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의 시대’ 집권 3년차
  • 감명국 (kham@sisapress.com)
  • 승인 2010.07.14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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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에서도 대형 게이트 잇따르며 내부 동요…이대통령 인사 스타일상 여권 내 권력 싸움은 ‘필연’

결국은 권력 싸움이다.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 사찰 논란과 영포회 및 선진국민연대 멤버들의 국정 전횡설 등의 배경에는 ‘권력욕’이 자리 잡고 있다. 노련한 정치인인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는 이 점을 정확히 간파하고 여권의 심장부를 예리하게 후벼 팠다. 그 자신이 직접 지난 김대중 정부에서 권력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경험이 있던 터였다. 박원내대표는 “박영준 국무차장이 청와대 개편안을 작성해 청와대로 들어가겠다 하니 (여권 일부가) 막자는 것이다”라고 규정했다. “청와대 내부와 한나라당에서 박차장을 막아달라는 제보를 해 오고 있다”라며 여권의 속을 헤집어놓기도 했다. 적전 분열을 노리는 고단수이다. 이미 여권 내부에 권력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요즘 부쩍 ‘집권 3년차 증후군’이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도 결국은 권력의 속성에서 비롯된다. 대통령의 임기가 반환점을 지나 내리막길로 가면, 권력을 좇는 정치인들은 자연히 ‘미래 권력’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대통령은 이런 권력 누수를 막기 위해 차기 대권 주자들을 직접 관리하려 들지만, 갈수록 그 힘은 빠지게 된다. 여기저기서 게이트성 스캔들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스캔들이 하나같이 여권 내부에서 불거져 나온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권력 내부의 분열과 갈등이 가속화되는 것이다. 지금 이명박 정부에서도 전형적인 집권 3년차 증후군이 반복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차기 권력과 관계되어 있다.

 

▲ 이명박 대통령이 4월19일 청와대 수석 비서관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역대 정권마다 항상 여권 내부의 갈등은 존재해왔다. 대통령에 기대는 주류와 이 대척점에 서 있는 비주류의 대립 구도가 그렇다. 노태우 정부 때에는 민정계와 민주계의 반목이 끊이지 않았다. 김영삼(YS) 정부 때에도 YS 가신 그룹과 김종필(JP) 대표 간 갈등 증폭으로 결국 JP가 탈당하고 나가면서 여권 분열을 초래했다. 김대중(DJ) 정부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불안한 동거를 하던 JP의 자민련이 ‘DJP 연대 파기’를 선언하며 공동 정권을 깼다. 노무현 정부 때는 일찌감치 여권이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분열했고, 이후 잇단 선거 참패와 지지율 급락으로 여권 내부 분열이 가속화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결국 한나라당에 연정을 제의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는 여당의 반발을 초래하며 당·청 간의 갈등으로 비화되었다. 공교롭게도 이 모든 일은 집권 3년차에 불거졌다. 지금의 이명박 정부에서도 세종시 수정안 부결 등 친이계와 친박계의 내분이 절정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주류 내부의 갈등에 있다. 이는 곧 권력 싸움이 되고, 대통령의 급격한 레임덕으로 이어진다. 노태우 정부 최대 계파였던 민정계는 미래 권력인 YS를 따르는 ‘신민주계’가 대거 이탈하면서 지리멸렬해졌다. 이후 노태우 대통령은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렸다. 김영삼 정부 때 역시 똘똘 뭉쳐 있는 것처럼 보이던 여권 주류는 집권 하반기 ‘김현철 게이트’ 등으로 YS가 흔들리자, 무게 중심 추가 ‘대쪽’ 이미지의 이회창 전 총리 쪽으로 급속히 쏠렸다. YS의 집권 말기 1년은 사실상 ‘식물 대통령’ 상태였다. 김대중 정부 때에도 DJ 가신 그룹을 상징하던 이른바 ‘양 갑’(권노갑·한화갑)의 갈등이 증폭된다. ‘진승현 게이트’ ‘최규선 게이트’ 등 정신없이 터지는 대형 스캔들에 세 아들이 모두 연루된 것으로 드러나자 DJ는 사실상 통제력을 잃게 된다. “취임 직후부터 레임덕이었다”라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푸념처럼, 참여정부 말기에도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 사수파와 신당파 간의 극심한 대립이 이어졌고, 결국 신당파가 승리한다. 비정한 권력의 세계를
보여주는 우리의 역사이다.

호불호 분명한 이대통령, 한번 믿으면 끝까지 챙겨

이명박 대통령도 이런 점을 모를 리 없다. 이대통령은 지난 2월 청와대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집권 3년차에 접어들면서 근무 자세에 긴장이 풀릴 수 있다. 도덕적 해이가 생기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달라”라고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결과적으로 이대통령의 이런 우려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선거의 패배 혹은 국정 지지율의 추락, 그에 따른 여권의 동요와 권력 내부의 갈등 그리고 그것이 결국 대형 ‘게이트’ 사건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징후들이 지금의 정부에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이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 불러온 필연적인 결과라는 설명도 따라붙는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지금 ‘MB 권력의 타깃’으로 지목받고 있는 박영준 국무차장에 대해서 “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또, 실제 일이 엄청나게 많다. 대통령이 엄청나게 많은 오더를 내린다. 그것을 다 감당해낼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그만큼 대통령 신임이 각별하다”라고 설명했다. 이대통령은 호불호가 분명한 성격이다. 자수성가형의 건설 현장 출신인 이대통령은 ‘곱게 자란 도련님’ 스타일을 싫어한다. 자기 머리만 믿고 말 많고 게으른 스타일은 딱 질색이라고 한다. 이대통령이 정치인을 싫어하는 것은 그의 인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여의도를 멀리한다. 대신 그는 실무형을 좋아한다. 이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은 한번 믿고 신임하면 웬만해서는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챙기는 것으로 유명하다. 박차장이 지난 2008년 6월 ‘고·소·영’ ‘강·부·자’ 인사 실패의 책임자로 지목되며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6개월 만인 2009년 1월 총리실 국무차장으로 불러들인 것도 그 때문이다. 이번에 큰 파문을 일으킨 이영호 고용노사비서관 역시 지난해부터 이미 여권 내에서 말이 많았고, 실제 지난해 10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해임 건의 보고서까지 올렸지만, 이대통령은 이를 묵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는 하나였다. “일을 열심히 한다”라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여의도의 불만은 쌓여갔다.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캠프’에서 핵심 역할을 한 친이계의 한 의원
은 지난 5월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다 알다시피 지난 대선 때의 진짜 전쟁터는 8월의 한나라당 경선이었지, 12월의 대선이 아니었다. 경선에서 이대통령이 박근혜 전 대표를 이겼을 때 사실상 대선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찌된 것이 경선 때 피 터지게 싸웠던 장수들은 지금 다 이러고 있고, 대선 때 합류해서 좀 껄떡거리던 인사들이 지금 다 한 자리씩 꿰차고 있다”라고 인사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토로한 바 있다. 그의 말은 사실상 박차장 등을 겨냥한 말이었다.

또 다른 친이계의 한 의원은 “이른바 486세대이면서도 박차장의 사고는 TK 특유의 성골 의식, 즉 엘리트 의식의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라고 비판했다. 자기 주변만 챙긴다는 뜻이다. 일각에서 박차장을 노무현 정부의 이광재 강원지사와 비교하는 것에 대해 그는 “내가 이지사를 잘은 모르지만, 그는 정치인으로서 굉장히 스킨십이 넓은 장점을 지닌 것으로 알고 있다. 의외로 한나라당에서도 그를 좋게 평가하는 의원들이 많다. 그에 비하면 박차장은 인간관계의 폭이 굉장히 좁다”라고 평가 절하했다.

박차장이 이런 비난에 직면한 것은 2008년 인수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수위 때부터 인사에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해 온 그는 이명박 정부의 첫 조각 밑그림을 사실상 류우익 초대 대통령실장과 함께 둘이서 다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권력 주변에서 그에 대한 시기와 질투의 시선은 점점 더해져갔다. 그도 그럴 것이 대선 전까지만 해도 박차장의 위치는 별로 보잘 것 없었다. 이상득 의원의 보좌관 생활을 오래 했고, MB 참모로 자리를 옮겼을 때에도 최고직이 서울시 정무국장에 불과했다. 2007년 대선 캠프에서도 그의 직함은 ‘보좌역’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광재·안희정 지사처럼 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한 동지적 관계도 아니었다. 자연히 정치권에서 “가소롭다”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 ‘한보 게이트’에 연루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1997년 2월21일 대검 청사에 출두하고 있다. ⓒ시사저널 우태윤

‘미래 권력’ 향한 이재오·정두언 행보에 주목하는 시선 많아

주변에 따르면 박차장은 지금도 2008년 총선에 출마하지 못한 것을 가장 아쉽게 생각한다고 한다. 박차장 역시 여의도에서 자신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실제 2008년 초 이명박 정부 출범 밑그림을 다 그린 뒤 그해 4월 국회의원 출마를 위해 대구로 내려가고자 했다. 그때 이대통령이 박차장과 직접 독대하며 끈질기게 설득해 결국 청와대에 남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라도 이대통령은 박차장을 끝까지 챙기려 할 것이라는 게 주변의 전언이다. 반면, 박차장은 오는 2012년 총선 출마의 꿈도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번 파문이 불거지자 친이계의 핵심으로 알려진 이재오 전 국민권익위원장과 정두언 의원이 누구보다 강하게 비판하고 나선 것에 대해 주목하는 시선이 많다. 일각에서는 친이계를 크게 ‘이상득계’와 ‘이재오계’로 분류하고 소계보로 ‘정두언계’를 따로 말하기도 한다. 그중에서 향후 이재오계와 정두언계가 어떤 행보를 보일지 예의 주시하는 흐름이 강하다. 두 사람은 지난 2007년에 힘을 합쳐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에 공을 세운 일등공신이지만, 현 정부에서 크게 덕을 입었다고 보기 어렵다. 한 정치평론가는 “이명박 대통령은 사실상 당에 개인적인 지분이 거의 없는 바지 사장과 마찬가지다. 심지어 진정한 이명박계는 포항에 지역구를 둔 이상득·이병석 의원뿐이라고 하는 얘기도 있다. 차기 정권 창출이 중요한 이재오 전 위원장과 정두언 의원의 입장에서는 이제 이대통령보다는 차기 대권 주자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라고 밝혔다. 실제 정두언 의원은 얼마전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친이계에 대해 묻는 질문에 “이미 이대통령은 대통령이 되었다. 이제는 우리가 우리 정치를 해야 한다”라고 밝힌 바 있다. 원래 직설 화법을 잘 구사하는 것이 정의원의 스타일이라 해도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정의원, 박차장과 함께 인수위를 이끌었던 ‘3인방’ 중의 맏형 격인 임태희 고용노동부장관을 이번에 대통령실장으로 새롭게 내정한 이대통령의 의지도 남달라 보인다. 여권의 권력 내부에 심상찮은 기운이 감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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