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차 쾌속의 동력 ‘디자인의 힘’
  • 이 은 지 (lej81@sisapress.com)
  • 승인 2010.06.15 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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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렌토R 성공 뒤 K7·스포티지R·K5가 잇달아 인기몰이…2005년 디자인 경영 선언의 결실로 평가돼

기아자동차의 질주가 시작되었다. 빠르다. 가히 폭주라 할 만하다. 마침내 합종연횡, 그 합병의 힘이 폭발했다. 지난해 5월 출시된 쏘렌토R로 판매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 기아는 K7, 스포티지R, K5가 연타석 홈런을 날리면서 역대 최고의 호황을 누리고 있다. K5는 자동차 애널리스트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디자인과 사양을 지닌 모델로 평가받으며 출시 이전부터 주목되었다. K5는 두 달 만에 계약 대수가 2만대를 돌파했다. 기아차는 K5의 판매 호조 덕분에 올해 1월 28.5%였던 내수 점유율이 5월에는 34.5%까지 치솟았다. 이에 힘입어 기아차의 주가는 3만3천원(6월10일 기준)으로 올랐다. 신정관 KB 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올해 말에 4만원까지 오를 것으로 예상한다. 기아자동차가 목표로 잡은 내수 점유율 35%도 6~7월쯤에 도달할 것으로 본다”라고 전망했다. 1997년 현대자동차에 합병된 이후 2005년까지 기아차만의 고유한 색을 찾지 못해 현대차의 그늘에 가려왔던 기아차가 화려하게 부활한 셈이다.

기아차는 실제 합병 이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현대차그룹의 합병이 잘못된 판단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5년 정의선 당시 기아차 사장은 디자인 경영을 선언했다. 그 후 기업의 전략도, 문화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디자인팀의 결정 권한이 눈에 띄게 커졌다. 송세영 기아내장디자인1팀장(이사대우)은 “과거에는 설계 기술에 디자인을 맞추었다면 2005년 이후에는 디자인에 설계 기술을 맞추는 시스템으로 변화했다. 기존의 사고를 완전히 뒤집는 것으로, 가히 혁명적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송팀장은 기아차의 26년차 수석 디자이너로, 포르테 디자인으로 2008년 PIN UP 디자인어워드 금상을 수상한 실력파이다.

기아차 디자인팀은 내·외장 각각 두개 팀씩 네 팀이 있다. 여기에 컬러디자인팀 1개팀과 5~10년 뒤를 미리 내다보고 디자인하는 2개의 선행팀이 있다. 총 일곱 개 디자인팀의 인원은 수백 명에 이른다. 신차 한 대에 들어가는 평균 개발 비용은 4천억~5천억원 정도이다. 이 가운데 디자인 개발에 투자되는 금액은 투자액의 1%인 50억원 정도이다.

 

▲ 경기도 화성시에 위치한 기아자동차 디자인연구센터에서 임승빈·송세영 팀장(왼쪽부터)이 1층에 전시된 K7 콘셉트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시사저널 임준선

디자인에 설계 맞추는 시스템으로 변화

선행팀은 원래 기아차에는 없었다. 합병한 이후 현대차와 같이 선행팀이 꾸려졌다. 처음에는 전시카나 콘셉트카를 만드는 것 위주로 운영되다가 2005년부터 전시카의 디자인과 거의 똑같이 상용차를 만드는 실용적인 성격의 팀으로 변해갔다. 기아차가 디자인 경영에 성공적으로 진입했다는 평가를 가져온 쏘울이 바로 전시카의 디자인이 그대로 상용차에 구현된 첫 모델이다. 그래서 송팀장은 쏘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그는 “자동차에는 디자인 형식이 정해져 있다. 하지만 쏘울은 전혀 다른 형식으로 차를 만들었다. 기아차가 쏘울로 디자인 경영에 나선다는 인상을 확실하게 심어주었다. 폭발적으로 판매를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시장의 변화를 주도하는 얼리어답터 그룹에게 굉장히 호평을 받았다”라며 흐뭇해했다.  

▲ 지난 4월30일 부산모터쇼에서 K5가 최초로 공개되자 관람객들이 차 내부를 살피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기아자동차 제공

디자인팀 내 분위기도 달라졌다. 디자인 콘셉트를 정하기까지 팀원들끼리 스터디그룹을 꾸려 늘 이야기하는 분위기도 만들어졌다. 창의적인 사고를 이끌어내기 위해 취미 생활을 권장하기 시작했다. 모델 시안이 어느 정도 다듬어지면 엔지니어링팀과 마케팅팀이 모두 모여서 품평회를 열어 아이디어를 주고받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도움이 되지만, 어려움도 있다. 송팀장은 “다른 팀들과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 예를 들어, 마케팅팀은 판매와 직결되기 때문에 현재에 기반을 둔 사고를 하는 편이다. 하지만 디자인팀은 미래 지향적인 사고를 한다. 마찰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원칙은 디자인의 콘셉트를 지켜내자는 것으로 정해져 있다”라고 설명했다.

임승빈 기아외장디자인1팀장은 피터 슈라이어 디자인 총괄부사장을 기아차의 완성도를 높인 일등공신으로 꼽는다. 임팀장은 “과거에는 디자인이 한번 완성되고 나면 손을 데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완성된 디자인마저도 수십 번씩 수정을 거듭한다. 피터 슈라이어는 세밀한 부문을 다듬는 과정에서 통일성과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조정해주는 역할을 상당히 잘 해주었다. 그 결과 K7과 K5 같은 좋은 디자인이 나올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거듭되는 수정 작업이 질릴 만도 하지만 오히려 디자인팀에서는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기회로 생각하며 즐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임팀장은 이를 디자인팀의 ‘파워’라고 표현했다.

예전 스포티지 고객 겨냥해 K시리즈 디자인

디자인팀의 역할과 권한이 대폭 강화되면서 부담감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특히 3~4년 뒤를 미리 내다보고 콘셉트의 방향을 정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임팀장은 “디자인이 영감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판단을 뒷받침해주는 자료들이 필요하다. 국내에는 미래를 예측·분석해둔 자료가 많지 않다. 이럴 때 디자인팀장이 방향을 결정하고 팀원을 이끌어나가야 하는데, 이때 확신이 없으면 힘이 든다”라고 털어놓았다. K7과 K5는 2006년 개발 초기 단계에서부터 성공을 확신한 작품이다. 기아차의 기존 고객은 스포티지를 선호하는 젊은 층이 대다수였다. 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아닌 승용차를 사기를 원한다는 가정하에 SUV의 활동성과 강인함, 그러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담은 디자인으로 콘셉트를 정했다. 은백색의 광택이 나는 크롬을 앞문에서부터 뒷문까지 넓게 이어지게 함으로써 활동성을 강화했고, 차의 천장 높이를 낮춰 스포츠카와 같은 느낌이 나도록 디자인한 것이다. 임팀장은 “K시리즈는 차의 기본 디자인이 잘 나왔기 때문에 선을 하나 더 넣거나, 크롬 라인을 하나 더 넣더라도 멋있게 구사될 수 있었다”라고 자평했다.

K5로 호황기를 맞이한 기아차는 잔칫집 분위기이지만 디자인팀에는 오히려 긴장감이 감돈다. 송팀장은 “지금 호평을 받고 있는 K시리즈는 모두 3~4년 전에 디자인 시안이 나왔다. 지금 기아차가 받고 있는 스포트라이트를 이어가려면 3~4년 후를 대비한 작업들을 지금부터 잘 해나가야 한다. 친환경적인 전기차 개발이나 기아차의 전략 차종을 경제적이면서도 효과적으로 디자인하는 것이 디자인팀에게 던져진 과제이다. 큰 트렌드에 맞춰서 하나씩 완성해나가겠다”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시사저널 임준선

 

기아차 마케팅팀은 전례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직원들의 표정도 달라졌다. 이한응 국내마케팅팀 부장(사진)은 “불과 1년 전만 하더라도 지점장들 얼굴 보기가 미안했다. 힘들다는 말만 쏟아지니 죽을 맛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지점장 회의에 갔더니 모두 웃는 낯으로 변했더라”라며 흐뭇해했다. 이부장은 1989년 기아자동차에 입사한 이후 줄곧 마케팅팀에서 역량을 쌓아왔다. 그는 지난 2004년부터 2007년까지를 기아차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시기로 꼽았다. 2005년까지 기아차만의 차별화된 색을 내지 못했던 터라 마케팅팀이 전면에 나서서 광고할 만한 콘셉트 마케팅 전략이 없었다. 신차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2008년에 김충호 현대차 부사장이 기아차 국내영업본부장으로 오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김본부장은 지점장에게 책을 선물해주거나, 매주 수요일마다 인터넷에 떠도는 재밌는 이야기를 묶어서 메일로 일일이 보내주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영업 현장에서 여유도 없이 각박하게 뛰어다니는 이들에게 굉장히 큰 활력소로 작용했다고 한다. 이부장은 “본부장이 나서서 영업 직원들을 챙긴다는 생각이 들자 사기가 많이 올라갔다. 마침 신차 출시 계획이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하면서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라고 회고했다.

마케팅팀에서는 다른 자동차업체에서는 하지 않은 전략들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자동차 이름을 정할 때 ‘뉴로 마케팅’을 가미해 K시리즈 이름을 탄생시켰다. 뉴로 마케팅이란 두뇌 활동을 분석해 소비 심리를 파악하고, 판매 전략으로 연결하는 마케팅 기법을 말한다. 여기에 더해 가마솥 마케팅 전략을 전면에 내걸었다. 신차가 나오기 한두 달 전에 광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게는 6개월, 많게는 1년에 걸쳐 조금씩 베일을 벗겨내는 식으로 홍보 전략을 세웠다.

이부장은 지난해에 홍보팀에서 담당하던 제품 간접 광고(PPL)도 마케팅팀으로 가져왔다. 단순 광고가 아닌 직접적인 판매로 이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마케팅 홍보 효과를 끌어내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부장은 신차가 출시되기 1년 전부터 드라마 시놉시스를 읽어보고, 기아차의 신차를 어떻게 등장시키는 것이 좋을지 꼼꼼하게 따져보기 시작했다. 그 결과 K7은 KBS 드라마 <아이리스>를 통해 신차 발표 이전부터 소비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이부장은 “기본적으로 기아차의 성능이 좋아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기아차 성능에 비해 국내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많이 떨어진다. 수입차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소비자의 감성에 소구하는 마케팅 전략을 펼쳐나가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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