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보다 뜨거운 ‘돈다발 추문’
  • 파리·최정민 | 통신원 (sisa@sisapress.com)
  • 승인 2010.07.14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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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로레알 창업주 딸로부터 대선자금 수수 의혹 불거져…사르코지 대통령까지 연루돼 ‘일파만파’

‘LA FRANCE PLUMEE’- ‘깃털 뽑힌 프랑스!’ 지난 7월8일자 프랑스 주간지 <꾸리에 앵테르나시오날>의 1면 제목이다. 문구와 함께 프랑스를 상징하는 장닭의 털이 뽑혀 있다. 지구촌이 월드컵으로 후끈 달아오른 지금, 월드컵에서 일찌감치 탈락한 프랑스는 다른 열기로 뜨겁다. 바로 베탕쿠르 스캔들이다.

▲ 7월7일 유럽의 각 신문 1면에 니콜라스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부호 릴리앙 베탕쿠르의 사진이 크게 실렸다. ⓒAFP연합

사건은 세계적인 화장품 업체인 로레알 대주주 가문의 재산 분쟁에서 출발했다. 로레알의 창업주 유젠 슈엘러의 딸인 릴리앙 베탕쿠르(87)는 1백70억 유로의 자산가로 프랑스 부호 순위 3위이며, 여성으로는 1위이다. 지난 2007년 남편인 앙드레 베탕쿠르가 죽자 로레알의 지분 대부분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녀의 유일한 상속인은 외동딸인 프랑수아즈 베탕쿠르 메이어(57)였다. 그런데 릴리앙 베탕쿠르가 자신과 친분이 있던 사진작가인 프랑수아 마리 바니에에게 10억 유로에 달하는 재산을 증여하자, 프랑수아즈는 베니에를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그녀의 입장은 바니에가 연로한 나이로 분별력이 흐려진 어머니를 이용해 재산을 가로챘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프랑수아즈는 베탕쿠르와 회계 담당의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를 수사팀에 증거로 제출했고, 이것이 스캔들의 도화선이 되었다.

‘불법으로 도청해 녹음한 테이프가 수사 자료로 쓰일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논쟁이 시작될 틈도 없이 그 녹음된 내용만으로 프랑스는 발칵 뒤집혔다. 대화 중에는 릴리앙 베탕쿠르가 정기적으로 정치인들을 관리하고 있으며, 그 대상으로 우파 집권 여당의 자금 담당책이자 현 노동부장관인 에릭 뵈르트와 사르코지 대통령이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로레알의 재산 분쟁에 대한 재판은 이 불법 도청 자료가 공개되면서 무기한 연기되었다. 3주간 거의 매일 새로운 내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에릭 뵈르트 현 노동부장관이 당시에는 재무부장관이었으며 베탕쿠르의 자금 세탁을 도와주었다’는 설이 나오고, 그의 아내가 베탕쿠르의 개인적인 재산 관리인으로 일했다는 사실까지 드러나자 그야말로 스캔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매일 새로운 소식으로 가득 찬 연속극이 되어버렸다.

이번 사태를 둘러싸고 여야의 대립은 극한으로 치달았다. 사회당은 3주 내내 대정부 질문을 통해 여당과 총리를 몰아세웠다. 이에 여당은 현재 추진 중인 연금 개혁을 방해하기 위한 비열한 술수라고 응수했다. 급기야 지난 7월6일 하원 대정부 질문에서는 프랑수아 라부앙 재정부장관이 “사회당의 지금 행동은 극우의 것과 같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하자 이에 격분한 야당 의원들이 모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사회당 대변인인 브누아 아몽은 “이미 에릭 뵈르트 노동부장관은 개혁을 추진할 정당성을 잃었다”라고 주장했다. 사회당 당수인 마틴 오브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분명한 답변뿐이다”라고 원칙론을 고수했다.

여야가 공방을 주고받는 가운데 지난 7월7일 베탕쿠르의 옛 회계사인 클레르 티부가 인터넷 매체인 ‘메디아파르’를 통해 지난 대선 자금에 관한 새로운 증언을 쏟아내자 사태는 사르코지를 정조준하게 되었다. 사르코지가 베탕쿠르에게 정기적으로 정치 자금을 받아왔다는 것이었다. 같은 날 사르코지 대통령과 에릭 뵈르트 노동부장관은 엘리제궁에서 장시간 만났고, 뵈르트 장관이 저녁 뉴스에 출연해 혐의를 강력 부인하며 반전 모드로 돌아섰다. 나딘 모라노 가족부장관을 비롯한 여당의 의원과 장관들이 일제히 대통령과 뵈르트 장관을 엄호하는 데 적극 나선 것은 물론이다. 클레르 티부는 메디아파르가 보도한 이튿날 자신은 사르코지를 지목하지 않았다며 ‘다수의 정치인이었다’라고 한 발짝 물러섰다.

▲ 지난 3월2일 대통령의 만찬 초대를 받은 에릭 뵈르트 노동부장관(오른쪽) 부부가 프랑스 파리 엘리제궁에 들어서고 있다. ⓒEPA
혐의 부인하는 가운데 우파에서도 대통령의 해명 요구해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우파 내부에서조차 대통령의 해명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온 것이다. 프랑스 집권 여당의 장 프랑수아 코페 의원은 “대통령의 직접적인 해명이 필요하다”라고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다른 장관들과 여당 의원들이 대통령과 노동부장관을 엄호하느라 바빴던 분위기를 감안한다면, 도드라진 행보였다. 장 프랑수아 코페는 시라크와 드빌팡 계열의 인물이다. 사르코지가 재무부장관이던 시절 자신이 사르코지를 내사한 것 때문에 사르코지와 사이가 결코 좋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더구나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왜 이 시점이냐’라는 것이다. 외관상 문제의 발단은 베탕쿠르와 그녀의 딸 사이에 벌어진 재산 분쟁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 자금과 관련된 내용과 현 노동부장관의 연루설이 제기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소송을 제기한 베탕쿠르의 딸 프랑수아즈의 변호사는 전 총리이자 사르코지의 숙적인 드빌팡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6월19일 드빌팡 전 총리는 여권 내부에 자신의 새로운 세력을 출범시켰다. 나흘 전 사르코지 대통령은 시라크 전 대통령 부부와 점심을 같이했는데, 단순한 식사로 보기 힘든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사르코지와 시라크 전 대통령은 3년간 단 네 차례밖에 점심 회동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드빌팡의 출범을 두고 ‘공식적인 통보’가 있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프랑스 집권 여당 내부에서 대통령이 직접 해명하라는 요구가 나온 것이 가볍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여권 분열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여야의 극한 대립 속에 사회당을 자극한 바루앙 장관 또한 시라크의 정치적인 양자이다. 아들이 없는 시라크가 그를 아들처럼 아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바루앙은 시라크가 집권했을 당시 드빌팡 내각에서 사르코지의 후임으로 42세의 나이에 내무부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사태의 정점이었던 7월6일 TV 방송 프랑스5의 좌담회에 자리한 프랑스 시사 주간 <엑스프레스> 의 크리스토프 바르비에 편집장은 “여권은 차기 대선 모드에 접어들었다”라고 분석했다. 여권 내부에서의 주도권 잡기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드빌팡의 정치 세력이 출범한 이후 사르코지는 지속적으로 드빌팡 계열의 의원들을 엘리제로 불러 환담했다고 전해진다. 일부는 드빌팡과 거리를 두었으며, 일부는 할 말을 다하고 나왔다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사태의 추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좌파는 분열로 망하고 우파는 부패로 망한다”라는 말이 있다. 현재 프랑스 우파 여당은 분열과 부패를 동시에 안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프랑스 기상청은 올해가 2003년 폭염 사태 이후 가장 더운 여름이 될 것이라고 예보한다. 2003년 폭염 사태로 1만5천명의 노인이 사망했다. 예고된 올여름의 무더위처럼 프랑스 정치판, 그것도 엘리제궁의 여름은 에어컨이 있어도 시원하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 7월8일자 르 푸앙의 타이틀은 ‘살인적인 여름’이었고, 표지 사진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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