 친박계 일부에서 타협론이 나오자 내부 단속을 위해 경고성 지침을 내렸다는 관측도 있다. 이 밖에도 차기 대선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충청권 표심을 의식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눈에 띈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실시된 수차례 대선에서 충청권은 선거 결과를 결정지을 만큼 캐스팅보트 역할을 해왔다. 인물이나 공약을 통해 충청 지역을 매개로 연대에 성공한 후보가 예외 없이 모두 승리했다. 특히, 지난 2002년 대선에서 충청과 아무런 연고가 없었던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51.9%를 득표하면서 충청 출신 이회창 후보(40.9%)를 완파했다. 여기에는 노후보가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행정수도 충청 이전’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이 응답자 중 73.3%가 실제 노무현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1997년과 2002년 대선 때처럼 초박빙의 선거에서 충청 표가 승부를 결정지었다는 점이다. 한국의 역대 대선에서 입증된 충청 표의 위력을 감안할 때 박 전 대표의 ‘원안 고수’라는 일관된 행보는 분명 대선을 염두에 둔 전략적 선택이라고 보기에 큰 무리가 없다. 이러한 전략은 1990년 3당 합당 모델과 마찬가지로, 영남과 충청을 묶고 수도권에서 분발하면 필승이라는 믿음에서 나온 것 같다. 여하튼 박 전 대표의 전략적 선택은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충청 출신 지도자 떠오르면 기존의 지지 지형 쉽게 변할 수도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 1월12일 충청 지역 주민만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세종시 문제와 관련해 충청 민심을 가장 잘 대변하는 정치 세력이 어디라고 보는지에 대해 ‘박근혜 등 한나라당 친박계’라는 의견이 28.8%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더구나 세종시와 관련해 정운찬 총리가 충청 출신의 총리로서 일을 잘하고 있다고 보는지에 대한 질문에, 긍정적인 평가는 22.6%에 불과한 반면, 부정적인 평가는 58.8%로 매우 높았다. 박 전 대표의 입장에서는 대선에서 항상 캐스팅보트 역할을 한 충청권 민심을 일단 일정 부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충청은 이제 영남과 함께 박 전 대표의 핵심 전진 기지로 굳혀지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유보적이다. ‘며느리도 모른다’라는 충남 민심의 진정한 속뜻을 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충청 여론에는 반대는 명확히 얘기하는데 찬성은 잘 말하지 않는 특성이 있다. 세종시 문제에서도 한국갤럽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대전·충남·충북에서 “국가 경쟁력과 통일 후 국가 미래 등을 고려해 세종시를 수정해야 한다”라는 이명박 대통령의 견해에 대해 ‘공감한다’는 비율이 각각 40.3%·42.5%·50.3%였다. 하지만 수정안 찬성 비율은 40.2%·31.7%·38.6%로 이보다 훨씬 적었다. 과거 한나라당과 자민련이 선거에서 맞붙었을 때 여론조사는 모두 한나라당 우세로 나왔지만, 막상 투표를 하면 자민련이 이겼다는 것도 충청 주민들이 지닌 고유한 특성을 입증해준다. 충청 전체가 대선에서 일관되게 의견을 분출하지 않는 것도 미래를 예측하기가 어려운 요인이다. 실제로 충청권에서는 벌써 충남과 대전·충북 간에 미묘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더구나 역대 선거에서 충북은 대전·충남과 다른 성향을 보인 적이 종종 있었다. 지난 1987년 대선에서 영남 출신의 노태우 후보는 충북에서 46.9%의 득표로 충청 출신의 김종필 후보(13.5%)를 압도했다. 하지만 충남에서는 반대로 김후보가 45.6%를 얻어 26.4%에 그친 노후보를 크게 앞섰다.

역대 대선에서 충청권이 ‘실리적으로 투표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연고가 있더라도 지역에 실질적인 이득을 가져다주지 않으면 지지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가장 비근한 예가, 1997년 대선과 2002년 대선에서 충청 출신인 이회창 후보보다 김대중 후보와 노무현 후보를 압도적으로 선택한 일이다. 다시 말해, 충청에는 대세론이 존재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특정 정치 지도자에게 많은 호감과 지지를 보이지만, 그것은 현재 상황에 대한 판단에 불과하다. 충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상황이 변하면 얼마든지 기존의 지지 패턴이 변화될 수 있는 개연성이 상대적으로 큰 곳이다. 충청 출신 지도자가 유력 대권 후보로 부상하면 기존의 지지 지형은 쉽게 변화될 수 있다는 뜻이다.

충청의 실리적 지역주의는 호남의 저항적 지역주의와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와는 확연히 다르다. 현재로서는 뚜렷한 반전의 징후는 보이지 않지만, 비(非)충청 지역에서 충청권의 세종시 수정안 특혜에 대한 반발이 강하게 일수록 역설적으로 충청 지역에서는 수정안에 대한 태도가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뀔 수 있다. 이것이 현실로 나타난다면 이는 충청 주민들의 고유한 실리적 투표의 단면으로 볼 수 있다. 느긋하게 길게 호흡하고 변화하는 정치 환경을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현실에 빠르게 적응하는 충청 주민들의 특성상, 이들의 정치 행보는 그만큼 불확실성이 크고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이런 충청 주민들의 행보는 가장 합리적이고 실리적인 생존 전략일 수 있다. 따라서 2012년 대권에서도 충청권의 ‘캐스팅보트’ 역할은 더욱 진화하고 발전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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