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술의 ‘변형’ 행진은 계속된다
  • 김정민 | 한국일보 기자 ()
  • 승인 2010.05.3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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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공월드컵에서 선보일 현대 축구의 흐름 / 포백 수비 라인 바탕으로 측면 공격수 역할 커질 듯

패션에만 유행이 있는 것은 아니다. 축구 전술에도 유행이 있다. 프레타포르테 같은 의상 박람회가 세계 패션의 트렌드와 미래를 한눈에 읽을 수 있는 무대라면 월드컵은 축구 전술의 조류와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하는 장이다.

▲ 2006년 독일월드컵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결승전 경기에서 프랑스팀이 코너킥 공격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축구 전술은 바둑의 ‘정석’과도 비슷하다. 바둑에는 수많은 수가 있다.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둑 기사들의 기풍과 관점에 따라서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바둑이지만 일관되게 진행되는 방식이 있어 ‘정석’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정석’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한때 유행하던 정석이 일순간에 고리타분한 ‘속수’로 취급되기도 하고, 만인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파격’이 어느 순간 ‘묘수’로 평가되며 새로운 유행 정석으로 자리 잡는 경우도 많다.

축구 전술도 정답은 없다. 각 팀의 특성과 가용 자원에 맞춰서 승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러나 축구 전술에도 유행은 있다. 특히 월드컵 본선을 치른 후 이른바 ‘대세’로 평가되는 전술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2010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월드컵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수비 축구가 대세를 이루었던 독일월드컵의 풍조가 남아공에서도 이어질지, 이를 대신할 새로운 변형 전술이 등장할지 주목된다.

본선에 나설 32강의 전술을 중심으로 남아공월드컵에서 선보일 ‘최신 유행 전술’을 전망해본다.

 ■ 왜 전술이 중요한가 | 축구 전술에 대한 논란을 공허하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사령탑을 맡았던 일부 지도자 중에는 “왜 이렇게 공격수와 수비수 숫자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모르겠다”라고 푸념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대 축구로 접어들면서 점차 전술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현대 축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직력이다.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최근에는 브라질의 펠레,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처럼 환상적인 개인기로 여러 수비수를 따돌리며 넣는 환상적인 골을 볼 기회가 많지 않다. 전술의 발달로 펠레나 마라도나의 시절처럼 현란한 개인기를 발휘할 공간을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의 힘이 개인의 능력을 압도하는 것이 최근 축구의 흐름이다.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는 2008년부터 펠레·마라도나의 전성기를 떠올리게 하는 화려한 개인기로 세계 축구팬들을 흥분시켰다. 그러나 메시는 2009-2010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 최고의 지장으로 꼽히는 조제 무리뉴 감독이 지휘하는 인터 밀란(이탈리아)의 조직적인 협력 수비에 발이 묶이며 무득점에 그쳤다. 조직의 힘이 ‘슈퍼맨’을 압도한 좋은 예이다. 명장 아르센 웽거 아스널 감독조차 ‘메시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했지만, 무리뉴 감독은 메시를 꽁꽁 묶으며 ‘디펜딩 챔피언’ 바르셀로나를 제압한 후 결국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올라 지난해 바르셀로나에 이어 트레블(자국 리그·FA컵·챔피언스리그 우승)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 대세는 포백(4-Back) | 현대로 들어올수록 축구 전술은 ‘어떻게 하면 골을 많이 넣느냐’보다는 ‘어떻게 하면 골을 적게 내주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발전하고 있는 경향이 있다. 현대 축구에서 안정된 수비 라인이 없는 공격 축구는 사상누각에 다름 아니다.

현대 축구 전술은 수비 시스템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최종 수비수(스위퍼)가 두 명의 중앙 수비수(스토퍼) 뒤에 처져 수비를 지휘하는 형태의 수비 전술이 1990년대 이후 퇴조하며 수비수들이 일자로 배치되는 형태가 보편화되었고, 최근에는 거의 모든 나라에서 포백 수비 라인을 사용하고 있다.

남아공월드컵 32강 중 포백 수비진을 채택하지 않은 나라는 북한과 칠레, 뉴질랜드 정도이다. 우루과이가 가끔 스리백을 기초로 한 3-4-1-2 포메이션을 사용하지만, 4-4-2  포메이션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북한과 뉴질랜드는 세계 축구의 변방이다. 독일월드컵에 이어 남아공월드컵에서도 포백 수비 라인을 기초로 한 전술이 득세할 것으로 전망된다.

포백 수비진에서 수비수는 사실상  두 명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좌우 측면 수비수(풀백)가 적극적으로 측면 공격에 가담하는 등 미드필더에 가까운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다. 풀백의 공격에 가담하는 만큼 좌우 날개의 수비적 임무도 중요시된다. 측면 수비수가 전진해 나올 때면 최대 7명이 미드필드에 위치한다. 강력한 압박을 가하고 상대가 볼을 돌리거나 파고들 공간을 최소화한다. 공간 싸움으로 귀결되는 현대 축구에서 포백을 기초로 한 전술이 득세하는 까닭이다.

■ 플랜 B는 기본 | 포백 수비 라인을 기본으로 한 공격 전술은 중앙 스트라이커가 한 명이냐(4-2-3-1, 4-3-3, 4-5-1), 두 명이냐(4-4-2)에 따라 크게 나뉜다. 독일월드컵 때는 대다수 나라들이 원 톱을 세우는 4-2-3-1, 4-3-3을 고집했다. 그러나 남아공월드컵에서는 많은 나라가 투 스트라이커와 원 스트라이커 체제를 병행하는 전술을 택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5월24일 사이마타경기장에서 열린 한·일 평가전에서 ‘허정무호’의 전술 변화가 좋은 예이다. 허정무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은 일본을 상대로 전반에는 이근호(이와타)와 염기훈(수원)을 최전방에 세운 4-4-2로 나섰고, 후반 들어 박주영(AS 모나코)을 원 스트라이커로 배치하고 기성용(셀틱)을 공격형 미드필더로, 김남일(톰 톰스크)과 김정우(광주 상무)를 수비형 미드필더 듀오로 포진시킨 4-2-3-1 포메이션으로 전환했다.

‘허정무호’는 4-4-2를 전술 기본 틀로 하지만 상대나 경기 상황에 따른 전술 옵션으로 4-2-3-1을 채택, 일본전에서 이를 시험 가동해본 것이다.

남아공월드컵에 나서는 대다수 나라는 기본 포메이션 외에 하나 이상의 변형 포메이션을 선보일 것으로 전망된다.

투스트라이커 체제를 축으로 원 스트라이커 전술을 섞어 쓰는 팀으로는 우리나라 외에 스페인·아르헨티나·브라질·잉글랜드 등이 있다. 반대로 이탈리아·독일·프랑스·네덜란드는 원 스트라이커 체제를 기본으로 때에 따라 투 스트라이커를 기용한다.

■ 유로 2008에서 확인된 변칙 전술의 위력 | 스위스와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2008년 유럽선수권(유로 2008)에서 스페인은 ‘메이저 대회 징크스’를 떨쳐버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월드컵에 2년 앞서 열리는 유럽선수권은 ‘미리 보는 월드컵’으로 불린다. 2년 후 열릴 월드컵의 판도와 유행 전술 등을 미리 점쳐볼 수 있는 장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루이스 아라고네스 감독이 지휘한 스페인은 유로 2008에서 4-4-2와 4-1-4-1 포메이션을 절묘하게 섞어 쓰며 유럽 정상에 올랐다. 비센테 델 보스케 감독에게 지휘봉이 넘어간 후에도 스페인의 질주는 이어지고 있다. 남아공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10전 전승으로 본선행을 확정한 나라로는 스페인이 유일하다.

스페인은 유로 2008에서 다비드 비야(발렌시아)와 페르난도 토레스(리버풀)가 최전방에 나서는 4-4-2 포메이션과 비야와 토레스 중 한명이 원 스트라이커로 나서고 미드필더 5명이 뒤를 받치는 4-1-4-1 포메이션을 고루 사용했다. 4-1-4-1 포메이션에서 세스트 파브레가스(아스널)와 샤비 에르난데스(바르셀로나)가 중앙에서 원 스트라이커의 뒤를 받치고 안드레 이니에스타(바르셀로나)와 다비드 실바(발렌시아)가 좌우 측면에 나섰다. 마르코스 세나(비야 레알)는 미드필드 맨 아래에 처져 수비적 임무에 주력했다.

4-1-4-1 포메이션은 재능 있는 미드필더 자원이 차고 넘치는 스페인의 특성을 가장 잘 반영한 전술로 평가된다. 스페인 4-1-4-1의 특징은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을 전통적인 포지션 개념으로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이니에스타와 실바는 전통적인 측면 미드필더보다는 공격형 미드필더나 섀도우 스트라이커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다.

▲ 지난 5월16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구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에콰도르의 평가전에서 조용형이 공을 막아내고 있다. ⓒ시사저널 유장훈

■ 측면 요원 전성시대, 월드컵에서도 확인될까 | 스트라이커와 공격형 미드필더 같은 ‘센터 라인’ 선수들보다 측면 요원들이 각광받는 것이 국내외의 대세이다.

한국 대표팀의 에이스는 왼쪽 날개 박지성과 오른쪽 날개 이청용(볼턴)이다. 박지성과 이청용의 활동 영역은 측면에 국한되지 않는다. 자리를 스위치하거나 중앙으로 폭넓게 파고들며 득점 찬스를 노린다. 특히 박지성은 사실상 ‘프리 롤’ 역할을 부여받고 플레이메이커 노릇을 수행하고 있다.

당대 최고로 꼽히는 포르투갈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와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도 측면 공격수이다. 그러나 이들은 정통 스트라이커보다 한층 강한 득점력을 과시한다. 정교한 프리킥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스페인의 이니에스타와 실바도 ‘에이스’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두 사람 모두 공격 라인의 어디에 배치해도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팔방미인’이다. 네덜란드의 에이스는 ‘제2의 플라잉 더치맨’으로 불리는 아르옌 로벤(바이에른 뮌헨)이고 프랑스의 전술 핵은 프랭크 리베리(바이에른 뮌헨)이다.

이처럼 측면 요원들이 국내외에서 전성기를 맞는 이유는 ‘포지션 파괴’를 기초로 한 전술 다변화와 관련이 있다. 중앙과 측면에 위치한 선수들이 활발히 자리를 바꾸며 공간을 확보하고 득점을 노리는 것이 현대 축구 공격 전술의 흐름이다. 좌우 풀백의 이 공격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진 것도 측면 공격수들의 득점력이 높아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측면 돌파와 크로스라는 과거의 ‘윙 플레이어’가 담당하던 몫을 풀백에게 내준 측면 요원들이 중앙으로 파고들며 적극적으로 득점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포지션과 전술에 걸쳐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가운데 남아공월드컵에서 어떤 변형 전술이 ‘주류’로 등장하게 될지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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