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성 길이냐, 이회창 길이냐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10.06.15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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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지 약해진 정운찬 총리 고민 깊어져… 여권 ‘쇄신’ 분위기에 떠밀려갈 가능성

“김영삼 정부 때 총리를 지낸 이홍구·이수성의 길을 갈 것인지, 아니면 이회창의 길을 갈 것인지 눈여겨볼 일이다.” 지난해 9월, 이명박 대통령이 정운찬 총리 내정 사실을 밝혔을 때 정치권에서 이런 전망이 나왔다. 총리에 임명된 지 약 9개월 만에 정운찬 총리는 이제 어느 길로 갈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6·2 지방선거 후폭풍이 여권을 강타하고 있는 지금, 그 한가운데에 정총리가 서 있다. 그의 선택에 따라서 향후 정국은 전혀 딴 그림이 그려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말이 없다.  

 

▲ 6월4일 정운찬 총리가 굳은 표정으로 회의장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정운찬 총리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청와대 참모진 개편을 주요 골자로 하는 국정 쇄신안을 건의할 것이라는 얘기는 지난 6월9일부터 정가에 퍼졌다. “정총리가 ‘이회창의 길’을 선택하는 것 아닌가”라는 얘기가 취재기자들 사이에서 나돌았다. 하지만 하루 만에 분위기는 급변했다. 사실보다 크게 잘못 전해졌다는 것이다. ‘해프닝’이라는 지적도 있다. 청와대와 총리실에서 동시에 나오는 말이다. 하지만 정총리가 무언가 생각이 복잡해진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래서 이대로 그냥 조용히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지방선거 직후 이대통령에게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가 일단 접었지만, 여전히 그의 책상 서랍에는 사퇴서가 남아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그의 주변에서는 “이대로는 안 된다. 이제는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때이다”라는 주문이 강하게 전달되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운찬 위기설’은 사실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한때 대권 주자로 거론되면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강력한 대항마로 떠오르기도 했으나, 이제는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오세훈 서울시장·김문수 경기지사·이재오 국민권익위원장 등에게도 뒤처지는 상황이 되었다. 세종시 수정안 관철을 위해 의욕적으로 현장을 뛰어다녔으나, 여권 내에서 뭔가 손발이 안 맞는 느낌이었다. 여론은 더 악화되었고, 그의 존재감은 점점 더 왜소해져갔다. 오히려 정무 기능 부실로 인한 정총리의 몇 가지 해프닝성 실수가 여론을 타면서 코미디 대상으로까지 전락해버렸다.

당시 정총리와 가까운 것으로 알려진 학계의 한 지인은 이런 현상에 대해 “이명박 정부가 멀쩡한 분 모셔가서 너무하는 것 아니냐. 역시 (총리 후보자 내정 때) 말렸어야 했다”라며 불쾌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과 청와대의 일방 독주식 국정 운영 속에서 전혀 제 목소리나 역할을 찾지 못한다는 비판이 계속되었다. “결국,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고 박 전 대표를 견제하기 위한 정국 돌파용 카드에 불과했다”라며 ‘조기 용도 폐기론’까지 나올 정도였다. 여권 내 지지 기반이 취약했던 정총리에게 그나마 우군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당내 초선 의원을 중심으로 한 소장파 의원 그룹도 별다른 힘이 되지 못했다.

정총리는 지난해 9월 총리에 취임하면서 “현재로서는 대권에 별다른 뜻이 없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정치평론가 유창선 박사는 “정총리는 기본적으로 대권에 뜻이 있는 사람이고, 기회만 닿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도전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소장은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레임덕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과거 ‘9룡’을 경쟁시킨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철을 따를 것이다. 잠재적인 대권 주자들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서 관리하려 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 6월9일 한나라당 초선 의원들이 여권의 쇄신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연합뉴스

“필요 이상으로 여권 내 힘겨루기에 휩쓸린 것도 위상 약화 요인”

특별한 정치적 기반이 없는 정총리 입장에서도 대권 승부수를 띄우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이대통령의 지원이 불가피할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했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졌다. 이대통령은 정총리에게 세종시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했고, 정총리는 이대통령의 친서민 중도 실용 노선을 자신이 주도해나가기를 희망했다. 하지만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세종시 해결사’를 자임한 정총리였지만, 세종시 문제는 갈수록 꼬여만 갔다. 청와대 내에서는 “솔직히 기대했던 것보다 많이 못 미친 것이 사실이다”라는 말로 정총리에 대한 실망감이 표출되기도 했다.

총리실에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의 ‘책임 총리제’에 비하면 총리실의 위상이 현 정부 들어서 한없이 추락하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청와대가 일방적으로 정국을 이끌어가는 상황에서 총리실의 운신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당·정·청 8인 회동’을 통해 정총리가 정국을 주도하는 것처럼 비쳤지만, 이는 세종시 문제에만 국한되었을 뿐, 실제로는 청와대가 거의 모든 상황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총리실의 불만은 정무실장 임명을 둘러싼 여권 내의 불화 때 절정에 달했다. 학자 출신인 정총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정무 기능의 취약성에 있다는 주변의 건의에 따라, 정총리는 자신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들에게 정무실장 추천을 부탁했고, 그에 따라 국정원 출신의 전략통으로 알려진 김유환 실장이 추천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김실장은 올해 2월 ‘천신만고’ 끝에 취임할 수 있었다. 무려 5개월 만에 총리실 정무실장을 임명한 것이다.

정총리가 필요 이상으로 여권의 내분에 휩쓸렸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여권의 대표적인 힘겨루기는 이상득 의원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원로파’와 정두언 의원과 초선 의원들이 주축을 이루는 ‘소장파’의 대립이다. 정총리가 임명되었을 당시의 이병용 정무실장은 ‘이상득계’로 알려졌다. 정총리의 배경을 형성하고 있던 소장파에서는 정무실장의 교체 필요성을 주장했다. 정총리가 인사청문회에서 큰 상처를 입게 만든 책임을 물었다는 얘기도 나왔다. 결국, 지난해 11월 이실장은 사퇴했고, 소장파가 추천한 인사들이 정무실장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잇따라 낙마했다. 결격 사유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여권 내의 힘겨루기 탓에 밀려났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올해 2월 김실장 인사안이 통과되었다. 여기에는 2007년 인수위 시절부터 김실장과 친분을 맺어온 정두언 의원의 힘이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정총리의 정치적 후원군으로 알려진 정의원과 초선 소장파들이 청와대와 계속 반목하는 현상을 보이자 정총리 주변에서는 “소장파에만 너무 기대지 말고 친이계 전반에 걸쳐, 나아가서는 친박계까지 교류의 폭을 넓히는 것이 좋겠다”라는 건의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총리가 올해 들어 1월부터 각 지역별로 한나라당 의원들을 두루 접촉하는 자리를 만든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이번 지방선거 결과는 정총리 개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충청권에서의 참패는 그만큼 정총리의 입지를 좁아들게 만들었다. 여권 내부에서 조심스럽게 정총리의 책임론과 사퇴 요구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때마침 그의 국정 운영 파트너였던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와 정정길 대통령 실장이 사퇴 의사를 밝혔다. 정총리도 이대통령에게 사퇴 의사를 표명했으나 “내각은 흔들림 없이 국정에 임하라”라는 뜻을 전달받았다. 이때부터 정총리는 쇄신안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국정 경험을 통해 갖게 된 문제의식과 함께 주변의 강력한 건의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내 소장파 의원들이 배경이라는 얘기와 함께, 그 중간 역할에 김실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설득력 있게 나왔다. 

정총리를 잘 아는 한 지인은 “정총리의 스타일상 그가 먼저 대통령을 강하게 압박하면서 반대 급부를 얻어내려는 모습을 연출하기는 힘들다. 어쨌든 충청권 참패의 원인에 자신의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고, 그동안 청와대와 큰 트러블이 있었다고 보기도 어렵다”라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국정 난맥상에 책임을 느낀 정총리가 주변에 자문을 구하는 과정에서 청와대의 개편 요구가 크다는 점을 인식하고 그에 따라 필요성을 생각하는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 목소리 중에는 당내 소장파의 목소리가 제일 컸을 것이라는 분석은 충분히 가능하다. “전면 쇄신 없이 이대로 있다가는 총리의 역할도 그냥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다”라는 강한 주문이 있었다는 후문이다.

현재 정총리가 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전망되고 있다. 여권의 분위기를 전면적으로 쇄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를 위해서 자신이 먼저 사퇴를 하는 경우, 그리고 사퇴하지 않고 이대통령의 국정 변화 구상을 지켜보는 경우이다. 하지만 강하게 대통령을 압박하며 사퇴하는 배수진을 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학자 출신이기 때문일까. 정총리는 이회창 전 총리보다는 이홍구·이수성 전 총리와 더 가깝다는 전언이다. 이제 정치권에서는 더 이상 ‘정운찬 대권’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정총리는 지금 ‘정운찬’이라는 이름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막다른 퇴로에 몰려 있는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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