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명탄, 두 군데서 올랐다”
  • 백령도 / 반도헌 기자·김인현 인턴기자 (bani001@sisapress.com)
  • 승인 2010.04.06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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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취재 ‘백령도의 100시간’ / 현지 기상대 직원 증언 “사고 당일 밤, 백령도 북단과 남서방에서 동시 발사돼”

 

▲ 천안호 침몰 사고 닷새째인 3월30일 해군 성인봉함에서 해군과 해병대원들이 사고 해역을 바라보고 있다.


4월1일 백령도 앞바다는 무서웠다. 3m가 넘는 파도가 연신 방파제를 때렸다. 수색 작업은 중단되었고, 대원들도 해안에서 철수했다. 육지로 가는 뱃길도 끊겼다. 문득 영원히 고립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저 바다에 묻힌 46명의 실종자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얼마나 더 무서웠을까. 이날따라 서해는 너무 넓어보였다. 장촌포구에서 바라본 바다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 3월30일 오전 천안함이 침몰한 백령도 사고 해역에서 해군 SSU 잠수요원들이 함미의 위치가 표시된 부표 주위에서 실종자를 수색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기자는 3월29일 여객선 프린세스호를 타고 오후 5시 넘어 백령도에 들어왔다. 4월1일 현재 4일째 머무르고 있다. 백령도에는 내·외신을 포함해 2백명 가까운 기자들이 몰려왔다. 장촌포구와 용기포항을 중심으로 움직이며 취재하고 있다. 용기포항과 장촌포구 중간에 있는 진촌리는 빈방이 없을 정도로 때아닌 특수를 누리고 있다. 대목을 만난 택시는 한 번 타면 1만원이 기본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돈을 받고 자가용을 렌터카로 빌려주는 경우도 있다. 긴장감이 감돌지만 백령도 주민들의 최대 관심사는 먹고사는 일이다. 용기포항에서 만난 변 아무개씨(71)는 “보통 4월15일부터 까나리 조업을 시작하는데 걱정이다”라며 한숨을 토해냈다.

백령도에서 보낸 100시간을 기록했다.

3월26일 함포 소리 들으며 “사태 심각하다” 느껴

백령도 기상대 관계자는 “3월26일 오후 9시에서 27일 0시까지는 해무가 밀려오는 상황으로 시정 거리가 5km 미만이었다”라고 말했다. 사고 현장의 기상 상태가 구조 작업을 펼치기가 쉽지만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백령도 주민들이 사고 사실을 인지한 것은 지상파 방송 특보를 통해서다. 백령도 기상대에서 청원경찰로 근무 중인 홍군제씨(40)는 기상대에서 당직 근무를 하다가 방송을 통해서 사고 소식을 접했다. 백령도 기상대는 해발 1백46m에 위치해 있어 백령도의 동서남북을 모두 시야에 둘 수 있는 곳이다. 홍씨가 사고 소식을 듣고 나와 바다를 살펴보았으나 해무가 깔려 있어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홍씨가 사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은 밤 11시 함포 소리를 듣고부터다. 홍씨는 “훈련할 때에는 함포를 연달아서 쏘는 경우가 없는데 당시에는 함포 소리가 5분 이상 연속적으로 들려왔다”라고 말했다. 홍군제씨는 구조 작업을 위해 발포한 것으로 알려진 조명탄과 관련해 주목되는 증언을 했다. 홍씨는 “당시 조명탄이 쏘아졌는데 사고가 발생한 백령도 남·서방 부분 말고도 북한에 인접한 백령도 북단 쪽에서도 동시에 4~5발의 조명탄이 올라왔다”라며 비슷한 시각에 정반대 방향에서 동시에 조명탄이 쏘아 올려진 이유에 대해 의문을 나타냈다. 해안 지역은 안개에 싸여 있어 눈으로 상황을 확인할 수 없지만 백령도 기상대는 사방이 뚫려 있어 조명탄이 올라온 위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천안함이 침몰하고 실종자가 생각보다 많이 발생하면서 백령도는 분주해졌다. 김대식 백령면사무소 부면장은 이날 밤 10시30분쯤 비상 소집된 후 맨 먼저 백령도 현지의 유일한 민간 병원인 백령병원에 연락했다. 백령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의사와 간호사들은 병원에 집결해 구조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대기했다. 하지만 부상자들이 군 의무중대로 이동하면서 백령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구조자는 한 명도 없었다.

3월27일 체육복·군복 입은 부상 군인들, 바로 의무중대로 후송

해경에 의해 구조된 생존자 가운데 부상자가 백령도 용기포항에 도착한 것은 3월27일 오전 2시10분쯤이다. 백령도 기상대에 근무하는 이형준씨(32)는 당시 상황을 담은 동영상을 디지털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했다. 사고 당시 소식을 모르고 있던 이씨는 밤 12시30분께에 동료들의 전화를 받고는 거주지인 진촌 근처에 있는 백령병원으로 향했다. 생존자 다섯 명이 용기포항에 도착하고 두 명은 헬기로 후송될 것이라는 병원측 설명을 듣고는 용기포항으로 갔다. 이씨는 “용기포항에는 부상자 다섯 명이 입항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생존자도 있고, 절뚝거리며 양쪽에서 부축받는 생존자도 있었다. 기본적인 응급 조치는 이미 취해진 상황이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씨는 “당시 용기포항에서는 주민 20여 명이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통제를 할 겨를이 없어 보였다. 촬영을 제지당해 플래시가 터지지 않는 동영상을 몰래 촬영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용기포항에 있던 진촌청년회 회원인 윤중연씨(35)는 “1.5~2.5m 정도의 너울파도가 치고 있을 정도로 당시 해상 상황이 좋지는 않은 편이었다. 부상자 중에는 체육복을 입은 사람도 있고 군복을 입은 사람도 있었다. 백령도 근해에서 군인이 큰 사고를 당하면 보통 백령병원에서 치료받는 것이 일반적인데 당시에는 바로 의무중대로 떠났다”라고 말했다.

사고 다음 날인 3월27일은 구조 작업에 별다른 진척이 없었다. 두 동강 난 함수와 함미 부분이 가라앉아 있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데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30분께 해난구조대(SSU, Ship Salvage Unit) 요원이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이날 오후까지 모두 3차례에 걸쳐 수중 탐색을 시도하려 했지만 높은 파도와 거센 물살로 인해 투입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설사 잠수가 이루어졌더라도 함수와 함미 부분 위치를 정확히 찾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작업 시간과 지역에 한계가 있고 시계가 확보되지 않아 넓은 바닷속에서 침몰 부분을 찾아내기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고 지점에 가까운 장촌포구를 중심으로 해변에는 10m 정도 간격으로 해병대원들이 근무에 나서 해변으로 떠내려올 수 있는 천안함 조각과 실종자 유품을 탐색했다. 선체 일부분과 천안함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는 비상 보트가 발견되기도 했다. 장촌포구에는 해병대 현장본부 천막이 마련되어 소형 고무 보트(IBS, Inflatable Boat, Small)를 이용한 해군 지원 활동에 착수했다. 해병대 정훈장교 손상호 소령은 “해병대는 해군 탐색 작업을 지원하는 역할을 맡는다. 해변 근무 병력은 떠내려오는 부유물을 탐색한다. 소형 고무 보트를 이용해 사고 지역을 돌면서 해군 잠수사를 지원하는 작업도 병행한다”라고 말했다.

3월28일 광양함·양양함 도착해 구조 본격화

구조 작업이 활력을 찾은 것은 3월28일부터였다. 해상 기상이 호전되면서부터인 것이다. 전날 탐색 작업에 나섰던 해난구조대원이 현장에 다시 투입되었다. 오후 2시30분 3천톤급 구조함 광양함과 전투지원함 성인봉호가 현장에 도착하고 기뢰탐색함인 옹진함·양양함이 뒤를 이으면서 탐색 작업에 힘을 실어주었다. 해난 구조대원들은 오후 7시10분에 함수 위치를 확인했다. 7시28분부터 38분까지 부표 설치할 위치를 확인하고, 7시57분 함수 부분에 부표를 설치했다. 오후 10시께에는 옹진함이 함미 부분까지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구조 작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3월29일 소방방재청 구조대원 구조 동참

29일은 해난구조대(SSU), UDT 등을 중심으로 구성된 잠수사들이 본격적으로 수중 작업에 들어간 날이다. 이날 소방방재청 소속 중앙119 구조대원 12명이 헬기 두 대를 이용해 백령도에 왔다. 이들 중에는 잠수요원 네 명이 포함되었다.

저녁 8시쯤 찾아간 장촌포구에는 방송사 취재진들이 북적였다. 현장에서 9시 뉴스를 리포트하고 있었다. 해안에는 해병대원들이 2인1조를 이루어 해변을 수색하고 있었다. 해병대 현장지휘소 천막 주변에는 다음 날 수색 작업에 투입될 소형 고무 보트 10여 대가 정박하고 있었다. 해병대 정훈장교 손상호 소령은 “SSU와 UDT 대원들은 광양함과 성인봉함에서 구조 작업을 펼치고 있고 해병대 대원들은 현장에서 지원하고 있다.

이곳 대원들은 부유물 수색 작전을 벌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서해 바다를 넘어오는 바람은 칼처럼 매서웠지만 해병대원들은 밤늦게까지 수색 작업을 계속했다.

3월30일“물이 차서 구조 작업이 쉽지 않다”

▲ 천안함 침몰 사고 발생 닷새째인 3월30일 오후 사고 지점 인근의 광양함에서 우리 해군과 미군이 연합 작전을 펼치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오전 10시20분 장촌포구에는 오전 구조 활동을 마친 소형 고무 보트 네 대가 들어왔다. 해병대 복장이 아니었다. 보트에 써 있는 707이라는 부대 이름이 보였다. 공수특임대 대원들이었다. 하나같이 잠수복을 입고 있었다. 한 대원은 “물이 너무 차서 구조 작업이 쉽지 않다. 자세한 것은 해군에게 물어봐라”라고 말했다. 전투복과 잠수복을 입은 군인들이 포구를 들락날락했다. 항구는 말없이 이들을 맞고 내보냈다. 오후 3시58분 장촌포구에 들어온 대원들은 오전과 분위기가 달랐다. 기자의 질문에 답하기는커녕 강한 눈초리로 쳐다보기만 했다. 표정이 얼어붙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UDT 한주호 준위와 SSU 대원이 구조 작업 중 실신해 후송된 상황이었다. 이날 오후 2시30분 용기포항을 떠난 취재 지원용 배에 탄 기자들은 애초 광양함에 승선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해상 상황이 여의치 않아 주변만 맴돌다가 3시40분쯤 돌아왔다. 소방방재청 잠수요원 여덟 명이 헬기 두 대를 이용해 철수했다.

3월31일 “공식 브리핑 외 첩보 올리지 마라” 지시 있었나

31일은 하늘이 도와주지 않았다. 기상이 악화되면서 잠수사들은 수중 작업에 투입되지 못하고 사고 현장 주변에서 바다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가 내리는 데다가 백령도 주변 해안에 너울성 파도가 높아 작업이 어려웠다. 백령도 전역이 짙은 안개에 싸여 섬 내륙까지도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였다. 오전 8시30분 취재기자들이 풀단을 구성해 9시에 출항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전날처럼 취재진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나 기상 상황이 나빠져 갈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4월1일 현재까지 취재 지원선은 뜨지 못하고 있다. 민간 잠수사들도 용기포항에 피신해 있다. 이날 중앙119 구조대원 7명이 추가로 백령도에 들어왔다. 사고가 발생하면서 바빠진 것은 해군만이 아니다. 백령도 내부에 있는 관공서와 민간 단체도 바쁘게 움직였다. 해경 백령도 출장소는 사고 이전에는 전경 두 명이 상주하고 해경 한 명이 4일 단위로 교대했다. 사고 이후 백령도출장소에는 인원이 20명으로 증원되었다. 위문품을 수령해 각 함대에 전달하고 함정 업무 지원, 취재 지원 업무 등을 맡고 있다. 섬의 치안을 맡고 있는 백령면 파출소는 평소 5명의 경찰관이 근무했지만 한 명이 증원된 상태에서 인천지방청으로부터 13명을 추가 지원받았다.

 

▲ (왼쪽)3월31일 해병대 현장 지휘소가 있는 장천포구에 기상 악화로 인해 사고 현장에 나가지 못한 보트들이 정박해 있다. (오른쪽)3월31일 본지 기자를 비롯해 각 언론사 취재진이 이기원 소방교와 인터뷰하고 있다.

 

파출소의 한 관계자는 “교통 정리와 치안 외에는 신경 쓰지 못하고 있다. 사고 관련 업무는 해양경찰청에서 담당한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번 사고와 관련해서 공식 브리핑 외 첩보를 올리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다. 군에서 나오는 정보와 혼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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