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에서 멀어졌다고 대중이 환영하기만 할까
  • 정덕현 | 대중문화평론가 ()
  • 승인 2010.03.30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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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기 다른 형식과 소재 앞세운 사극 ‘춘추 전국 시대’

 

▲ (왼쪽)는 사극 연출에서 새로운 세대적 감수성을 보여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KBS

지난해 방송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선덕여왕>의 여파일까. 아마도 2010년은 사극의 춘추 전국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이제 한 해가 시작된 지 3개월여 남짓 지나가고 있지만, 벌써 선보인 사극만도 <제중원> <추노> <명가> <거상 김만덕> <동이>까지 무려 다섯 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쏟아져 나오는 사극들이 어떤 하나의 경향을 보이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주몽>으로 촉발된 고구려 사극 열풍은 <연개소문>과 <대조영>으로 이어졌고, 왕의 사생활에 집중했던 <이산>과 <왕과 나>가 동시에 방송되었으며, 여성 사극으로 <선덕여왕>과
<자명고> <천추태후>가 비슷한 시점에 방영되었던 점을 생각해보면, 작금의 사극들은 하나로 묶여지기보다는 제각각의 개성을 뽐내는 형국이다.

어찌 보면 이들 사극들은 사극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간대에 펼쳐놓은 듯하다. <명가>가 정통 사극에서 퓨전 사극으로 막 넘어온 지점의 사극을 그려냈다면, <거상 김만덕>이나 <동이>는 퓨전 사극에서 발전된 여성 사극의 한 지류를 다시 보여주는 것 같고, <제중원>은 작금의 새로운 경향이라고 할 수 있는 사극의 하이브리드 경향을 드러내주며, <추노>는 장르화되어 스타일을 입은 사극의 미래 모습을 그려내는 것 같다. 무엇이 사극을 이렇게 다양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는 얼마나 성공적인 것일까.

먼저 <추노>는 이들 사극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기록된다.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에 실험적인 영상과 듣는 맛이 일품인 대사들 그리고 유기적으로 잘 짜인 구성, 여기에 개성 넘치는 연기자들의 호연까지 그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걸작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이 중에서 <추노>의 성공을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고르라면 그것은 단연 스타일리시한 영상 연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레드원 카메라를 이용한 영상들은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움직이며 몸들이 만들어내는 순간의 언어들을 포착해냈다. <추노>는 사극 연출의 새로운 세대적 감수성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크다. 김재형 PD로 기억되는 정통 사극의 연출 시대는, 이병훈 PD의 퓨전 사극의 연출 시대로 넘어왔고, 그것은 다시 곽정환 PD 같은 장르 사극의 연출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추노>의 성공을 통해 사극은 지금껏 작가들의 스토리 실험실 역할을 충실히 해왔지만, 앞으로는 연출자들의 영상 실험실 역할도 할 가능성이 커졌다.

<제중원>이 시청률에서 난항을 거듭하는 이유는 앞선 기획과 소재에도 거기에 맞는 실험적인 스토리와 영상 연출이 없기 때문이다. 구한말의 제중원이라는 시공간을 통해 의학과 사극의 만남, 중세와 근대의 만남을 기획한 것은 놀라운 점이지만, 그것을 평이한 이야기와 연출의 틀로 다룬 것은 이 작품의 한계로 지목된다.

<명가>는 전형적인 권선징악형 ‘착한 사극’이었지만 그 교과서 같은 스토리에 대중들은 그다지 열광하지 않았다. 가난한 삶을 벗어나기 위해 ‘청빈(淸貧)’의 삶을 추구하는 아버지를 떠난 최국선(차인표)이 결국 모두를 부유하게 하는 ‘청부(淸富)’의 삶을 보여주는 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주창하는 사극은, 88만원 세대로 점철된 현실에서 ‘공자님 말씀’처럼 여겨진 면이 있다.

그렇다면 그 연장선상에서 똑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주제로 내놓고 시작하는 <거상 김만덕>은 어떨까. 분명 <거상 김만덕>은 <명가>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극이지만, 이것과는 미세하게 결을 달리하는 지점이 있다. 그것은 여성 사극의 한 자락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명가>가 그 교육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느라 캐릭터에 집중하지 못한 면이 있다면 <거상 김만덕>은 어린 시절부터 차츰차츰 성장해나가는 김만덕 캐릭터에 집중하는 면이 있다. 여성 사극의 실체라고도 할 수 있는 성장 드라마가 그 바탕에 깔려 있어 그만큼 가능성도 내포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미션이 주어지고 그 미션을 수행해나가면서 한 단계씩 성장하는 퓨전 사극이라는 틀을 통해 신분과 성별에 의해 한계 지워진 여성 캐릭터의 성장에 주목했던 여성 사극은 <선덕여왕>에서 정점을 찍었지만(신분의 최상위라고 할 수 있는 여왕이 아닌가!) 여전히 그 힘은 소진되지 않았다. <동이>는 <대장금>을 통해 그 여성 사극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이병훈 PD가 다시 여성 주인공을 들고 나왔다는 데 의미가 있다. 천민에서부터 시작해 숙종의 후궁까지 성장하는 숙빈 최씨의 파란만장한 삶이 핵심이다. <대장금>이 가졌던 여성 캐릭터의 힘에, <이산>에서 다루었던 그림에 대한 관심이 이제 <동이>에서는 음악으로 옮겨져 왔다. 여러 모로 충분히 대중적인 가능성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과거 재현보다 현재적인 의미 담아낸 것이 공통점…‘얼마나 새로운가’에 성패 달려

▲ 여성 사극의 재미를 담아낸 . ⓒKBS

모두 다 제각각의 스타일과 소재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이들 사극은 또한 어떤 공통의 기반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이제 왕의 이야기에서는 한참 멀어졌다는 것이며, 따라서 과거를 재현해내기보다는 현재적인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이다. 역사보다는 역사 바깥에서 소외된 인물들을 찾아내고, 거기에 상상력을 보태는 것은 이제 사극의 기본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이 기반이 있기 때문에 사극은 지금과 같은 다양한 스타일과 소재와 장르의 실험이 가능하게 되었고, 이것은 나아가 대중들의 요구 사항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이제 사극은 ‘얼마나 새로운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추노>의 성공이, 사극이라면 응당 그래야 할 것 같은 영상과 스토리의 실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 ‘새로움’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제중원>은 기획과 소재는 새로웠지만 그 안을 채우는 스토리와 영상은 진부했기 때문에 지지부진한 결과를 낳고 있다. <명가>는 공식적인 틀에만 머물러 새로움이 없었기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고, 반면 <거상 김만덕>은 그 안에 김만덕이라는 인물의 성장 스토리를 끼워넣어 그나마 신선함을 유지하고 있다. <동이>는 안정된 이병훈 PD의 연출과 김이영 작가의 대본 위에 음악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어떻게 대중들에게 접근시킬 것인가가 관건이 되고 있다. 2010년 사극의 춘추 전국 시대, 그 성패를 가르는 것은 그 새로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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