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총선, ‘클레그 마니아’가 바꾼다
  • 조명진 | 유럽연합 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0.05.04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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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당 당수, TV 토론에서 선전하며 여론조사 선두 올라…전통 양당 구도에 지각 변동 일으키며 3파전 예고

▲ 영국 자유민주당 당수인 닉 클레그가 4월28일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다. ⓒEPA

영국 총선이 국제적으로 관심을 끄는 이유는 1706년에 현재의 국회를 설립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회민주주의 국가’의 선거이기 때문이다. 4월6일 브라운 영국 총리는 버킹검 궁전을 방문해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의회 해산을 요청했고, 4월12일 의회 해산과 동시에 영국의 정당들은 선거전에 돌입했다. 5월6일로 예정된 이번 총선이 더욱 관심을 끄는 이유는 영국의 전통적인 양당 구도에 지각 변동이 있기 때문이다. 지난 선거에서 제2 야당으로 하원 전체 6백50석 가운데 10%에도 못 미쳐 영향력이 미진했던 자유민주당이 노동당, 보수당과 어깨를 나란히 함으로써 영국 정치사에서 80년 만에 다시 3파전 구도로 선거 유세가 벌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년 전 지방선거에서 당별 지지도는 보수당이 40%, 제2 야당인 자유민주당이 25%, 집권 노동당이 22%였다. 이는 보수당이 차기에 집권할 것이 유력함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집권 노동당의 지지도가 자유민주당보다도 뒤져 3위로 떨어졌음을 나타낸다. 즉, 2010년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이 부각될 것이라는 점이 1년 전부터 예시되었다.

이번 총선의 새로운 특징은 처음으로 주요 3당 당수들의 TV 토론이 열렸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4월16일 3당 당수들의 1차 TV 토론 후 실시된 유거브(YouGov)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유민주당 33%, 보수당 32%, 노동당 26%로 자유민주당이 선두에 나섰다는 사실이다. 미국 대통령 선거식 TV 토론에서 자유민주당의 득세에는 닉 클레그 당수의 설득력 있는 토론 자세와 신선한 이미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 지도자 한 사람의 선전이 당 전체의 위상을 바꿔놓은 TV의 위력을 실감하게 만든 계기였다.

물론 이번 선거에서 일고 있는 자유민주당의 인기는 기존 전통 양당에 싫증을 느낀 영국 유권자들의 마음을 반영한다. 구체적으로 지난해 4월부터 6개월간 영국 정가를 휩쓴 국회의원들의 주택수당을 포함한 보조비 남용 스캔들로 노동당과 보수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와 같이 노동당이 4회 연속 집권해 2015년까지 정권을 연장하도록 놓아둘 수는 없다는 것이 영국 내의 분위기이다. 양당 구도에서는 1979년 이래 대처 총리를 총수로 한 보수당의 18년 장기 집권이 1997년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에 의해서 종지부를 찍었지만, 이번 3파전에서는 노동당의 13년 장기 집권이 보수당의 단독 정권 창출에 의해서 마침표를 찍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다.

자유민주당 당수 닉 클레그의 인기 비결과 승리의 조건

▲ 4월15일 여야 3당 당수들이 영국에서 사상 처음으로 진행된 TV 생방송 토론회를 끝낸 뒤 악수하고 있다. ⓒAP연합

TV 토론에서 클레그는, 카메론처럼 흥분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브라운처럼 경직되지 않은 모습으로 차분하고 정확하게 쟁점들을 짚어냈다. ‘클레그마니아(Cleggmania)’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게 한 원동력은 말 잘하는 정치인의 틀에 박힌 수사가 아니라 신중한 정책가다운 논조였다. 다시 말해, 클레그 당수가 풍기는 학자적이면서 언론인 같은 모습이 진부한 정치인의 모습과 차별될 수 있었다. 

클레그가 시청자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은 토론을 할 때나 자기 발언을 할 때뿐만 아니라 다른 당수가 발언할 때 듣고 있는 자세도 한몫을 했다. 브라운 총리는 이견이 나올 때, 답답해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고, 카메론 당수는 다른 당수가 발언하고 있을 때, 반박할 기회를 노리며 조바심 내는 모습이 자주 노출되었다. 반면 클레그 당수는, 다른 당수의 발언 중에 진지하게 경청하는 자세였고, 중간에 공격적인 입장을 취하더라도 기다렸다가 한 박자 늦추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자유민주당이 기존 양당과 이견을 보인 분야는 핵억지력으로, 트리덴트 핵잠수함 유지 문제이다. 클레그는 테러의 위협은 유지 비용이 큰 핵잠수함의 운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인 반면, 노동당과 보수당은 이란과 북한이 핵 위협을 들어 핵억지력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2차 TV 토론 중에 결정적으로 클레그가 인기를 얻은 것은 노인들에 대한 무료 시력 테스트 제공 문제로 브라운과 카메론이 충돌할 때, 클레그는 노인들에게는 무료 시력 테스트와 겨울 난방 지원비가 아니라 더 품위 있는 노후를 제공할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논박을 정리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이번 총선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지난 2005년 선거에서 보듯이 전국 득표율과 실제 의석 확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즉, 지난 선거에서 노동당은 35%의 전국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3백56개 지역구에서 승리해 국회 6백50석 가운데 55.2%을 차지해 다수당으로서 정권 연장이 가능했다. 반면, 보수당은 32%의 득표율 기록했지만 1백98개 지역구에서 승리해서 국회의석의 30.7%를 차지했고, 22%의 득표율을 보인 자유민주당은 62개 지역구에서만 승리해 국회 의석의 9.6%밖에 얻지 못했다.

이처럼 영국 선거 제도는 비례대표제를 적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2등은 의미가 없다. 즉, 지역구에서 당선 여부가 정권 창출과 직결된다는 점에서 이번 총선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다시 말해, 노동당이 전국 득표율에서 3등을 하고도 재집권이 가능하다. 그래서 클레그 당수는 비례대표제로의 헌법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 3당 중에 어느 당도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할 경우, 자유민주당이 연립 정부 구성에서 킹메이커로서의 역할을 담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동안의 선거 결과 보수당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거의 이탈하는 현상이 없었다. 즉 자유민주당이 노동당 지지표를 흡수해야 한다는 뜻이다. 보수당은 “자유민주당에 투표하고 보수당이 정권을 잡게 하라!(Vote Nick and get Dave and George!)”라는 선거 구호를 쓰고 있다. 여기서 Nick은 자유민주당 당수의 이름이고, Dave와 George는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카메론과 그림자 재무장관 조지 오스본을 가리킨다.

이번 영국 총선 결과는 세 가지 점에서 관심을 끈다. 첫째, 13년 노동당 정권이 교체될 것인가이다. 둘째,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정당이 없어, 1916년에서 1922년까지 자유민주당의 로이드 조지 총리가 거국 일치 내각을 구성했던 이후 처음으로 연립 정부를 구성하게 될 것인가이다. 셋째, 클레그 당수가 새로운 내각 구성에서 과연 어떤 직책을 맡게 될 것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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