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기 탑승은 ‘미국인 우선’이었다
  • 페루·김형주 | 사업가 ()
  • 승인 2010.02.02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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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관광객의 ‘폭우에 갇힌 마추픽추 탈출기’ / 응급 환자·노약자 ‘뒷전’…곳곳에서 무장 군인들과 승강이

▲ 40년 만의 홍수로 마추픽추 주변 가옥들이 쓸려가고 산사태가 났다. ⓒREUTERS


지난 1월22~29일 남아메리카 페루의 마추픽추에는 40년 만에 최악의 폭우가 내렸다. 해발 2천4백30m에 위치한 마추픽추에는 관광객 2천명가량이 고립되었다. 우루밤바 강이 불어난 탓에 외부와 연결되는 마지막 교통 수단인 철도가 끊겼다. 한국인 관광객 25명도 고립되었다가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현장에서 동료 세 명과 함께 탈출한 페루 현지 사업가 김형주씨(42)가 2박3일에 걸친 마추픽추 탈출기를 <시사저널>에 보내왔다. 그 글을 싣는다. 

나는 동료 셋과 함께 지난 1월23일 페루의 수도 리마를 거쳐 남부에 있는 쿠스코 시로 들어갔다. 쿠스코는 안데스 산맥 해발 3천4백m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도시 곳곳에는 잉카 문명의 유적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1백12km 떨어진 곳에 잉카 유적지 마추픽추가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내친 김에 마추픽추에 들르기로 했다. 잉카 제국이 조성한 ‘비밀의 공중 도시’를 볼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쿠스코 산 밑에서 마추픽추까지 이어진 우루밤바 강은 폭우로 불어나 해발 2천5백km가 넘는 산맥 사이를 거세게 흐르고 있었다. 마추픽추 방향으로 뻗은 왕복 2차선 도로는 중간에 끊겼다. 마추픽추로 들어가려면 그곳에서 열차를 타거나 산길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열차를 타고 마추픽추 내 아구아스칼리엔테스 역으로 들어갔다.

잉카 제국이 16세기에 해발 2천4백m 높이에 조성한 비밀 도시를 2시간쯤 둘러보고 다시 아구아스칼리엔테스 역으로 돌아왔다. 역 주변은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페루인 가이드는 열차 운행이 중단되었다고 말했다. “강물이 줄면 열차 운행을 재개하겠다”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밤이 깊어졌으나 열차는 움직이지 않았다. 곧 “당일 열차 운행은 없다”라는 방송이 나왔다. 쿠스코에 있는 여행사 직원은 쿠스코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쿠스코가 우루밤바 강 상류에 위치한 탓에 마추픽추로 이어지는 철길은 언제 잠길지 몰랐다.

숙박할 곳을 찾았다.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 2천명이 방 잡기 전쟁에 나서다 보니 방 값은 천정부지로 뛰었ㄷㅏ. 1박 요금이 미화 80달러까지 치솟았다. 카드로 결제하면 1백20달러를 요구했다. 그래도 방이 없었다. 숙박 장소를 구하지 못한 관광객은 기차역으로 돌아갔다. 페루 철도청은 열차 객실 내부를 숙박 장소로 제공했다. 마추픽추의 밤 기온은 8℃ 안팎이었다. 추위가 엄습했지만 열차는 엔진을 가동하지 않았다. 

우리는 운좋게도 여관 방을 구했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기차역으로 나갔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기차역은 마추픽추를 빠져나가려는 관광객들ㄹㅗ 만원이었다. 역 관계자는 스페인어, 영어, 기타 언어 사용 국가로 따로 모이라고 방송했다. 우리는 아시아인이 모인 장소로 갔다. 그곳에는 한국인 관광객 25명, 일본인 10명, 중국인 5명이 모여 있었다. 철도 관계자의 안내로 헬기가 착륙 장소로 이동했다. 

그러나 헬기 구조 현장에 있던 여행사 가이드는 불길한 소식을 전했다. 헬기는 노약자나 응급 환자를 태운 것이 아니라 미국인 70명쯤을 구조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헬기는 기상 악화로 운행을 멈췄다고 했다. 이 소식을 접한 관광객 수백 명은 분통을 터뜨렸다. 나는 성난 관광객 사이에 끼어서 헬기 착륙장으로 몰려갔다. 헬기가 뜨고 내린 곳은 마추픽추 내 특급 호텔이었다. 관광객은 운동장에 모아놓고 미국인 일부만 구조한 것이었다. 호텔 입구는 무장 군인과 경찰이 봉쇄했다. 관광객 상당수가 거칠게 항의했으나 페루 당국은 해명조차 하지 않았다.

한국인 1명 고혈압 확인된 후 겨우 헬기로 구조돼

▲ 관광객들이 길거리에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REUTERS

그러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헬기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관광객이 하나 둘씩 살길을 찾아 떠났다. 군인과 경찰도 없어졌다. 호텔 직원은 헬기 착륙장이 세 곳이고 호텔은 그 가운데 하나라고 전했다. 일행은 호텔에 머물기로 했다. 호텔으ㄴ 만실이었다. 호텔에 통사정한 끝에 내부 수리 중인 방을 얻었다. 

다음 날 아침 강이 범람해 기차역 부근 3층 건물을 송두리째 쓸어갔다. TV는 산길로 탈출하던 관광객 2백여 명이 산중에 고립되었고, 아르헨티나 관광객과 현지인이 산사태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관광객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미국인만 우선 구조한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헬기 착륙장 세 곳을 점령하자는 주장이 쏟아져나왔다. 물과 음식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았다. 역에는 실신한 노약자 여러 명이 누워 있었다.

페루인 여행 가이드는 전화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헬기를 타라”라고 말했다. 이 가이드는 비가 며칠 더 오면 마추픽추 전체가 산사태로 묻힐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쿠스코 전역에 퍼진 이 소문 탓에 원주민까지 동요하고 있다고도 했다. 서둘러 호텔로 돌아왔다. 무장 군인이 일행을 저지했다. 관광객 사이에 폭동 조짐이 일었다. 우리 일행은 호텔 투숙객으로 확인되어 간신히 호텔에 들어섰다. 

비는 그칠 기세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 산사태가 일어날지 물라 불안했다. 우리는 미국 관광객 인솔자에게 사정했다. 미국인 인솔자는 냉정했다. 헬기 착륙장으로 향하는 미국인을 따라갔으나 무장 군인이 제지했다. 이 사이 호텔 입구에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군경 저지선을 뚫고 호텔로 뛰어 들어온 관광객 수십 명을 무장 군인이 강제로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나는 호텔 직원을 붙잡고 사정했다. 호텔 직원은 “환자라고 호소하면 탈 수 있다”라고 알려주었다. 일행 가운데 한 명이 고혈압 환자를 자청했다. 의사가 혈압계를 들고 나타났다. 혈압계는 1백86을 가리켰다. 그가 고산병을 앓은 것이 혈압을 상승케 한 것 같았다. 일행 가운데 한 명이 탈진 증세를 보였다. 며칠째 고산병으로 시달리다가 공포까지 겹치자 쓰러져버린 것이다. 일행 네 명 가운데 두 명이 응급 환자로 분류되었다.

헬기가 두 차례 오갔으나 미국인 관광객만 탑승했다. 세 번째 헬기가 도착하자 페루인 의사는 응급 환자로 분류된 일행 두 명을 불렀다. 페루 군경은 응급 환자만 탈 것을 허락했다. 나는 포기했다. 그때 응급 환자 두 명이 내가 함께 타지 않으면 헬기에 오르지 않겠다고 버텼다. 페루인 의사까지 나서 “환자 두 명이 죽으면 책임질 것이냐”라고 말하면서 군인에게 따졌다. 군인은 다시 의사에게 혈압을 잴 것을 지시했다. 혈압계에는 다시 1백80으로 나왔다. 결국, 그제야 우리 일행 네 명은 페루 공군 소속 UH-60 헬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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