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한 오바마 “월가를 매우 쳐라”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10.01.26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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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금융권, 수십억 달러의 보너스 잔치 벌여…정책 오판한 잘못 시인하고 ‘세금 폭탄’ 경고

▲ 1월14일 오바마 미국 대통령(왼쪽 두 번째)이 백악관에서 티모시 가이스너 재무장관(맨 왼쪽)·로렌스 서머스 백악관 경제보좌관(오른쪽 두 번째) 등과 정책을 발표한 뒤 자리를 떠나고 있다. ⓒAP연합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월스트리트 CEO들이 벌인 보너스 잔치 때문이다. 1년 전 오바마는 모기지 버블로 촉발된 금융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7천억 달러를 부실 금융 기관에 투입했다. 물론 이 돈은 국민들이 낸 세금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월가(街)를 구제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익은 누군가 독식하고 손실은 국민이 떠안는 비대칭 정책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오바마가 중국식 사회주의를 한다는 험담까지 들렸다. 오바마는 그래도 감수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한 일념에서였다.

 1년이 흘렀다. 금융권은 오바마를 배신했다. 실업률은 두자릿수를 넘었고, 소비는 제자리인 상황에서 CEO들은 엉뚱한 짓을 했다. 수십억 달러의 보너스 잔치를 벌였다. 2009년에 보너스와 임금으로 지급한 돈은 전년보다 18%나 증가한 1천5백억 달러였다. 임직원들의 월급도 올렸다.

오바마가 매를 들었다. 금융 위기를 만든 책임을 묻는 벌금 성격의 세금 9천억 달러를 향후 10년간에 걸쳐 거두겠다고 다짐했다. ‘세금 폭탄’을 퍼붓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CEO들이 정신을 차릴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오바마의 예측은 빗나갔다. 1월 중순 금융위기조사위원회에 불려나온 CEO들은 오히려 당당했다. 큰소리까지 쳤다. 시간을 절약한다며 일부 CEO들은 호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청문회장에 왔다. 필 앙게리데스 청문위원장이 뱅크오브아메리카(BOA)의 브라이언 모이니헌에게 물었다. 동문서답이 돌아왔다. 위기 발생에 책임이 없는 사원들에게 보너스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보너스와 급여를 인상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했다. JP모건체이스의 제이미 다이먼은 사업 이익이 발생했으므로  보너스를 주었다고 말했다.

주요 금융 기관들의 수지가 흑자로 돌아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CEO들이 경영을 잘한 결과라기보다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 정책 덕분이다. FRB는 지난해 은행들이 장기 보유한 재무부 채권과 주택 관련 주식 등 비수익성 자산 1조5천억 달러를 매입했다. 이 결과 관련 유가증권들의 가격은 상승했다. 은행과 증권회사들은 이때 금융 거래를 통해 거액을 벌었다. 그러나 CEO들은 차입금을 갚을 생각은 하지 않고 보너스 잔치를 먼저 벌였다. CEO들의 도덕 불감증은 10명의 청문위원들을 기절시킬 정도였다.

이 광경을 지켜본 미국 납세자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를 생각했다. 오바마의 경기 부양 정책에 박수를 보내던 사람들도 고개를 저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콜롬비아 대학의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는 2008년 뉴욕타임스 기고에서 월스트리트를 강력히 규제하라고 촉구했다. CEO들의 오만을 본 그는 다시 펜을 들었다. 병든 은행에 혈세를 퍼부은 정책을 ‘윈-윈-루즈(win-win-lose)’에 비유했다. 은행과 투자자들은 돈을 벌고 국민은 손해를 본다는 얘기이다. 오바마의 자본주의를 ‘대용 자본주의’로, 그 본질을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2차 대전 후 처음인 ‘대통령과 월스트리트의 대결’에 세계가 주목

▲ 지난해 1월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금융 위기 관련 회의장에 한 방청객이 한 금융회사를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쓴 티셔츠를 입은 채 앉아 있다. ⓒAP연합

미국 경제는 스티글리츠 교수가 저술한 책의 한 대목처럼 ‘자유낙하(freefall)’ 상태이다. 시장 경제와 세계 경제를 동시에 살리기 위한 정책은 정책 오판으로 얼룩졌다. 경제의 추락을 초래한 금융 시스템의 흠결은 시정되지 않았다. 21세기 환경에 맞는 거시적 전략도 마련되지 않았다. 미국에 8천억 달러를 빌려준 중국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했다. 과잉 대출의 함정에 빠진 은행, 부실한 모기지 산업, 약탈자 같은 대여회사, 규제되지 않은 무역회사들이 모두 붕괴(meltdown)에 일조했다. 고장 난 타이타닉 호의 조타실만 고치고 고장의 원인은 외면한 형국이다.

오바마는 취임 1년을 맞았다. 불끈 쥔 주먹 대신 활짝 편 두 손으로 미국의 잠재적 적들과 대화하겠다는 취임사의 약속은 해외 도처에서 수모를 당했다. 이란도 북한도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일본은 오바마의 관용을 반미로 응수했고, 중국은 G2 대접만 받고 반대급부는 거부했다. 의료 개혁은 간신히 의회를 통과할 전망이 보이지만, 9천억 달러 가까운 비용이 미국 경제 전체에 드리울 무게는 상상을 초월한다. 의료 개혁보다는 일자리 창출, 금융 기관 살리기보다는 냉혹한 퇴출을 선택했더라면 하는 탄식을 해본들 기회는 지나갔다.

대통령과 월스트리트의 대결은 2차 대전 후 처음이다. 그동안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규제가 방파제가 되었다. 비극의 그림자는 대공황의 기억이 사라지면서 다가왔다. 레이건과 부시 부자, 클린턴 행정부를 거치면서 규제는 서서히 풀렸다. 클린턴 시대의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과 그의 후임 로렌스 서머스는 규제 완화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오바마는 서머스를 백악관 경제보좌관에, 서머스 밑에서 일한 티모시 가이스너를 재무장관에 재기용했다. 결국 ‘위기의 씨앗’을 불러들인 것이 재앙의 단초가 되었다.

칼 마르크스가 살아 있다면 최고의 덕목으로 치던 ‘규제 없는 자유 시장’이 일순에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탄생한 마르크스 경제가 붕괴되는 데는 70년이 걸렸다. 그 원인은 자체 모순이었다.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 경제의 특성은 탐욕과 무절제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미국 경제도 100년 안에 망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판이다. 시장은 규제해야 한다는 진리는  80년 전 대공항 때 이미 배운 교훈이다. 이 교훈을 경시한 레이건, 클린턴, 부시를 보면서도 오바마는 전철을 밟았다. 

지금의 시장에는 선의의 경제인도 있지만 사기꾼도 있고 범죄자도 있다. 아니 온갖 잡동사니가 우글거린다. 그래서 얻은 것은, 신뢰의 상실이고 글로벌 가치의 실종이다. 월스트리트의 혼돈을 놓고 누구는 하늘의 섭리를 들먹거리고 누구는 법과 제도의 미비를 탓한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정책의 오판에 있다.   

정책은 리얼리즘에 입각해야 하는데 이것이 지난 20년간 무시되었다. 따라서 위기의 책임을 오바마에게 모두 지우는 것은 가혹하다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그가 미국의 최고사령관이기 때문에 면책은 어렵다. 다행히 그에게는 과오를 고칠 시간이 있다. 단호한 태도로 월스트리트를 이긴다면 그는 성공한 대통령의 길을 갈 수 있다. 많은 사람이 그의 승리를 바라고 있다. 그의 승리는 미국을 위해서도 세계를 위해서도 긴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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