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립 정부’의 모범안 만들다
  • 조명진 | 유럽연합 집행이사회 안보자문역 ()
  • 승인 2010.05.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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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총선 결과 주요 3당 모두 과반 못 넘기자 왕실이 개입해 보수당-자유민주당 ‘합의’ 이끌어

영국에 총선거가 있었던 지난 5월6일은 과연 영국이 민주주의의 원조 국가인지 의심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선거 마감인 저녁 10시에도 투표를 하지 못하고 돌아간 유권자가 생긴 곳이 영국 전체 투표 장소 가운데 일곱 곳이나 되었다. 종전 선거와 다른 3파전이었기에 더 많은 유권자가 자신들의 권리를 행사하는 바람에 투표장 수용 능력이 예상을 초월한 결과였다. 맨체스터의 한 투표소는 투표 용지가 다 소모되어 더 이상 투표를 진행하지 못했고, 세필드의 한 투표소는 선거 관리 인원이 부족해 마감 시간을 넘겼다. 수백 명의 유권자들이 제3 세계에서나 일어날 일이 어떻게 영국에서 벌어지냐고 항의하며 투표를 하지 못한 채 돌아가야 했다. 영국 총선은 이렇게 끝났다.

투표 집계가 종료된 5월7일, 영국 주요 3당은 예상은 했지만 당혹해했다. 어느 당도 과반을 차지하지 못하는 결과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정권을 잡기 위한 과반수는 3백26석이었는데 보수당은 3백5석, 노동당은 2백58석, 자유민주당은 57석이었다. 클레그 당수의 TV 토론으로 기대를 모았던 자유민주당은, 득표율은 23%로 지난 선거보다 1% 올랐지만 의석 숫자는 다섯 석이나 줄어들었다. 그 직후 연립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정당 간의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인상적인 것은 연정을 타진하기 위해서 물밑 작업이 벌어지기 전에 브라운 총리가 기자회견을 통해서 보수당과 자유민주당이 연정을 타진할 것으로 안다면서, 만일 그 협상이 결과를 내지 못할 경우에 자유민주당과 타협할 의사가 있음을 알린 것이다.

3일 동안 정당 간에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난항을 거듭하자, 교통정리를 한 것은 왕실이었다. 5월11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캐머런 보수당 당수를 버킹검 궁전으로 불러 총리로서 연정을 주도해줄 것을 제안했고, 캐머런 당수는 그것을 수락했다. 연정은 이렇게 해서 급진전되었다. 국익을 위해서 당마다 서로 갖고 있는 고유 정책을 내놓으며 나라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영국을 위해 단합한다(United for Britain!)’라는 기치하에 보수당은 절대로 양보하지 못할 것 같았던 자유민주당의 요구인 비례대표제 도입을 추진하기로 합의했고, 친유럽연합인 자유민주당은 연정 기간에 이 부분을 주장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대신 보수당은 부총리를 포함해서 다섯 개 장관직을 자유민주당에 배분했다. 왕실의 개입과 정당 간의 고유 정책을 포기하며 이룬 연립 정부는 분명 영국식 민주주의의 산물이다.

▲ 새로 출범한 영국 연립 정부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오른쪽)와 닉 클레그 부총리가 영국 런던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AP연합

연정의 최대 과제는 공공 부문 지출 삭감 통한 국가 재정 안정

5월12일 보수당 캐머런 당수는 새로운 영국 총리로, 자유민주당 클레그 당수는 부총리로, 다우닝스트리트 10번지(총리 공관) 로즈 가든에 마련된 첫 공동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섰다. 한 주 전까지 정책의 차이를 보이며 TV 토론에서 거칠게 공방을 벌였던 정치 지도자들 같아 보이지 않았다. 영국의 새로운 총리와 부총리는 공개석상에서 처음으로 서로를 데이비드와 닉으로 부르며 종전의 격을 없애고 상하 관계가 아닌 동료 관계가 되었음을 과시했다. 기자회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캐머런 총리는 “새로운 정부(new government)가 탄생한 것일 뿐 아니라, 새로운 정치(new politics)의 시작임을 알린다. 강하고 안정된 리더십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어 클레그 부총리는 양당 간의 연정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당략에 의해서가 아니고 국익에 의해서 장기적으로 지속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잘 알지 못하는 리더끼리 장기적으로 공조를 이룰 수 있느냐고 BBC 기자가 질문하자 캐머런 총리는 “두 팀이 나라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두 팀이 하나의 강한 팀이 되어 나라를 이끈다”라고 답했다. 물론 보수당과 자유민주당 연정의 최대 과제는 공공 부문 지출 삭감을 통해서 국가 재정의 안정을 기하는 것이다. 연립 정부를 이어온 독일의 노하우에 대해 토미 호이스 정치 컨설턴트는 “연립 정부는 여러 가지 야채로 만드는 수프와 같다. 그리고 협상을 통한 ‘타협’이 다른 당과 공존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다”라고 덧붙였다.

보수당과 자유민주당의 앞으로 5년간의 정략적 동거는, 선거전 때의 모습만 상기했을 때는 적과의 동침 같은 일이었는데 명백한 현실이 되었다. 미국도 영국의 새로운 연립 정부 탄생을 환영했다. 사실 오마바 행정부는 그동안 브라운 총리 내각과 삐걱거렸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영국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처음으로 양국 관계를 ‘특별한’ 관계라고 표현했다. 마치 레이건 대통령과 대처 총리 간의 특별한 ‘앵글로색슨 관계’가 회복되는 조짐이다.

투표 체계의 문제점과 개선점이라는 숙제를 남겼지만, 선거 후 연립 정부를 수립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서 영국은 ‘정치’ 기술이 무엇인지를, 왜 이 나라를 의회 민주주의의 산실이라고 하는지를 전세계에 확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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