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격 있는 대사 대신 액션으로 말하는 퓨전 역사 드라마 <추노>
  • 정덕현 | 문화평론가 ()
  • 승인 2010.01.26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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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하는 ‘몸의 언어’가 빚는 거친 아름다움

▲ 에서 추노꾼 역을 맡아 거친 액션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김지석·장혁·한정수(왼쪽부터).


정통 사극 하면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왕이 앉아 있고 양 옆으로 신하들이 도열해 서서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아니면 “전하! 통촉해주시옵소서!” 하고 말하는 장면이다. 예전 사극은 이처럼 궁 안의 정치사를 주로 다루었다. 따라서 정치가 가진 말의 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 또 하나 떠오르는 것은 성을 둘러싸고 공격하는 쪽과 방어하는 쪽이 사생결단을 하는 전투 장면이다. 이른바 전쟁 사극은 거대한 볼거리, 말 그대로 블록버스터에 목숨을 걸었다. <연개소문>의 안시성 전투는, 볼거리에 지나치게 목맸던 당대의 사극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정치 혹은 전쟁. 이 과도한 남성들의 세계에 진력이 난 사극은 좀 더 아기자기한 이야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온다. 정치와 전쟁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후의 이른바 퓨전 사극들은 그 정통 사극의 스케일 속에 묻혀 있던 인물들을 살려낸다. 개인의 성장은 이 퓨전 사극의 스토리에 중요한 힘과 모티브를 제공한다. <선덕여왕>은 물론 정치와 전쟁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실이나 덕만 같은 그 속의 인물들이다. 역사 속에 박제된 인물들은 퓨전 사극을 통해서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들 퓨전 사극에서 중요하게 된 것은 볼거리의 스케일이 아니라 스토리의 정교함이다. 여성 사극 작가 전성시대가 만들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2010년 <추노>를 만난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한 이 사극은 왕이나 장군을 다루는 대신 노비 같은 하층민을 다룬다. 그러니 정통 사극 속에 보이던, 마치 역사서에나 나올 것 같은 품격 있는 대사들은 기대하기가 어렵다. 오히려 그 품격이라는 것이 위선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추노>의 인물들이 던지는 대사에는 거침이 없다. 굳이 현대적 어법을 버리고 형을 ‘언니’라 부르는 이유는 그 당대의 대사가 가진 거침없음이 리얼리티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게다가 뭔가 높은 사람들이 해왔던 정치적인 언사 같은 것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정치도 없고 전쟁도 없으며 게다가 개인의 성장 과정도 없는, 마치 괴물같이 등장한 <추노>가 순식간에 대중을 사로잡은 힘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몸’에서 나온다. 추노꾼 대길이(장혁)가 도망친 노비를 쫓아 들어간 객잔에서 탁자를 손으로 짚고 허공으로 몸을 날려 한 바퀴 빙그르르 돌면서 상대방을 내리칠 때, 그 힘의 실체가 드러난다. 숙소로 돌아와 땀으로 젖었을 그 구릿빛 몸을 드러내며 최장군(한정수)이 물을 끼얹을 때, 당장이라도 불끈 솟아날 듯한 폭발력을 감춘 힘의 실체가 살짝 드러난다. 태하(오지호)가 청나라 군사들을 향해 창을 휘두를 때, 준비 동작에서 슬로우로 잡히며 집적된 힘이 가격 지점에서 빠르게 돌아가면서 폭발할 때, 그 힘은 배가된다. 대길을 저격하는 업복이(공형진)를 뒤쫓는 최장군(한정수)과 왕손이(김지석)가 저잣거리를 이리저리 뛰면서 지붕으로 뛰어오르고 뛰어내리는 그 장면은, 스토리로 말한다면 단 몇 줄일 것이다. ‘업복이를 뒤쫓는 최장군과 왕손이.’ 하지만 그 몇 줄의 장면은 레드원 카메라를 통해 고속과 저속을 반복하며 마치 한 편의 무용을 보는 것 같은 쾌감을 준다.

이것은 액션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추노>에서는 액션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몸’이 가진 다른 힘이 존재한다. 군데군데 이가 나간 태하가 들고 다니는 장도가 그간의 수많은 전투를 말해주는 것처럼, <추노>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몸에는 여기저기 칼자국이 훈장처럼 달려 있다. 팽팽한 근육으로 재무장된 칼자국 난 몸. 그 몸은 그대로 민초들의 삶을 보여준다. 가진 것이라고는 몸뚱아리 하나인 그들. 생존을 위해 죽음의 위험 속에 기꺼이 던져지는 그 몸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머리가 시키는 것을 생채기가 나면서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그 몸은 단단해지며,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쾌락에 빠지며, 때로는 슬퍼할 수밖에 없다.

깊고 복잡한 이야기를 몸 아래 감추고 ‘행위’로써 전달

레드원 카메라를 굳이 연출에 사용한 목적은 그저 식스팩의 초콜릿 복근을 가진 그들의 멋진 몸을 보여주기 위함만이 아니다. 레드원 카메라는 고속과 저속 촬영 그리고 피부 속까지 들여다보일 정도로 생생한 화질을 통해 이 몸의 언어를 포착해낸다. 대길의 언년이(이다해)를 향한 애증은 대사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소식을 듣고 무작정 달려가는 그 말 위에서 그가 레드원 카메라를 통해 보여주는 강렬한 얼굴과 팽팽히 긴장한 온몸을 통해 전해진다. 그들의 유쾌함을 가장하는 언변은 영상으로 포착된 몸의 언어와 부딪치며 묘한 비장미를 만들어 낸다. 그것은 바로 고단한 민초들의 그림 그대로이다. 몸은 늘 피곤하고 부서지고 피 흘리지만, 그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고 허허 웃고 있는 그 모습. <추노>의 이 ‘몸’은 이 시대 민초들의 정서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추노>의 액션이 보여주는 몸은 아름답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흠결 없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거칠게 부딪치고 깨지는 데서 생겨나는 아름다움, 즉 노동이 부여된 몸의 아름다움이다. 그래서일까. 그 몸은 또한 슬픈 정조를 안으로 응축하고 있다. 멋진 몸의 현시를 통해 자연스레 보여지는 민초의 이야기는 그래서 폭발력을 가진다. <추노>의 성공은 깊고 복잡한 이야기를 대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몸 아래 감추고, 그 몸이 전하는 이야기를 매력적으로 전하고 있는 데서, 또 그것이 작금의 대중 정서와 맞아떨어지는 부분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추노>를 보고 <300>을 느낀다

 
지난해 후반기를 강타한 <아이리스>의 영상 연출은 드라마로서는 충격적이었다. 카메라가 쉴 새 없이 흔들리고, 계속해서 컷 되는 영상들은 실로 ‘불친절한 연출’이라는 말까지 들었지만 차별성 있는 현장감과 긴박감을 만들어내는 데는 성공했다. 그것은 영화 <본 아이덴티티>의 영상 연출을 드라마에 활용했다는 데서 실험적이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추노>를 만날 수 있다. 강렬한 음악이 흐르면서 옷을 걸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멋진 몸들이 느리고 빠르게 허공을 가르는 그 모습은, 영화 <300>의 감각적인 액션 연출을 활용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볼모로 잡혀가는 것을 벼랑 위에서 내려다보는 태하와 그 부하들이 “모두 죽으러 가자!”라며 청나라군을 향해 뛰어내리고 달려드는 그 장면은 영화 <300>의 협곡 전투를 떠올리게 한다.

<아이리스>의 <본 아이덴티티>, <추노>의 <300>이 말해주는 것은 영화와 드라마가 점점 어느 중간 지점에서 만나기 시작했다는 징후일 것이다. <아이리스>가 영화인이 만든 드라마라면, <추노>는 드라마 제작자가 만든 영화 같은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만큼 드라마에서도 이제는 스토리만큼이나 스타일리시한 연출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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