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광장’의 스탈린 띄우기
  • 조홍래 | 편집위원 ()
  • 승인 2010.05.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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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전승 기념일에 기념 포스터 등장…반발 잇따르며 러시아 정체성에 대한 논란 점화

일요일인 지난 5월9일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는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을 패배시킨 소련의 승리를 축하하는 성대한 열병식이 거행되었다. 1만여 명의 러시아군은 광장을 행진하면서 가공할 전력을 과시했다. 이들의 뒤를 따라 탱크와 미사일 등 각종 첨단 무기들이 선을 보였고 하늘에서는 신예 전투기들이 창공을 누볐다. 러시아에서 2차 세계대전 전승 기념일(Victory Day)은 최대의 명절이다. 그러나 이날 65주년 기념 행사는 어느 때보다 요란했다. 사상 처음으로 미국·프랑스·영국군도 사열식에 초대되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끈 소련군과 연합군의 공로를 치하하고 향후 평화를 지키기 위한 국제 공조를 역설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 이스라엘의 시몬 페레스 대통령은 외국 귀빈으로 참석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초청되었으나 오지는 않았다.

▲ 5월9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사진이 인쇄된 셔츠를 입은 학생들이 스탈린 사진이 찍힌 포스터를 들고 걸어가고 있다. ⓒEPA

러시아군의 위용을 과시한 이 행사는 그리스의 금융 위기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는 유럽연합(EU) 지도자들의 모습과는 대조를 이루었다. 하필이면 서방 자본주의가 비틀거리는 시기에 전례 없이 거창한 축제를 벌인 러시아의 의도가 궁금증을 자아냈다.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추락한 러시아의 재기를 자랑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의 우월을 암시하는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러나 러시아가 이 행사를 통해 전하고자 한 진짜 메시지는 스탈린의 부활이었다.

이날 모스크바 전역에는 스탈린의 사진이 찍힌 포스터들이 나붙었다. 전승 기념일 행사에 스탈린의 사진을 전시하는 문제는 열띤 토론 끝에 모스크바 시 당국의 허가를 받았다. 많은 러시아인이 이 조치에 항의했으나 결과는 스탈린 숭배자들의 승리로 끝났다. ‘위대한 애국 전쟁’(The Great Patriotic War)을 어떤 방식으로 기념하느냐를 둘러싼 논란은 소련 이후의 러시아의 정체성 확립을 고뇌하는 화두로 등장했다. 2007년부터 러시아의 고등학교 교사용 역사 교과서에는 2차 대전 때의 스탈린 리더십을 찬양하고 연합군의 배신을 규탄하는 내용이 기술되었다. 이 교과서는 물론 크렘린 당국이 편찬했다. 2009년에는 안보 기구 요원들로 구성된 역사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2차 대전을 일으킨 책임이 나치뿐만 아니라 소련에도 있다는 국내외의 비판을 반박하는 일을 한다. 이런 움직임은 잔혹한 독재자 스탈린과 그가 군림한 소련 시대가 전직 대통령이자 현 총리인 블라디미르 푸틴에 의해 서서히 부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뉴욕타임스는 러시아가 ‘스탈린 검증’(Stalin Test)에 실패했다는 서방 학자들의 지적을 전했으나 러시아의 입장은 당당하다.

▲ 지난 4월7일 푸틴 러시아 총리는 카친에서 열린, 1940년 학살된 폴란드 포로 추도식에 참석했다. ⓒITAR-TASS

소련 시대를 재현하려는 ‘겉 다르고 속 다른’ 러시아 보수파

푸틴의 야망과는 달리 메드베데프의 노선은 명확하다. 부패와 권위주의를 청산하고 진보적 가치, 법치주의, 개인의 창의를 우선하는 방식으로 러시아의 정체성을 재설정하는 것이 그의 숙원이다. 반인륜적 이념으로는 러시아의 영광을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푸틴은 지난 4월, 1940년 러시아의 카친에서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학살된 폴란드 포로들의 추도식에 참석해 추모비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소련 전제주의의 반인륜 행위로 폴란드와 러시아인 모두가 고통을 받았다고 말했다. 학살의 현장인 카친 숲에는 폴란드와 러시아 시민 수천 명이 묻혀 있다. 공교롭게도 카친 숲에서 거행되는 추도식에 참석하러 가던 폴란드 대통령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스탈린 부활 기류에 대한 반발이 의외로 거센 데 대해 보수파들은 상당히 놀라는 표정이다. 푸틴은 역사 왜곡의 대가가 얼마나 비싼가를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망설임이 일시적인 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일각의 반발이 소련 시대를 재현하려는 푸틴의 욕망을 영구히 중단시킬지는 미지수이다. 민주적 러시아의 미래를 위해서는 서방, 특히 옛 소련 위성국들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들은 스탈린의 죄상과 나치를 패배시킨 소련의 공로를 동시에 다루는 지난한 숙제를 안은 셈이다. 이와 더불어 한동안 주춤거리던 크렘린이 스탈린 시대를 있는 그대로 직시하려는 의향을 보이는 것은 다행이다. 소련을 팽창시키려는 스탈린의 야욕으로 러시아인만 2천5백만명이 죽었다. 이들은 아직도 지하에서 역사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주로 서방을 비난했던 이전 행사 때와는 달리 이번 65주년 기념사에서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 협력을 강조한 것은 의미 있다. 그러나 기념식에 나온 러시아 노병의 말은 러시아인들의 속내를 드러냈다. 소련 혹은 스탈린이 아니었다면 2차 대전 승리는 없었다는 것이 그의 말의 요지였다. 이번 행사에 초청된 76명의 미국 보병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러시아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들은 행사에 외국 군대를 참가시킨 데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 가운데 한 시위자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 러시아의 미래 그리고 서방과의 관계를 암시했다. “미군은 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친구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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